50화 : 8장 요검설화(妖劍雪花) (2)
“보고 싶었습니다 황숙·”
진무원이 떨어지며 황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철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헌헌장부가 되셨군요· 이 황철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합니다·”
바람이 불어와 진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진무원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반듯한 이마에 우뚝한 코 시원한 검미 아래 자리 잡은 깊은 눈동자와 고집스레 다물려 있는 두꺼운 입술· 뛰어난 미남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도 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외모였다·
옷을 벗은 상체는 마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것처럼 근육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진무원이 숨을 쉬고 말할 때마다 근육이 마치 한 올 한 올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칠 년이란 시간은 진무원을 소년에서 당당한 남자로 변화시켰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진무원은 적암산에서 홀로 무공을 익혔다· 간혹 황철이 찾아와 생필품을 주고 떠나는 시간 외에는 완벽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진무원이 황철의 손을 잡아끌었다·
“날씨가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일단 짐을 내려야····”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황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무원을 따랐다·
그들은 화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굴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칠 년 동안 진무원의 집이 되어주었던 곳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진무원은 한겨울에도 불을 지펴본 적이 없었다· 추위에 견디는 것도 수련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버틴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황철을 위해 불을 지피고 차를 끓였다·
동굴 안에 온기가 퍼져 나가자 황철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진무원이 황철에게 정성껏 끓인 차를 내놨다·
“역시 공자님의 차 맛은 훌륭하군요· 난주 어디서도 이런 차 맛은 보지 못했습니다·”
“후후! 황숙이 또 저를 치켜세우시는군요·”
“치켜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공자님·”
황숙은 진심으로 진무원이 내놓은 차 맛에 감탄했다· 자신이 특별히 좋은 차를 주는 것도 아닌데 진무원은 늘 최상의 맛을 끌어냈다· 그 때문에 진무원의 차를 한번 맛보면 다른 곳에서는 차를 마시지 못할 정도였다·
“그 전과는 또 달라 보이는군요· 대단하십니다 공자님·”
“그런가요?”
황철의 말에 진무원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은 진무원을 존재하는 것 같았다· 황철이 찾아올 때마다 진무원은 변해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진무원은 황철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제 황철은 진무원의 무공을 가늠하지 않았다· 그저 깊어가는 눈빛만을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오직 오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 일이 생겨서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못 찾아올 것 같아서 미리 왔습니다·”
“위험한 일인가요?”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닐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심각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별일 아닐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자님·”
“그럼 다행이구요·”
대답을 하면서도 진무원은 그리 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황철은 그에게 유일한 혈육이나 마찬가지이다· 진무원은 진심으로 그를 아버지 대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칠 년 동안 그가 적암산에 틀어박혀 무공만 수련할 수 있던 것도 황철의 지원 덕분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수준까지 무공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디 조심하세요 황숙·”
“저는 오히려 공자님이 걱정입니다·”
“산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천하의 정세는 어떻습니까?”
산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진무원이다· 이렇게 황철을 만나야만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황철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보표로 천하를 떠돌아다니기에 그는 어떤 사람보다 세상의 정세에 해박했다·
“그날 이후 천하의 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북천사주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이제 운중천은 그들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운중천은····”
황철의 말은 오래도록 계속됐고 진무원은 묵묵히 들었다·
마침내 황철의 말이 모두 끝난 후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그럼 밀야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날 이후 그들은 다시 모습을 감췄고 그 후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운중천도 꽤 당혹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진무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설·’
어디서도 은한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 ☆ ☆
“킁킁!”
황철이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떴다· 어디선가 흘러든 고소한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여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황철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동굴 안에 있는 목조 침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 진무원과 대화를 하다가 마차에서 술항아리를 꺼낸 사실이 기억났다· 난주에서 술을 잘 담기로 유명한 객잔에서 특별히 사온 소홍주였다·
“그럼····”
아마도 진무원과 술을 마시다가 쓰러진 모양이다· 자신도 어지간한 말술인데 진무원은 그보다 더한 듯했다·
“일어났습니까?”
진무원의 목소리에 황철이 동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에는 간단히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화덕이 있었는데 그 앞에 진무원이 서 있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는 바로 화덕 위의 냄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자님 직접 요리를 하신 겁니까?”
“속이 쓰리실 것 같아서 간단한 화과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건 제가 해도 되는데····”
황철이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황철의 모습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되련만 황철은 여전히 오직 진무원을 위해 살고 있었다· 진무원에겐 황철이 오직 유일한 가족이었다·
“속이 확 풀릴 겁니다·”
진무원이 나무로 만든 탁자에 화과를 올렸다·
“냄새가 죽이는데요·”
황철이 탁자 앞에 앉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랫동안 혼자 살다 보니 진무원의 음식 솜씨는 어지간한 숙수 못지않게 훌륭했다·
진무원은 황철에게 화과 한 그릇을 퍼준 후 자신의 그릇에도 담았다· 거기에 흰 쌀밥까지 더해지자 완벽한 한 끼 식사가 되었다·
후르륵!
황철이 급히 뜨거운 화과를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속이 확 풀리는 것이 살 것 같았다·
“공자님 정말 좋은데요·”
황철이 연신 엄지를 치켜 올렸다· 그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황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릇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진무원은 그런 황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황철의 경지가 자신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내기가 막힘이 없다· 그렇다면 검기를 발출할 수 있을 터·’
이 정도면 절정의 초입이라 할 수 있었다· 재능이 있는 자들도 절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것이 부지기수이다·
아버지 진관호가 거둬 무공을 가르친 황철이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옆에서 지켜본 진무원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천재도 있고 어떤 이는 총명이 과해 간단한 원리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이면에 숨겨져 있는 백 가지의 진실을 추론해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극소수로 소위 말하는 천재의 영역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그들과 반대로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나를 소화하기도 힘들어한다·
황철은 그보다 더했다· 열 가지를 가르치면 하나를 이해하는 것도 버거워하던 사람이다·
말하자면 둔재인 셈이다· 그런 그가 이 정도까지 무공을 익혔다·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 것이요 얼마나 고련을 했을 것인가? 남들보다 느려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의 경지를 이뤘다·
황철이 연공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재능의 유무도 중요하지만 진실로 중요한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구나·’
진무원은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무인으로서의 황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 황철은 그에게 많은 깨달음과 용기를 주었다·
“황숙·”
황철이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봤다·
“건강하셔야 해요·”
“걱정 마십시오 공자님· 북천문이 다시 천하에 우뚝 설 때까지 이 황철 아프지도 쓰러지지도 않을 겁니다·”
“제가 항상 고마워하는 거 아시죠?”
“공자님·”
황철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순박한 모습에 진무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밥을 먹은 것인지 모르게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황철은 동굴에 싣고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옷가지와 철괴를 제외한 대부분이 진무원이 일용할 양식이었다·
“뭐 하러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습니까? 전에 두고 간 양식도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요·”
“사내는 항상 든든히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을 쓰지요·”
“황숙 요즘 제 위가 많이 준 거 아시잖아요· 예전처럼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아도 충분히 견딜 만합니다·”
“제발 아끼지 마시고 많이 드십시오 이 황철이 설마 공자님이 드시는 것 하나 지원하지 못할까요·”
“네 열심히 많이 먹을게요·”
황철의 잔소리가 더 지속될까 싶어서 진무원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진무원의 대답을 듣고서야 황철은 안심이 되는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 좋다!”
황철이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국물을 마셨다·
진무원도 미소를 지으며 남은 화과를 후르르 마셨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금세 식사를 마쳤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공자님 봄이 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몸 보중하십시오·”
“황숙이야말로 부디 몸조심하세요·”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황철은 마차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 진무원은 황철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마침내 황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진무원은 몸을 돌렸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진무원은 작업대 위에 놓인 검신을 바라보았다· 검신에서는 열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진무원은 조심스럽게 검신에 붙어 있는 진흙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투두둑!
진흙이 떨어질 때마다 숨겨져 있던 검신의 속살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검이 보통 은색으로 빛나는 데 반해 검은 돌로 제련한 검신은 묵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새까만 검신에 진무원의 얼굴이 비쳤다·
후웅!
진무원이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매서운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몇 번 휘둘러 본 진무원의 입가에 웃음이 번져갔다·
손잡이를 만들지 않았음에도 손에 착 감겨오는 감촉과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지난 이 년 동안의 고생을 단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직 몇 가지 작업이 더 남아 있었다· 날을 세워야 했고 손잡이와 검집도 만들어야 했다·
슥슥!
진무원은 미리 준비한 숫돌에 날을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숫돌만 줄어들 뿐 검날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끝까지 속을 썩이는구나·”
진무원은 어이가 없어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오냐 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
진무원은 숫돌에 내공을 주입해서 다시 날을 세우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슥슥!
적막한 산골에 검날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무원은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검날을 세우는 데 열중했다·
작업은 더뎠다· 숫돌에 내력을 집중시켰음에도 검날의 변화는 그야말로 미비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참는 인내심으로 따지자면 천하의 그 누구도 진무원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진무원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 또한 싸움이었다·
검과 그의 싸움·
진무원은 모든 것을 잊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것도 잊고 생각하는 것도 잊었다· 그저 눈을 감고 묵묵히 검날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디기만 하던 검신에 새파랗게 벼려진 날이 서기 시작했다· 한겨울 햇빛이 검날에 부딪쳐 사방으로 편린을 흩뿌렸다·
진무원은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다· 그는 오직 날을 세우고 있는 검에만 모든 것을 집중했다·
어느 순간이었다·
투웅!
마치 손끝의 신경이 연결된 듯 검이 자신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검첨 검신 검날 검병이 마치 팔과 하나로 연결된 것 같았다· 그의 그림자 내공이 먹물처럼 검에 스며들었다·
우웅!
그 순간 검이 울었다· 아니 검이 속삭였다·
진무원은 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내게 이름을····
검에서 무언가 깨어났다·
그 기묘한 울림에 진무원이 눈을 떴다· 그러자 여인의 나신처럼 매끈한 선을 이루고 있는 검신이 보였다· 은은한 묵광으로 일렁이는 검신의 모습이 마치 눈 속에 핀 한 떨기 꽃 같았다·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설화 널 설화(雪花)라고 부르겠다·”
우웅!
검명이 터져 나왔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설화는 검명(劍鳴)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진무원이 설화를 잡았다· 그러자 손바닥에 기이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의 것인 듯한 익숙한 느낌에 진무원은 전율했다·
진무원이 설화를 휘둘렀다·
후웅!
한 가닥 검풍이 일어나며 쌓여 있던 눈이 허공으로 부드럽게 떠올랐다· 진무원이 만영결을 운용하자 설화의 검디검은 검신에 묵광이 일렁였다·
내력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설화가 도도히 검광을 토해냈다· 그리고 허공에 눈으로 만든 꽃이 피어났다·
“한설·”
설화 은한설을 추억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 ☆ ☆
온통 암석으로 이뤄진 적암산에도 나무는 자랐다· 바위를 가르고 뿌리를 내려 메마른 양분을 빨아들이기에 어른 허리만큼도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생명력과 단단함만큼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진무원은 그 나무에 철심목이란 이름을 붙이고 검병을 만들었다· 검병에 소가죽을 칭칭 동여매서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손을 보호하기 위한 호수(護手)에 설화라는 글자를 음각으로 새겼다·
검집도 만들어야 했다· 진무원은 얇은 철편으로 검집 내부를 만들고 외부를 철심목으로 감쌌다· 완성된 검집에는 소가죽을 덧입혀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게 했다·
철컥!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던 것처럼 설화와 검집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진무원은 이제는 애검이 된 설화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우웅!
설화가 나직이 검명을 터뜨렸다·
교태를 부리는 여인처럼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처럼· 진무원은 한참이나 넋을 잃고 설화를 바라보았다·
검신에서 일렁이는 묵광은 넋을 송두리째 빼앗을 정도로 요요롭고 검날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눈부시다 못해 요사스러웠다· 일단 한번 시선을 주면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 정도이다·
그제야 진무원은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것은 신검(神劍)도 마검(魔劍)도 아니다·
“요검(妖劍)이구나·”
간혹 강호에는 세상을 울리는 신병이기들이 출현하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병이기도 설화처럼 요기(妖氣)를 흘리진 못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심혼이 흔들리고 가슴이 울컥거렸다· 설화는 그야말로 가공할 요기를 흘리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검의 요기에 먹히고 말 것이다·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항상 스스로를 경계할 수 있을 테니·’
진무원은 설화를 들고 검벽 앞에 섰다· 지난 칠 년 동안 그의 앞을 막아서던 거대한 벽이다· 거울처럼 반질하던 벽면에는 무수한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진무원이 남긴 흔적이다· 그의 칠 년이 검벽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진무원이 만영결을 운용했다·
단전의 이면에 숨어 있던 그림자 내공이 기지개를 켰다· 소리도 없이 물을 흡수하는 솜처럼 그림자 내공은 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내공의 유동도 기운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변한 것은 오직 진무원의 눈빛뿐이었다·
평소보다 더욱 검게 변한 눈동자는 마치 어둠의 장막을 친 것 같았다·
전신으로 퍼져 나간 그림자 내공은 설화에게도 스며들었다· 설화는 그림자 내공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림자 내공을 탐내듯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림자 내공을 받아들일수록 설화의 검신은 더욱 진한 검은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모습이 마치 어둠을 응집한 것 같다·
진무원은 설화를 부드럽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웅!
미풍으로 시작한 진무원의 움직임은 곧 태풍으로 변했다·
멸천마영검(滅天魔影劍)·
그 불가해의 검공이 진무원의 손에서 펼쳐졌다·
쉬아악! 쐐애액!
그의 검이 유성이 되었고 거대한 벽이 되기도 했다·
하늘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가 싶더니 편린이 폭우처럼 대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한줄기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어둠이 찾아왔다·
“후우!”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는 순간 환상처럼 찾아온 어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릉!
진무원이 설화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설화가 들어가기 싫다는 듯 나직하게 울음을 터뜨렸지만 막상 검집에 들어가자 조용해졌다·
하지만 검벽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마치 진무원의 몸놀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무원은 미련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쿠워어!
그 순간 상처로 뒤덮여 있던 검벽의 겉면이 절규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아니 가루로 변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인의 비명 같은 굉음이 적암산에 울려 퍼진 후 드러난 것은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면이었다· 진무원이 처음 검을 휘두르기 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휘잉!
바람이 불어오자 바닥에 쌓여 있던 미세하게 부서진 가루가 흩날려 사라져 갔다·
유달리 춥던 겨울이 물러가고 있었다·
석 달 후 봄에 돌아오겠다던 황철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진무원은 황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 다시 뜨거운 여름이 돌아와도 황철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숙·’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유난히도 뜨겁던 여름 어느 날 진무원은 적암산을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