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 6장 일진일퇴(一進一退), 전진하기 위해 물러선다 (3)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다· 쿨럭!”
곽문정의 물음에 답하던 황철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검붉은 선혈이 그가 입은 내상이 얼마나 극심한지 말해줬다·
마음 같아서는 황철에게 속명단을 복용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모용율천·
그 인간 같지 않은 존재가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유유자적 걷는 그 모습이 마치 산책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곽문정과 황철에겐 그 모습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곽문정은 천벽만로진을 이용해서 모용율천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곽문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천벽만로진이기에 충분히 도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쩌어엉!
모용율천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천벽만로진에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렸다· 그 사이로 모용율천이 걸음을 옮겼다·
곽문정이 이리 뛰고 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어떻게든 모용율천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면서 걸어오는 모용율천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곽문정의 눈에 절망의 빛이 감돌았다·
‘끝인가?’
그는 모용율천에게서 절망의 끝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북천문이 제아무리 무적세가와 운중천을 궁지에 몰아넣고 몰락하게 만들어도 모용율천이란 존재만 있으면 언제든 부활하리란 것을·
“대주님을 구하라·”
그 순간 앞쪽에서 일단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어떻게 그들의 위기를 알았는지 모르지만 황철이 이끌던 적하대(赤霞隊)가 나타난 것이다·
“대주 저희가 막는 동안 어서 피하십시오·”
곽문정은 그들에게 피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황철과 곽문정을 지나쳐 모용율천을 막아섰다·
모용율천을 막아선 적하대의 얼굴에는 비장미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반대로 모용율천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날파리들이 꼬이는구나·”
선두에 서 있던 적하대 삼십여 명이 일제히 모용율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모용율천의 전신에 반투명한 구(球)가 형성되었다·
무극탄강기(無極彈罡氣)·
모용율천이 익힌 무극구영신공(無極九靈神功)을 바탕으로 펼치는 반탄강기였다·
따다다다당!
무극탄강기 위로 수십 개의 모기가 소낙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무극탄강기가 크게 출령이더니 모용율천을 향해 날아오던 무기들이 일제히 튕겨 나갔다·
퍼버벅!
“크악!”
“아악!”
모용율천을 공격했던 무인들이 자신이 휘두른 무기에 당해 쓰러졌다· 그야말로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반진력이었다·
“무슨?”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뒤쪽에 있던 무인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모용율천을 공격했다·
“흥!”
모용율천이 코웃음을 치며 양손을 활짝 펼쳤다· 순간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무극탄강기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산산조각 난 강기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
질식할 것 같은 적막감이 찾아왔다·
모용율천의 방원 이십 장 안에 살아남은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검하대의 무인들은 인간 같지 않은 모용율천의 무위에 놀라 감히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모용율천은 절망과 공포의 절대자였다·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모용율천은 더 이상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에겐 손쓸 가치도 없다는 듯이 오직 황철과 곽문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으으!”
누군가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바지는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 마신(魔神)인가?”
그들은 모용율천에게서 지옥을 보았다· 그가 만든 지옥불에 자신들의 영혼이 모조리 타버린 듯했다·
“크윽!”
적하대가 죽어나간 모습에 황철이 피눈물을 흘렸다·
몇 걸음 안 걸은 것 같았는데 모용율천은 어느새 곽문정과 황철 바로 뒤쪽까지 다가왔다· 숨을 내뱉으면 느껴지는 짧은 거리였다·
“이제 그만 죽어라·”
모용율천이 곽문정과 황철에게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막대한 기가 모여들었다·
무극무형지(無極無形指)·
모용율천의 지력이 곽문정과 황철을 향해 쏘아졌다· 이대로라면 두 사람의 등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곽문정에겐 무극무형지를 피할 능력이 없었다·
쉬익!
그때 곽문정의 등 뒤로 무언가 날아와 무극무형지에 대신 부딪쳤다·
퍼어엉!
순간 무극무형지를 막은 물체가 터져 나갔다·
무형무형지에 박살 나 바닥을 나뒹구는 물체는 분명 사람의 시체였다· 시신을 바라보는 모용율천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해··· 경?”
무극무형지에 박살 나 상반신만 남은 시신의 주인은 분명 무당파의 해경 진인이었다·
창천문의 뒤를 이어 가장 먼저 섬에 오른 해경 진인이 왜 자신의 공격을 막아선 것인지 모용율천은 알지 못했다·
저벅!
나직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문··· 주님·”
“형!
황철과 곽문정이 나타난 인영을 보고 반색을 했다·
모용율천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제야 모용율천은 영문을 알 수 있었다·
해경 진인을 던진 이는 진무원이었다· 아마도 진즉에 진무원에게 죽었을 것이다·
모용율천은 금방 평소의 안색을 회복했다·
“드디어 만났군· 진무원·”
그가 진무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꽤 오랜만에 지인을 보는 것처럼 정겨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꽤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시 모용율천과 조우하면 분노에 침식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정신이 맑았다·
마치 모두 잠든 세상에 홀로 깨어 있는 듯한 아찔한 고독감과 청명함· 그 이질적인 감정들이 진무원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무려 십삼 년이었다·
모용율천과 대등한 눈높이에 서기까지 걸린 시간이·
하지만 진무원은 그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성장했으니까·
우웅!
손에 든 무인검이 나직이 검명을 흘렸다· 그에 모용율천이 미소를 지었다·
“검을 새로 만들었나? 딱히 필요하진 않을 텐데·”
“상관은 없지만 허전하더군요·”
“역시 그런가?”
모용율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무기가 없어도 강하니 굳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문득 모용율천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해경 진인의 시신으로 향했다· 자신의 손속에 처참하게 짓이겨졌지만 그전에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쯧! 그래도 호기롭게 나서기에 조금은 쓸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모용율천이 혀를 차며 진무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해경 진인을 던진 이는 진무원이었다· 그 말은 곧 진무원이 해경 진인을 죽였다는 뜻이었다·
“무당파의 도사들과 조우했던가?”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성 남부에서 모용진을 죽인 후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자는 시간 쉬는 시간을 죽이고 피로는 간간이 운공으로 풀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달려왔다·
그가 백마호에 도착한 것은 지금부터 반 시진 전 막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무인들이 섬에 뛰어들었을 때였다·
진무원이 뒤늦게 섬에 들어와서 본 광경은 해경 진인을 비롯해 무당파의 도사들이 북천문의 무인들을 도륙하는 모습이었다·
해경 진인과 무당파의 무인들은 도사라는 본분을 잊은 듯 광분해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검에 쓰러지는 북천문의 제자들 모습이 진무원을 분노케 했다·
진무원은 단숨에 해경 진인을 베었다· 어차피 적으로 만난 이상 손속에 사정을 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모용율천은 해경 진인의 죽음을 비웃었다·
“쯧! 쓸모가 별로 없군·”
“항상 그렇게 사람을 나누는 모양입니다·”
“뭐가 말인가?”
“쓸모가 있는 자와 없는 자· 두 가지 부류로·”
“당연한 것 아닌가? 어차피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네· 그럼 지배자가 지배당하는 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쓸모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는 것이지· 그렇게 기본적으로 분류를 하고 효용 가치에 따라 분산 배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배자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네·”
모용율천의 음성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강호를 이면에서 지배해 온 절대자의 말이었기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모용율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단면만 보고 쓸모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눈다는 겁니까?”
“자네도 내 나이까지 살게 되면 절로 구별하는 방법을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어야 자네도 비로소 진정한 지배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게야·”
“그런 지배자는 되고 싶지 않군요·”
“하긴 그럴 기회도 없겠군· 이곳이 오늘 자네의 무덤이 될 테니까·”
모용율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 엄청난 살기가 진무원과 곽문정을 향해 밀려왔다·
“크윽!”
가공할 살기에 곽문정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는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구나· 어떻게 살기만으로 이렇게?’
곽문정과 황철은 최대한 내공을 끌어 올려 심맥을 보호했다·
문득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진무원은 정면에서 모용율천의 살기를 맞닥뜨리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진무원을 믿었지만 과연 인간 같지 않은 모용율천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때 진무원의 담담한 목소리가 곽문정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너는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거라 문정아·”
“하지만 형····”
“나는 괜찮다·”
진무원이 곽문정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묘한 안도감에 곽문정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그는 잠시나마 진무원을 못 믿은 자신을 원망했다·
‘형은 이길 거야· 아무리 상대가 무적세가의 가주라고 할지라도 형은 반드시 이길 거야·’
곽문정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형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래!”
곽문정은 진무원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후 섬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모용율천은 어쩐 일인지 곽문정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이젠 그는 더 이상 모용율천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모용율천의 신경은 온통 진무원을 향해 쏠려 있었다·
십삼 년 전 어리기만 했던 꼬마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 그와 대등한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진무원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이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갑자기 자네 아비가 생각나는군·”
“····”
“아마 십삼 년 전이었지· 자네 아비가 죽은 게·”
순간 진무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에 모용율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그와 같은 대단한 인재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뜰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그 점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었다네·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말게나· 자네의 아비는 그래도 고통 없이 가지 않았는가?”
모용율천은 진무원의 평정심을 깨기 위해 아픈 과거사도 서슴지 않고 끄집어냈다· 그의 음성이 비수가 되어 진무원의 심장을 후벼 팠다·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가 하는 말이었다· 그 가증스러운 미소에 절로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진무원은 웃었다·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올랐지만 웃으며 말했다·
“모용진도····”
“너?”
순간 무언가를 느낀 듯 모용율천의 표정이 철갑처럼 굳었다·
“고통 없이 갔습니다· 그러니 모용 대협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진무원!”
모용율천의 노성이 백마호에 울려 퍼졌다·
후우웅!
그의 살기 어린 노성에 백마호의 수면이 파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