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6장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2)
“허윽! 허윽!”
엽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 있는 동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전호대의 마지막 생존자인 것이다·
회혼랑은 아직도 네 명이나 남아 있었다·
그들은 다른 회혼랑보다 월등히 강하면서 잔인했다· 그들은 동료들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엽월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살기 어린 눈동자를 보며 엽월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어디에도 살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힘껏 깨물어 전의를 북돋았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강호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각오했기 때문이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홀로 남을 안사람 서유란 정도였다·
‘뭐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삶에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무인으로 쌓은 가치관과 자존심은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게 만들었다·
“이야아아!”
엽월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평상시 단 한 번도 완벽하게 펼쳐본 적이 없는 설천분분(雪天分奮)의 초식이 노도처럼 이어져 나왔다·
츄화학!
엽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장 완벽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 정도라면 한두 명 정도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혼랑의 몸놀림은 엽월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몸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간발의 차이로 엽월의 공세를 피해냈다· 이어 그들의 공세가 엽월을 향해 들이닥쳤다·
푸푹!
엽월의 어깨 옆구리 다리에 회혼랑의 검이 꽂혔다·
“크윽!”
엽월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극통과 함께 엽월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 순간 한줄기 환청이 들려왔다·
“엽월!”
푸푸푸푹!
쓰러진 엽월의 몸으로 회혼랑들이 거침없이 검을 쑤셔 넣었다· 엽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순간 누군가 엽월의 몸을 안아 들었다·
‘누구?’
“넌 아직 죽으면 안 된다· 네가 죽으면 나는 이 분노를 누구한테 푼단 말이냐?”
“소··· 무상?”
엽월이 자신을 안은 사람을 알아보았다· 소무상이 수많은 심정이 교차하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엽월!”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하던 이다· 그토록 청운검법에 매달린 것도 그에게 복수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이젠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되었다·
“흐··· 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엽월의 입술이 몇 번 들썩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소무상이 그의 시신을 바닥에 눕히고 일어났다·
가슴에서 화가 들끓었다·
그가 다가오는 회혼랑을 바라보았다· 엽월의 피로도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식지 않았는지 소무상을 향해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래 모두 죽었구나· 나만 남겨두고·”
미우나 고우나 지난 삼 년 동안 정이 든 외당 삼조였다· 그들 대부분이 회혼랑에 목숨을 잃은 것을 확인했다·
소무상이 엽월의 검을 집어 들었다·
“으드득!”
그의 입술 사이로 이빨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네 명을 상대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왜 없겠냐만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은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내가 죽어도 너희만큼은 모조리 길동무로 삼으리라·”
소무상과 회혼랑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 ☆ ☆
쿠당탕!
은한설이 바닥을 굴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이젠 시꺼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울컥!”
그녀가 검은 피를 게워냈다· 그래도 속은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망가질 것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이 피를 흘려서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은한설은 혀를 깨물었다· 그러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태무강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은한설의 목 줄기를 움켜잡았다·
“컥!”
그가 버둥거리는 은한설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일렁이는 그녀의 눈을 보며 태무강이 웃었다·
“흐흐! 끝이다 꼬맹이·”
그가 주먹을 들었다· 이대로 내려치기만 하면 은한설의 목숨은 끝이었다· 은한설이 온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태무강의 손아귀는 강철 집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은한설이 눈을 감았다·
‘안녕 무원·’
쉬각!
그 순간 종잇장이 베어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은한설의 몸이 자유를 찾았다·
“허억허억!”
태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은한설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유입되자 까맣게 변했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무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태무강의 오른쪽 팔에 긴 자상을 입은 채 주춤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일으켜 세웠다·
“누구····”
“미안· 내가 늦었지?”
은한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진무원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만영탑 공방 벽에 걸려 있는 그 검이었다·
“검을 가지러 갔던 거야?”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한설이 태무강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팔에 난 자상을 바라보고 있다·
진무원이 검을 익힌다고 만경각에 드나들 때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기본공이나 익힌다고 생각했지 태무강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로 대단하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무원?”
“말했잖아· 너를 두고 혼자 가지는 않는다고·”
“으응·”
또다시 눈물이 나려 했다·
그녀가 마음을 준 이 남자는 절대 배신하거나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진무원이 검을 들어 태무강을 겨눴다·
이대로 두면 은한설이 죽는다고 생각하자 그의 발은 절로 만영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처음으로 완성한 검이다· 심원의에 의해 그의 피를 마신 검이 울고 있었다·
우웅!
진무원의 감정이 검에 투영된 것 같았다·
태무강의 광기 어린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너 괴상한 힘을 쓰는구나·”
불사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태무강이다· 이 정도 자상쯤은 순식간에 회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진무원에게 당한 상처는 회복이 더뎠다·
진무원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통할 수 있을까? 아니 통하기는 할까?’
지난 수년 동안의 노력을 세상에 첫선 보이는 자리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아니 이 정도면 최악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그만큼 태무강은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진무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떠한 순간에도 그는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생의 끈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진무원의 의지였다· 그리고 그의 의지는 그가 든 검에 고스란히 담겼다·
태무강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진무원의 기세가 이상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담수천이나 심원의 심지어는 은한설에게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기세이다· 그런데도 그들보다 신경이 거슬리고 묘하게 불편했다·
진무원을 부수고 짓이겨 버려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그래야 이 거지 같은 기분에서 해방될 것 같았다·
“놈!”
태무강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혼원염마기가 회오리쳤다· 십여 장 높이까지 도달한 태무강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진무원과 은한설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우우!
태무강의 몸이 도달하기도 전에 무서운 압력이 진무원과 은한설을 짓눌렀다· 진무원은 감히 정면으로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검을 사선으로 휘두르며 압력을 해소했다·
휘류류!
순간 그의 검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태무강의 강렬한 기운을 빗겨 흘려보냈다· 강(强)을 유(柔)로 흘려보낸 것이다·
쾅!
태무강이 진무원과 은한설을 빗겨 나가 바로 옆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가 착지한 자리에 일 장 깊이의 구덩이가 파이며 먼지가 비산했다·
진무원은 은한설과 함께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태무강이 바닥을 박차고 다시 진무원과 은한설을 향해 달려왔다·
콰콰콰!
태무강의 엄청난 기세에 공기가 찢겨져 나가고 바닥의 돌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진무원은 오금이 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가 은한설의 손을 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 상대의 거센 공격을 일단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콰앙!
순간 이제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폭음이 터지며 돌멩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태무강의 주먹이 작렬한 것이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진무원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온통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홀로 무공을 익혔다· 만경각에 있는 무공서로 기본을 익히고 만영벽에 새겨진 무공을 익히면서 자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강호에 나가 어지간한 젊은 무인들에 뒤지지 않을 거란 자부심도 가졌다· 이제까지 힘을 길러온 인내심과 침착함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태무강과 맞상대하니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처음 겪는 실전이다· 머리는 상황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괴리가 발생했다· 몸이 처음 겪는 가공할 살기에 굳은 것이다· 그 때문에 진무원은 꼴사나운 모습을 몇 번이나 보여야 했다·
그래도 진무원은 한 가지만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바로 정면으로 태무강의 공격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 상대의 타점을 흘려 최대한 충격을 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영결을 끌어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놈이!”
태무강의 눈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진무원의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것이다· 상대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 진무원의 움직임은 번번이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쉽게 따라잡을 것 같았는데 번번이 예상치 못한 움직임으로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무언가 상성이 안 맞는다고 할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무원·’
진무원의 손에 이끌려 태무강의 공세를 피하면서 은한설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절대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태무강의 공격을 진무원은 옆으로 흘리거나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동작은 점점 세련되어지고 있었다·
두근!
왠지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에 진무원은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태무강의 솥뚜껑 같은 손이 간발의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피한 자리에 태무강의 공격이 직격했다·
찌르르!
혼란으로 헝클어졌던 머리가 이상하게 맑아지면서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태무강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의 강렬한 시선에 피부가 짜르르 울려왔다· 그의 호흡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들려왔다·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파동이 피부를 자극했다·
흔히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에겐 통찰력(洞察力)이 생긴다고 한다· 무수히 생사를 오간 경험이 축적되고 사고의 폭이 확대되면서 상대의 눈빛이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다음 동작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무원이 느끼는 그런 통찰력과는 또 달랐다·
이상할 정도로 감각이 곤두서 있다· 평상시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해져 있는 듯했다· 마치 전신의 감각이 모조리 활성화되어 주변의 미세한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는 듯했다·
마치 전방위에 걸쳐 감각의 영역이 확장되어 있는 듯했다·
‘전방위 감각(全方位 感覺)·’
그것이 만영결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목숨이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발현된 것인지는 진무원도 알지 못했다·
아니 상관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전방위 감각이라 명명한 능력 덕분에 그 후로도 진무원은 태무강의 공격을 몇 차례나 더 피할 수 있었다·
태무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단 한 수면 죽일 수 있는데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은한설 정도의 무인이라면 이해가 갔을 것이다·
결국 화가 폭발한 태무강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놈!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짓이겨 버리리라! 혼원멸천하(混元滅天下)!”
쿠오오!
태무강의 몸에서 발산된 혼원기가 천지를 뒤덮었다·
혼원염마기가 비바람이 되어 진무원을 향해 몰려왔다· 한줄기 한줄기 찬란히 빛나는 강기의 비바람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죽음의 기운이 진무원을 덮쳐왔다· 하지만 진무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방위 감각을 이용하면 자신은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한설이 위험했다· 태무강이 교활하게도 진무원이 아닌 은한설을 노리고 공격한 것이다·
태무강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 계집의 목숨과 네 목숨을 바꿔라·’
진무원이 이를 악물었다·
‘단 한 번이다· 내게 허락된 기회는·’
아무리 만영결에 입문했어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내력에는 명백히 한계가 존재했다· 그 때문에 진무원은 이제까지 내공을 극도로 아껴왔다· 이 한 번을 위해·
진무원의 시선이 문득 태무강의 뒤쪽으로 보이는 만영벽을 향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이 쌓이고 쌓여 벽이 되었다·
그 벽 위에 피로 새겨진 이름 하나·
“멸천마영검(滅天魔影劍)·”
진무원은 처음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늘(天)과 마(魔)를 멸하는 그림자의 검·
선조들이 남긴 심득에 그의 피와 땀이 더해져 탄생한 미완성의 절학·
“단천해(斷天海)·”
그가 그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