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 5장 옥석을 고를 수는 없지만, 한자리에 모을 수는 있다 (3)
사천성 전체가 전장으로 변했다·
북쪽에서는 창천문이 밀고 내려왔고 동쪽에서는 운중천과 무적세가가 밀고 들어왔다· 그들에 비해 북천문의 전력은 확실히 열세였다· 더군다나 청성파와 아미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기에 전력의 열세는 더욱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북천문은 끈질겼다· 무엇보다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할 줄 알았고 북천문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도 대단했다·
그들은 마치 미친개처럼 끝까지 창천문과 운중천 등을 물고 늘어졌다· 그 때문에 창천문과 운중천 등의 전진이 늦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사혈림에서 소무상과 능군휘가 심무외와 삼대천사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비록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심무외가 큰 상처를 입고 삼대천사의 둘이 죽었다· 운중천과 무적세가로서는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이었다· 그 대가로 능군휘와 소무상도 큰 상처를 입었지만 북천문으로서는 소기의 성과를 얻은 셈이었다·
그 여파로 운중천과 무적세가가 이동하는 속도가 크게 늦어졌다·
북쪽에서 남하하던 창천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도광과 비황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덕분에 그들은 며칠이란 시간을 헛되이 소모해야 했다·
하루 이틀···열흘 열하루 열이틀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마침내 담수천이 이끄는 창천문이 백마호에 도착했다·
담수천은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호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호수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중원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다고 자부하는 담수천조차 처음 보는 그림 같은 풍경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면양이 아닌 백마호라니? 귀신에 홀린 것 같군·”
“저들에게 당했군요· 설마 황마재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할 줄은 몰랐어요· 사천성의 지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아니오· 누구도 사천성의 지리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소· 하물며 우리는 사천성에 처음 오는 것 아니오? 신중하게 대비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오·”
담수천이 자책하는 서문혜령을 위로했다· 하지만 서문혜령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서문혜령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이 그들이 배수진을 친 곳인가 보군요· 호수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요·”
“그런 것 같구려· 이 역시 삼뇌수사의 작품이겠지?”
“맞아요· 아마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 역시 그의 생각일 거예요·”
“삼뇌수사··· 꽤나 골치 아픈 존재군·”
“기회가 된다면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사람이 바로 그예요·”
백마호를 바라보는 서문혜령의 눈에 섬뜩한 빛이 떠올랐다·
비황대의 유인책에 걸려 면양의 북천문이 아닌 이곳 백마호로 오게 되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전장만 변했을 뿐 이곳에 북천문의 전력이 모여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이곳에서 이기면 북천문의 숨통 또한 끊어질 거예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기다려야 해요·”
“기다린다?”
“저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릴 거예요· 그런데 굳이 우리 스스로 저들이 파놓은 함정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요· 무엇보다 우리에겐 휴식할 시간이 필요해요·”
“하기는····”
담수천이 수긍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무적세가와 운중천 역시 우리처럼 이곳으로 올 거예요· 이곳은 삼뇌수사가 마련한 최후의 전장이니까·”
“음!”
담수천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백마호를 바라봤다·
겉보기에 백마호는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담수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진법이에요·”
“진법?”
“설마 호수 전체를 진법으로 덮었단 말이오?”
“그건 아닐 거예요· 그건 저라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하물며 삼뇌수사라면 더욱더 불가능해요·”
“그럼?”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숨기듯이 곳곳에 진법을 배치했을 거예요· 이제부터 수천과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 펼친 진법의 정체와 원리를 파악하는 거예요· 그래야만 창천문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요·”
“알겠소·”
담수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그길로 호수가로 다가갔다· 호수에 접근하자 심상치 않은 기류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서문혜령이 호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당신도 지켜보고 있겠지? 삼뇌수사·’
서문혜령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그토록 견제해 온 하진월이 진무원이란 날개를 얻고 화려하게 비상을 했다· 예전에는 그녀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젠 백중지세였다
누가 더 불리하고 유리할 것도 없는 대등한 환경· 이 두뇌 싸움의 승자가 앞으로의 강호를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절대 질 수 없었다·
‘당신이 만든 이 거대한 절진이 당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삼뇌수사·’
그녀는 담수천의 보호 아래 하진월이 펼친 진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 ☆ ☆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무인들이 백마호에 도착한 것은 창천문이 도착하고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들 역시 창천문이 그랬던 것처럼 검혈대를 추적하다 보니 어느새 백마호에 도착하게 되었다·
“흠!”
모용율천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백마호를 바라봤다· 그들을 유인해 온 검혈대는 백마호 근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절진인가?”
그는 단번에 백마호에 정체모를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용현이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수 북쪽에 창천문의 군진이 있습니다·”
“흠! 먼저 도착했는가 보군·”
“저희도 그들과 합류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희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절진에 대해서도 알아낸 것이 많을 겁니다·”
“그렇게 하자·”
모용율천은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병력을 이끌고 창천문의 군진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할 무렵 담수천과 서문혜령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모용 대협·”
“이렇게 보니 반갑군 담 문주·”
포권을 취하는 담수천에게 모용율천이 미소를 보여주었다·
“심 대협은?”
“그 친구는 내상을 입어 요양을 하고 있다네· 이번 싸움에는 투입되기 힘들 게야·”
“어쩌다가?”
“풍운번주와 양패구상을 했다네·”
“음!”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네· 능군휘가 북천문에 붙은 것을 알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은 성과를 얻은 셈이니까· 그보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으니 백마호에 펼쳐진 절진에 대해서도 알아낸 것이 있겠지?”
“어느 정도는요·”
서문혜령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모용율천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힘으로 절진을 부숴야 고민했는데·”
담수천과 서문혜령 모두 모용율천의 말이 광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고수라면 제아무리 강대한 절진이라도 어느 정도는 힘으로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모용율천은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말해보게· 듣고 싶으니까·”
“제 생각에는 만상천환진(萬狀千幻陳)과 현현미로진(現玄迷路陣)을 결합해서 펼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만상천환진은 환영진의 일종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방대한 지역을 환상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요·”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만상천환진을 펼치기 위해서는 아홉 개의 탑이 필요해요· 당연히 탑이 크고 높을수록 진의 영역이 확대되고 위력 또한 커져요·”
“당연히 피해도 커지겠군?”
“물론이에요· 현현미로진 역시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럼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이쪽이겠군· 저들이 진의 주체가 되는 구조물을 확실히 세울 테니까·”
“정확하게 보셨어요·”
“그럼 언제까지 파훼법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최소 닷새 이상은 필요해요·”
“너무 늦군·”
“삼뇌수사 정도의 책사가 펼친 진법이라면 그 정도의 시간도 부족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일세· 저들의 진법은 더욱 공고히 구축될 것이고 그럴수록 진법을 파훼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질 걸세·”
“저도 알고 있어요·”
서문혜령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아침까지 파훼법을 찾게·”
“그건····”
“난 자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누가 뭐래도 자네는 삼뇌수사를 능가하는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허허!”
모용율천의 말에 서문혜령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용율천의 말은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삼뇌수사는 그녀가 유일하게 경계하는 두뇌를 가진 남자였다· 그와의 두뇌 싸움에서 진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대략적인 파훼법을 마련해 놓을게요·”
“고맙네! 역시 서문세가의 지낭다운 자신감일세· 조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자네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을 걸세·”
모용율천의 말에 서문혜령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서문화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진무원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모용율천의 시선이 담수천을 향했다·
“내일 아침 총공세를 펼칠 것이네· 그때 자네와 창천문이 선두에서 저들을 공략해 줬으면 좋겠군· 불귀곡의 무인들까지 자네를 따르니 어렵지는 않을 걸세·”
“직접 나서지 않을 생각입니까?”
“이제 나이가 드니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된다네· 서전의 영광은 자네와 같은 젊은 무인이 차지해야지 나와 같은 늙은이의 몫이 아니라네·”
모용율천의 태연한 말에 담수천이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무서운 그의 시선에도 모용율천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담수천이 이를 악물었다·
‘나와 창천문을 싸움으로 몰아놓고 무적세가의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그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모용율천에겐 세상의 모든 것이 이용물에 불과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것도 사실·’
그에겐 명성이 필요했다· 지금보다 더 거대한 명성이·
그러기 위해서는 북천문을 선두에서 정벌해야 한다· 북천문을 성공적으로 정벌하고 진무원만 쓰러뜨린다면 모용율천과 무적세가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좋습니다· 나와 창천문이 선두에 서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강호는 자네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걸세·”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아무래도 저희 창천문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니 딱 한 명만 보내주십시오·”
“····”
“모용 소협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현이를 말하는가?”
“예!”
담수천의 시선이 이제까지 모용율천의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모용현을 향했다· 그의 도발적인 시선에 담긴 의미를 모를 모용율천이 아니었다·
“으음!”
모용율천의 미간에 골이 패었다· 그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그때 모용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할아버님 그의 뜻대로 하시지요· 저 역시 뒤에서 지켜만 보는 것은 직성에 맞지 않으니까요·”
담수천을 바라보는 모용현의 눈에는 강한 투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독한 굴욕감이 숨겨져 있었다·
무적세가의 대공자로 태어나 탄탄대로를 달려온 모용현이었다· 거칠 것이 없었고 막아설 것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앞을 막아선 거대한 벽 같은 별호들·
일검일제(一劍一帝)·
사람들은 북검 진무원과 창천무제 담수천을 그의 윗길에 있는 무인으로 평가했다· 모용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굴욕이었다·
‘놈! 날 무시한 걸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의 굳건한 의지에 모용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미였다·
“알겠네· 현이도 자네와 함께 선두에 서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걸세· 내 손자를 잘 부탁하겠네·”
“그는 분명 잘해낼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담수천의 눈에 어린 붉은빛이 일렁였다· 그의 눈에 어린 붉은빛은 이젠 확연히 짙어져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담수천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모용율천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혈심마령기(血心魔靈氣)·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상고의 기공이었다· 육체를 파괴하는 무공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에 심마(心魔)의 씨앗을 심는 괴공이 바로 혈심마령기였다·
혈심마령기에 당한 이는 자신도 모르게 파괴의 욕구에 시달리게 된다· 처음엔 인지를 못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의 욕구는 커져 가고 종국에는 자신마저 파괴하게 된다·
담수천과 같이 정신력이 강한 이에겐 통하지 않는 사술에 불과했지만 때마침 담수천은 아비를 잃은 분노에 정신력이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그런 담수천에게 심마의 씨앗을 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야 저렇게 당차게 나오지만 시간이 갈수록 혈심마령기에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결국엔 심마가 촉발되어 미쳐 날뛰게 될 것이다·
강호의 영웅은 타락하게 되고 무적세가는 그런 타락한 영웅을 처단하고 다시 한 번 강호의 지배자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웃어줄 수 있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은 모용율천이 가장 잘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모용율천은 미소를 지으며 담수천의 어깨를 두들겼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을 걸세· 이 늙은이가 빠져 줄 테니 자네도 푹 쉬게·”
“감사합니다·”
모용율천과 모용현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모용현은 모용율천을 따라가면서도 담수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도 담수천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백마호를 향해 있었다·
‘진무원·’
다음 날 백마호를 향한 총공세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