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 8장 은원의 강호에서 홀로 서다 (1)
진무원이 잔뜩 굽었던 허리를 폈다· 그런 그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모용율천은 여전히 허공에 뜬 채 손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단순한 손짓에 불과했지만 진무원에겐 엄청난 압력이 가중되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은 심해에 빠진 것처럼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이 진무원을 짓누르고 있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질 것 같았고 폐가 짓눌려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얼굴과 전신에 굵은 핏줄이 돋아 나왔고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됐다·
“너는 분명 대단한 인재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너라는 존재는 필요가 없다·”
모용율천이 손바닥을 더욱 내리눌렀다·
퍽!
그 순간 진무원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진무원의 입과 가슴이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모용율천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릴 줄 몰랐다· 그런 진무원의 눈빛이 모용율천의 심기를 거슬렸다·
진무원의 눈빛은 그의 아비 진관호를 연상케 했다· 북벽 진관호의 눈빛은 언제나 도전적이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힐 줄 모르는 눈빛·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 마음가짐이 항상 모용율천을 부담스럽게 했는데 그의 아들까지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모용율천이 자신도 모르게 노성을 질렀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굽히지 않는단 말이냐? 도대체 네놈들은 뭐가 그리 불만인 것이냐?”
혼자 튀어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모용율천은 그런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세상의 질서를 짰고 또한 이제까지 유지해 왔다·
무적세가를 정점으로 구대문파 오대세가가 최상위에 존재하고 운중천을 두어 중원을 관리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중원을 지배하는 체계를 완성했는데 진무원이 반기를 들었다·
모용율천의 입장에서는 진무원은 기존의 질서 체계에 반항하는 반역자였다· 그를 이대로 놔두게 되면 다른 이들도 반기를 들게 될 것이다· 그런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무원을 죽여야 했다·
“나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랏 진무원·”
그가 진무원을 향해 반대편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황금빛 기류가 진무원을 향해 내리꽂혔다·
무극통천격(無極通天擊)·
하늘과 대지를 관통하는 거대한 기운이 진무원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에 진무원의 얼굴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진무원이 이를 악물며 무인검을 휘둘렀다· 순간 그의 검이 한 줄기 섬광을 내뿜었다·
멸천마영검 제오식 섬광혈(閃光血)이었다·
쉬가악!
날카로운 검광이 황금빛 기운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벽에 겨우 바늘이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진무원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진무원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멸천마영검의 마지막 초식인 무영계(無影界)가 진무원의 손에서 펼쳐졌다·
순간 세상 전체가 시커먼 그림자로 뒤덮였다·
“····”
푸른 하늘도 짙은 운무도 소리도 그리고 모용율천마저도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것 같았다·
진무원은 잠시 숨을 멈추고 정적에 잠긴 세상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의 정적이 오래가길 원했다·
쩌적!
하지만 그가 만든 정적인 세상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일점에서 시작한 균열은 점차 정적에 잠긴 세상 전체로 번져 나가더니 공간 전체가 깨져 나갔다·
쩌엉!
마치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용율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흡! 감히!”
모용율천의 한쪽 팔목이 보이지 않았다· 무영계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한쪽 팔목을 희생한 것이다·
팔목을 잃은 모용율천의 분노는 무서웠다· 이제까지 온화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일그러졌다·
자신의 육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진무원을 향해 전 공력이 담긴 일장을 날렸다·
무극섬멸천하(無極殲滅天下)·
무극구영신공 최후의 절초가 펼쳐진 것이다·
쿠콰콰콰!
가공할 기운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전진뿐·
진무원이 무인검을 꼬나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모용율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릭!
무인검이 허공을 갈랐다·
멸천마영검 제일초인 유성혼을 필두로 북천벽 단천해 폭우림 섬광혈 무영계 등 여섯 초식이 줄줄이 펼쳐졌다·
그동안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초식을 한꺼번에 펼치긴 했었지만 한 번에 여섯 초식을 펼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대한 여섯 개의 초식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순간 진무원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천지가 합일되는 듯한 전율스러운 느낌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진무원은 그대로인데 세상 모든 것이 느려졌다·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용율천에게서 쏟아져 나온 황금빛 입자와 짙은 운무 알갱이 그리고 모용율천의 표정 하나까지도·
“이야아아!”
진무원의 입에서 거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무인검을 통해 전신의 기운이 모조리 토해졌다·
콰우우우!
무극섬멸천하와 멸천마영검의 연환 육초식이 격돌했다·
처음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초식인 폭우림이 펼쳐질 때쯤 도자기에 금이 가는 듯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쩌저적!
그리고 육초식인 무영계가 갈무리될 때 뇌음이 세상에 울려 퍼졌다·
콰르릉!
섬 전체가 진동을 일으키고 광활한 호수 전체에 거친 파랑이 일었다· 섬 전체를 뒤덮고 있던 운무가 요동을 치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훅 밀려 나갔다·
두 사람의 격돌에 천벽만로진 자체가 부서지고 섬의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쿠콰콰!
섬이 사라진 자리에 호수 물이 밀려와 채웠다·
“쿨럭!”
진무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해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무인검은 손잡이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무원은 두 손으로 상체만을 겨우 지탱한 채 피를 토했다·
그토록 강대하던 내공이 바닥을 보였다·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뇌가 울려서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전신이 소 잡는 칼로 해체되는 것같이 고통스러워서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충격을 크게 받았다면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진무원은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 큰 바위에 형편없이 처박힌 모용율천의 모습이 보였다·
모용율천의 모습은 차마 꿈에서 보기 무서울 정도로 끔찍하게 난자되어 있었다·
두 다리는 무릎 어림에서 잘려 나가고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자상이 전신에 수십 개는 나 있었다· 그 때문에 시뻘건 속살과 내장 그리고 허연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크윽! 내 내가····”
모용율천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상처의 고통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신이 패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영원히 무적일 줄 알았다· 영원히 중원을 지배할 줄 알았다·
“네가 어떻게 나를····”
“쿨럭!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크허헉! 우 웃기지 마라· 나는 안 죽는다· 안 죽어· 어떻게 내가 죽는단 말인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놓고 내가 죽을 것 같으냐? 나는 절대 안 죽는다·”
모용율천이 악을 썼다· 피를 토하면서도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그는 악다구니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배자다· 세상의 영원한 지배자· 그런 내가 죽을··· 크헉!”
모용율천이 갑자기 한 됫박은 됨직한 피를 토해내더니 바닥에 고꾸라져 경련을 일으켰다·
개구리처럼 경련을 일으키던 모용율천이 잠시 후 축 늘어졌다· 그것이 모용율천의 마지막이었다·
모용율천은 숨은 끊어졌지만 눈은 감지 않았다· 죽었음에도 부릅뜬 두 눈에는 세상을 향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휴!”
그제야 진무원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모용율천은 생전 처음 상대하는 초강자였다· 그와 진무원의 무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였다·
모용율천이 직접 싸운 지가 수십 년이 넘은 데 반해 진무원은 최근까지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는 것· 즉 실전에서 승부의 감이 승패를 나눈 것이다·
진무원은 근처의 바위에 등을 기대 눈을 감았다·
그림자 내공이 지치고 상처 입은 그의 몸을 서서히 치료하기 시작했다·
☆ ☆ ☆
서문혜령은 사방이 온통 하얀 공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오감환상진(五感幻想陣)인가?”
말 그대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다섯 가지 감각을 교란시켜 허상을 보여주는 진법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닌 가짜· 감각을 교란당한 머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진짜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기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상상의 공간에 함몰될 수도 있어 더욱 위험했다·
서문혜령은 걸음을 옮겼다·
대호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바닥에 깊은 족적을 남기는 서문혜령· 그녀의 족적이 바닥에 새겨질 때마다 하얀 공간이 조금씩 깨져 나갔다·
호형포천보(虎形包天步)·
서문세가 수백 년의 역사와 지혜가 집약되어 만들어진 비전의 보법이었다· 호형포천보의 무서운 점은 걸음으로 진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걸음만으로 진법을 파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천벽만로진과 같은 거대한 진법은 파훼하기 힘들었지만 오감환상진과 같은 대일인진법(對一人陣法)을 파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오감을 교란시키던 오감환상진이 파훼되고 주위의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자 몇 걸음 앞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하진월의 모습이 보였다·
“이젠 내 차례예요·”
서문혜령이 하진월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호형포천보를 펼쳤다· 바닥에 깊은 족적이 파이고 하진월이 순식간에 진에 갇혔다·
서문혜령이 호형포천보로 펼칠 수 있는 진법의 수는 대략 서른 개가 넘었다· 서문혜령은 그중 천수관엽진(千手貫葉陣)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진법을 펼쳤다·
수많은 나무들이 하진월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가 마치 사람의 팔처럼 하진월의 몸을 잡고 늘어졌다·
이 모든 광경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처럼 느껴졌다· 하진월이 느끼는 촉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진월이 고개를 저었다·
서문혜령의 호형포천보는 언제 봐도 사기 같았다· 서문세가의 수백 년 지혜가 집약되었기에 가능한 보법이긴 했지만 그래도 상식을 넘어서는 괴공임이 분명했다·
“휴!”
하진월이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진의 원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흠! 육합(六合)을 기반으로 오행 중 목기(木氣)의 기운을 더해 만든 진법이군·”
천지사방(天地四方)이란 단어가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 이 모든 것을 합쳐 육합이라 부른다· 여기에 목기를 더하니 사방이 사문(死門)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하늘과 땅 두 곳뿐인가? 하지만 땅은 원래 목기가 가장 성한 곳이니 하늘이야말로 유일한 생문이구나·”
하진월이 허공을 향해 구슬 몇 개를 던졌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날아간 십여 개의 구슬·
잠시 후 하진월을 둘러싼 풍경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의 발과 몸을 붙잡고 있던 나무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본래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하진월이 모습을 보이자 서문혜령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펼친 진법이었건만 하진월은 너무나 쉽게 파훼했다·
겉보기엔 호형포천보로 쉽게 쉽게 진법을 펼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심력과 기력이 소모된다·
진법을 하나하나 펼칠 때마다 서문혜령의 기력은 급속히 소모됐다· 그것은 하진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세상에서 보기 드문 천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인 진법을 매개체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심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하진월이 다시 진법을 펼치고 서문혜령이 파훼했다· 마찬가지로 이번엔 서문혜령이 진법을 펼치고 하진월이 파훼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진법들이 두 사람의 손을 통해 펼쳐졌다· 그들의 기상천외한 대결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갔다·
두 사람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얼굴 또한 창백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은 벌벌 떨리고 입술이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졌다·
하지만 대결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문파의 흥망 자존심 천하의 안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걸고 대결하고 있었다·
진법의 대결에서 지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래서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결국 서문혜령은 이제까지 감춰뒀던 비장의 패를 꺼냈다·
구주만형대진(九州萬形大陣)·
팔 년 전 하진월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줬던 서문세가 비장의 절진이었다· 이로 인해 하진월은 심마에 빠져 수년이나 허송세월해야 했었다·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죠 삼뇌수사·”
그녀가 호형포천보를 펼치는 순간 세상이 온통 암흑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