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2장 거친 바람 아래 몸을 숙이다 (3)
“공자님!”
남자의 이름은 황철 북천문의 삼류무사 출신이다· 무공에 대한 재능은 떨어지지만 그 충성심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모두가 진무원을 떠났지만 황철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보표 일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진무원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잔뜩 사가지고 찾아왔다· 진무원은 그런 황철을 숙부로 부르며 따랐다·
“공자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새로 왔다는 무사들은 어떤가요? 그들도 설마 공자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내 걱정하지 말아요 황숙· 그들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으니까· 그보다 황숙은 어떻게 지냈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황철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천애고아인 황철이다·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으며 천하를 떠돌던 그를 받아준 이가 바로 진무원의 아버지인 진관호였다· 진관호 덕분에 무공도 익힐 수 있었고 그 덕에 사람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원래부터 무공에 재능이 없던 황철이다· 오죽했으면 북천문의 기본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까? 하지만 진관호는 그런 황철에게 손수 무공을 전수해 자신의 한 몸 지킬 정도의 무인으로 만들어줬다·
물론 다른 절정의 무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은 기적이라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황철의 재능은 형편없었다·
황철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모든 이가 다 북천문을 떠났지만 그는 아직도 진무원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 식전이시지요?”
황철이 품에 안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갓 지은 따뜻한 밥과 나물 등의 반찬이 든 반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이곳에 들어오기 전 직접 만들어온 것일 게다·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공자님·”
“황숙 이러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저 혼자 챙겨 먹을 수 있어요·”
“아닙니다요 공자님·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어서 드세요·”
진무원은 황철의 정성을 거절할 수가 없어 수저를 들었다· 황철에게도 같이 들자고 권했지만 그는 진무원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면서 한사코 겸상할 것을 거부했다·
목이 콱 막혀왔지만 진무원은 꾸역꾸역 음식을 삼켰다· 그것이 황철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큭!”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상의 입술이 뒤틀렸다· 몰락한 가문의 후예와 종복이 하는 꼴을 몰래 지켜보자니 자신까지 처연해지는 까닭이다·
진무원과 황철이 청승을 떠는 모습에 장패산의 호언장담이 왠지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식사 후 황철은 반합을 싸들고 북천문을 나섰고 진무원은 만경각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진무원이 나간 후 소무상은 그가 읽던 책을 모조리 읽어보았다· 하지만 쓸 만한 책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곳이 북천문이란 말인가? 밀야의 침공을 당당히 막아내던·”
그가 아는 북천문은 젊은이들에게 꿈의 대지였다·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북천문은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소무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그리고 실망은 커다란 상실감으로 상실감은 다시 증오가 되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소무상의 눈에 더는 안타까움의 빛 따윈 보이지 않았다·
☆ ☆ ☆
진무원이 문을 열고 자신의 거처로 들어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진무원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분명 그가 나갈 때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물건들의 위치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또 방문자가 있던 모양이군·”
진무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년 전에도 그랬다· 서 조장과 조원들은 진무원이 외출한 틈을 타서 그의 거처를 몇 번이고 샅샅이 뒤졌다· 결국 십여 번이 넘게 들락거리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은 의심을 풀었다·
저들은 진무원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진무원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진무원의 관찰력과 눈썰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주 미세한 변화라도 그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가려나?”
진무원이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의 탁자에는 도덕경을 비롯한 책자 몇 권이 나뒹굴고 있었다· 책자에도 저들이 펼쳐 본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쯧!”
진무원이 혀를 차며 흩어져 있는 책들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진무원은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거처는 전각의 삼 층에 있었다· 그 덕분에 창문을 열면 북천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때 이곳도 불야성을 이루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수많은 무인이 술잔을 기울이며 무공을 이야기하거나 밤늦도록 스스로를 단련했고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진무원은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석상 같아서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거의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창문을 닫고 침상 위에 누웠다· 잠시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스슥!
그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 후에 바닥이 쓸리는 듯한 소리가 미약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깊이 잠들었던 진무원이 눈을 번쩍 떴다·
“갔나?”
진무원은 알고 있었다· 지난 며칠 전부터 누군가 자신을 은밀히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하루 열두 시진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집요하리만큼 따라붙던 시선도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무원의 하루 일과는 거의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한 후 황철과 만나 식사를 한다· 그 후 만경각에 가서 책을 읽고 다시 주위를 둘러본 후 거처로 돌아온다·
마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그의 삶은 무척이나 지루한 것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구도자와 비슷했다· 그런 그의 삶을 하루 종일 따라붙는다는 것은 감시자에게도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소무상도 똑같은 이유로 차츰 진무원에게서 눈길을 돌리는 일이 많아졌다· 이전처럼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무원이 일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때만 감시를 하게 된 것이다·
진무원은 다시 한 번 감시의 눈길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침상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도덕경(道德經)을 집어 들었다· 혼자 있을 때면 그는 늘 도덕경을 읽었다·
도상무위 이무불위(道常無爲而無不爲)-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또한 하지 않는 일이 없다·
진무원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도덕경의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이기도 했다·
진무원은 정좌를 한 채 도덕경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밤이 다 가도록 진무원은 도덕경을 읽고 또 읽었다·
북방의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 ☆
진무원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북천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친 바람이 제일 먼저 그를 맞이했다· 삭풍은 그의 전신을 사납게 어루만지며 옷자락을 날리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 따위가 아니다· 전신을 금방이라도 난도질할 것같이 난폭하고 사나운 폭풍이었다· 북방의 바람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북방에서 살아온 사람들조차 이렇게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될 수 있으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무원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좋았다· 이렇게 한참이나 바람을 쐬고 있으면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북천문이 몰락하면서 그의 시간은 정지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살아갈 의미가 없는 시간은 빠르게 느껴지지도 소중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북방에 몰아치는 거친 삭풍은 그의 정신이 침잠되어 가는 것을 막아주고 거친 자극을 주었다· 그로 인해 진무원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진무원은 걸음을 옮겼다· 북천문 밖 사방 이십여 리 안에는 민가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북천문을 중심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북천문이 몰락할 때 그들 역시 몰락한 것이다·
사람이 떠나 마을은 쓰러졌고 곧 거칠게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정지된 시간의 흔적이었고 몰락한 북천문의 현 모습이었다· 그리고 현재 진무원의 모습이기도 했다· 진무원은 몰락한 북천문의 옛 영화를 통해 현재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이게 나다· 현재 나의 모습이다· 처연하구나 진무원아·”
진무원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북천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이었다· 대부분이 평지인 북방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곳이고 그래서 가장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진무원은 북천문보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남쪽 사람들이 중원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 곳· 아직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진무원은 커다란 나무 아래 서서 한참이나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끝없는 평원을 눈에 담았다·
휘이잉!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어찌나 바람이 거센지 진무원의 몸이 휘청거렸다· 진무원은 그런 자신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어렸고· 여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키도 클 것이고 지금보다 힘도 붙을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후우!”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의 약함을 절감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올라왔다· 벌써부터 약해진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아비의 의지를 헛되게 하는 것이리라·
진무원이 그렇게 의지를 다지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스슥!
갑자기 풀잎에 옷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손이 그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흡!”
입을 틀어막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진무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진무원이 정신을 잃었다·
“빨리 옮겨!”
정신을 잃어가는 그의 귀로 사내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