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 7장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기에 싸운다 (1)
콰아아!
엄청난 기파가 섬을 휩쓸고 지나갔다·
북천문의 무인은 물론이고 무적세가와 창천문의 무인들까지 사나운 기파에 몸을 떨었을 정도였다·
“아!”
천벽만로진을 파훼하기 위해 한참 심력을 소모하던 서문혜령조차 사나운 기파에 잠시 넋이 나갔을 정도였다·
“괜찮소?”
만일 담수천이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심맥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서문혜령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아무래도 모용 가주의 기파 같구려·”
담수천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기파였다· 그가 알기로 이 섬에 들어온 자들 중 이 정도의 기파를 발산할 수 있는 자는 모용율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모용율천의 기파는 담수천이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사나우면서 거칠었다· 단지 기파를 느낀 것뿐인데 그의 전신에 올라온 소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였던가 모용율천?’
오랫동안 강호를 이면에서 지배해 왔기에 그에 걸맞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강대한 기파 속에 담긴 살의는 천하의 담수천조차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분노하게 만든 것인가?’
담수천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평상심을 잃지 않을 것 같은 냉혹한 남자가 바로 모용율천이었다· 담수천은 모용율천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담수천이 잠시 모용율천의 기파에 신경을 쓰는 사이 서문혜령은 착실하게 천벽만로진을 연구했다·
담수천은 그런 서문혜령을 조용히 바라봤다·
어차피 이 싸움은 서문혜령이 천벽만로진을 파훼해야만 결판이 났다· 그때까지는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서문혜령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제 알겠다·”
“진의 파훼법을 알아냈소?”
“그건 아니에요·”
“그럼?”
“이 진에 담긴 전언(傳言)을 파악했어요·”
“전언?”
“그래요· 이 진법은 삼뇌수사가 나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에요·”
“초대장이라니?”
서문혜령은 담수천의 의혹 어린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근처에 있던 조그만 바위를 들어 한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자욱한 운무가 꿈틀거리더니 그녀의 앞에 통로를 만들었다·
서문혜령은 망설이지 않고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워서 담수천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따랐다·
‘건방진!’
아주 옛날 서문혜령은 서문세가의 진법을 이용해 하진월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하진월이 펼친 진법에는 그녀가 당시 펼쳤던 진법의 묘리가 녹아 있었다·
운무의 통로를 지나자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황량한 공터 중앙에는 하진월이 앉아 있었다·
그는 서문혜령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시오 서문 소저· 당신이라면 나의 전언을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소·”
“당신도 대인은 되지 못하는군요· 서문세가의 진법을 녹여내다니·”
“그만큼 인상이 깊었으니까요·”
“흥! 그래서 당시의 복수를 하자고 나를 초대한 건가요?”
“당신과는 다시 한 번 승부를 내고 싶었습니다·”
“어리석군요· 이런 중대한 전쟁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하다니· 당신을 믿고 따르는 북천문의 무인들이 불쌍하군요· 전황을 파악하고 이용해야 할 군사란 자가 이렇게 복수심에 불타 날뛰다니·”
“천벽만로진의 운용에 더 이상 나는 필요 없습니다· 그동안 군사부의 책사들을 혹독히 단련시켜 놓았으니까·”
서문혜령의 도발에도 하진월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하진월의 여유로운 모습이 서문혜령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내가 당신의 뜻대로 움직일 것 같나요? 수천 저자를 죽이세요· 처참하게·”
서문혜령의 눈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녀의 말에 담수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에 하진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개입할 생각이오?”
“그녀는 나의 여자요·”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됐다·
담수천이 서서히 하진월을 향해 다가왔다· 서문혜령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하진월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가 펼친 천벽만로진 때문에 창천문의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담수천이 공력을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너무 경솔했소· 군사라면··· 한 문파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라면 더욱더 조심해야 했소·”
“난 충분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진월의 말에 담수천이 인상을 썼다·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하진월이 근처에 있던 조그만 돌을 툭 걷어찼다·
촤아아!
순식간에 하진월과 담수천 사이에 운무의 벽이 생겨났다·
“이런?”
뒤늦게 하진월의 의도를 알아차린 담수천이 급히 운무의 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운무의 벽을 통과하는 순간 풍경이 변했다·
“음!”
겨우 서너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풍경이 변했다· 하진월과 서문혜령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운무로 만든 비좁은 골목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담수천이 전방을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그러자 운무로 만든 벽에 구멍이 뻥 뚫렸다· 원래라면 이쪽 방향에 서문혜령과 하진월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안쪽 어디서도 서문혜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간 자체가 뒤틀려 버린 느낌이었다·
“어디에 있느냐?”
담수천은 서문혜령을 찾기 위해 경공을 펼쳤다· 그의 앞에 낯선 무인들이 나타났다· 북천문의 무인들이었다·
“비켜랏!”
담수천이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크아악!”
눈부신 빛이 사라진 자리엔 주검만이 남았다· 담수천이 주검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졸지에 둘만 남게 되자 서문혜령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서문혜령이 본래의 냉철함을 되찾았다·
“제법이군요· 그간 많이 발전한 것 같아요?”
“덕분이오· 서문 소저 덕분에 와신상담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내가 내린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다니· 하지만 당신은 실수했어요·”
“뭐가 말이오?”
“당신이 만든 천벽만로진이 대단한 것은 이해하지만 언제까지 무적세가와 운중천 그리고 창천문의 파상 공세를 막을 수는 없어요· 근본적인 전력의 열세는 결코 극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데?”
“서문 소저의 말처럼 천벽만로진으로는 근본적인 전력의 열세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오· 하지만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소·”
“시간?”
“그렇소!”
하진월의 대답에 서문혜령이 인상을 썼다·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안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큰 소리를 쳤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당신의 뜻대로는 결코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곳은 하진월이 만든 그들만의 전장이었다· 검과 도로 자웅을 겨루는 것이 아닌 가진 바 지식으로 싸우는·
“그럼 시작해 봅시다·”
하진월이 발아래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툭 찼다· 그러자 주위의 풍경이 또다시 변했다· 수많은 도(刀)와 검(劍)이 거꾸로 꽂혀 있는 들판으로·
“흥! 겨우 환영진 따위로 나를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서문혜령이 코웃음을 치며 품에서 구슬 몇 개를 꺼내 진의 중심이 되는 나무 주위에 배치했다· 그러자 하진월이 펼친 진법이 해제되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번엔 내 차례예요· 아마 만만치 않을 거예요·”
서문혜령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보보마다 운무가 피어올랐다· 보법만으로 진법을 펼칠 수 있다는 서문세가 비전의 호형포천보가 펼쳐진 것이다·
이번엔 하진월이 그녀가 낸 문제를 풀 차례였다·
☆ ☆ ☆
“헉헉!”
소무상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검을 대지에 꽂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소무상의 주위에는 시신 수십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소무상의 허리와 어깨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오대수호장과 싸웠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세 명을 상대해 둘을 쓰러뜨렸다· 그 대가로 소무상이 얻은 상처는 적잖았다· 하지만 그는 상처를 채 치유하기도 전에 다시 전장에 나서야 했다·
아프다고 편히 앉아 치료하거나 쉴 수 없었다· 그가 쉬는 동안에도 북천문의 제자들은 죽어나가고 있었으니까·
“겨우 이 정도로 주저앉을 줄 아는가?”
소무상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 내상이 회복되었으니 다시 적을 찾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대단하군! 그런 상처를 입고도 그 정도의 무위라니·”
적이 찾아왔다·
소무상을 보면서 감탄사를 터뜨리는 자는 이제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장년인이었다· 청수한 학사처럼 생긴 장년인의 전신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당신은?”
“조군명 무적세가의 십대무객 중 한 명이라네·”
“으음!”
소무상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점입가경이군· 오대수호장에 이어 십대무객이라니· 대체 무적세가에는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숨어 있는 걸까?’
조군명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전에 상대한 오대수호장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만큼 소무상도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소무상은 검을 꼬나 잡은 손에 힘을 주고 허리를 폈다· 소무상을 보며 조군명이 혀를 찼다·
“쯧!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을 텐데· 그럼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까·”
“이제까지 많은 자들이 그런 말을 했지만 그들 중 멀쩡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자는 없소·”
“기개가 대단하군· 하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너희 북천문이 제아무리 발악을 하더라도 결국은 멸문을 피할 수는 없다· 북천문은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생명체는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말했잖은가? 대세라고·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근본적인 전력의 차는 극복할 수 없다· 설령 네가 나를 이긴다고 할지라도 북천문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다·”
조군명이 소무상을 비웃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곳곳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북천문 무인들의 것이었다·
소무상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의 빛이 떠오른 그 순간 갑자기 진 밖에서 변고가 일어났다·
“무적세가를 쓰러뜨려라·”
“운중천의 버러지들을 무찌르자·”
갑자기 엄청난 함성이 백마호에 울려 퍼졌다· 그로 인해 섬 전체를 뒤덮고 있는 운무가 크게 출렁였다·
“무슨?”
소무상은 물론이고 조군명의 안색이 싹 변했다·
미리 준비한 배를 타고 엄청난 수의 무인들이 섬에 상륙하고 있었다· 북천문은 물론이고 무적세가나 운중천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병력이었다·
“놈들을 쓰러뜨리고 북천문을 구하자!”
새롭게 나타난 병력의 선두엔 육십 대 초반의 노인이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고전월· 그가 옛 북천사주 중 한 곳인 철혈성의 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철혈성은 이곳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산동성 교남 앞바다의 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 성주였던 제혁심이 진무원의 손에 죽은 후 그 자리를 고전월이 꿰찼다·
중원의 끝과 끝에 있었기에 왕래는 할 수 없었지만 고전월은 항상 하진월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철혈성을 정비해 언제든지 북천문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았다·
그는 무적세가와 운중천이 북천문을 침공한다는 정보를 받자마자 무인들을 이끌고 교남을 떠나 이곳으로 달려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딱 보름이었다·
쉬는 것도 말 위에서 했고 잠도 말을 달리면서 잤다· 그렇게 해서 딱 보름이란 시간을 맞췄고 오늘 도착했다·
“모두 쓸어버려라·”
고전월이 선두에서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럴 수가!”
섬 안쪽에서는 북천문의 무인들이 가로막고 있고 섬 외곽에서는 철혈성의 무인들이 미친개처럼 달려들었다· 졸지에 협공을 당하게 된 적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반대로 소무상을 비롯한 북천문의 무인들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소무상이 검을 꼬나 잡으며 웃었다· 반대로 조군명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