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5장 하늘 위에도 하늘이 존재한다 (2)
고기 맛을 맛본 맹수는 결코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피를 맛본 무인은 살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호에 수많은 무인이 존재하지만 그들 중 진짜 생사결을 겨루고 인간을 죽여 본 무인이 얼마나 될까?
운중천에 의해 현 강호의 질서가 고착화된 이후엔 더더욱 생사결을 할 일이 없어졌다· 운중천이 강력한 힘으로 통제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회혼랑은 태무강을 따라 사선을 무수히 넘나들며 수많은 이의 피를 맛봤다· 임무를 거듭할수록 그들은 살인에 능숙해졌고 솜씨 또한 정교해졌다·
단순히 무공뿐 아니라 걷고 숨 쉬고 움직이는 동작 하나까지 그들의 모든 것은 타인을 죽이기 위해 존재했다· 그렇기에 몸짓 하나 눈빛 하나까지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들은 진무원 등을 향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 모습에 심원의의 표정이 철갑을 씌운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감히!”
이제껏 단 한 번도 일신의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심원의이다· 감히 그 누구도 그를 향해 이렇듯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갑자기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목 대주는 뭐 하느라····”
심원의가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목운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쯧! 쓸모가 없군· 뭐 하는가? 놈들을 막아라!”
그가 전호대에게 회혼랑을 막을 것을 명령했다·
“예!”
몸을 추스른 전호대의 무인들이 회혼랑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심원의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불만을 표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회혼랑을 막아내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우우우!”
회혼랑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막아라!”
전호대의 무인들과 뒤섞이며 난전이 펼쳐졌다·
검광이 번쩍이고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선혈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북천문에 혈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 잔혹한 모습에 심수아가 몸을 떨었다·
사사천주의 금지옥엽으로 귀하게만 자란 심수아이다· 그녀가 어디서 이런 잔혹한 광경을 보았을까? 눈앞에서 누군가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가 튀기는 모습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서문혜령의 안색 역시 창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심수아와 달리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밀야가 수십 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천하 정세가 요동칠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이 도출되었다· 현 천하의 정세와 유력자들 그리고 수십 가지의 변수까지 더해지며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전뇌호천공(全腦護天功)·
두뇌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서문세가 비전의 심공이다· 전뇌호천공을 익히게 되면 지력이 극한으로 발달하고 무엇보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익히는 것이 무척이나 까다로워서 귀제갈 서문화 말고는 익힌 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문혜령은 어려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전뇌호천공을 익혔다· 아직 칠성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을 월등히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문득 서문혜령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그녀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진무원이 태연했기 때문이다· 회혼랑과 전호대의 싸움에 피가 튀고 시신이 나뒹굴고 있음에도 진무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서문혜령의 시선이 은한설을 향했다·
우연인지 은한설도 그 순간 서문혜령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은한설·’
서문혜령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은한설을 향해 두 명의 회혼랑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가 진무원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순간 서문혜령은 똑똑히 보았다· 은한설의 눈동자가 은백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설마?’
그녀의 뇌리에 오래전 사람들에게 잊힌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세상에 수많은 무공이 존재하지만 저렇듯 인간의 눈동자가 은백색으로 물드는 무공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한때 재앙이라 불리던 존재 오직 그녀의 무공만이 저런 현상이 일어났다·
‘백··· 야마녀(白夜魔女)·’
서문혜령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태무강과 담수천의 싸움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었다·
쾅!
담수천의 일격에 태무강의 몸이 저만치 밀려갔다· 그가 밀린 자리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타격은 태무강이 받았는데 선혈은 담수천이 흘렸다· 내장이 진탕되면서 그의 입가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태무강이 몸에 두른 반탄강기가 문제였다·
자신이 받은 충격을 배가시켜 되돌려 주는 반탄강기의 위력에 담수천도 속수무책이었다·
‘일반적인 무공으로는 저자의 반탄강기를 뚫을 수 없다·’
담수천이 힐긋 진무원과 심원의를 바라봤다·
심원의의 신경은 온통 회혼랑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진무원은 달랐다· 그는 태무강과 담수천의 싸움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이 왠지 그것밖에 안 되냐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좋아 보여주지· 이 담수천의 진정한 모습을·’
담수천이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우웅!
순간 대기가 공명을 일으키더니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크윽!”
담수천을 향해 달려들던 태무강이 갑작스러운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담수천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쿠와앙!
“크윽!”
태무강의 가슴에 담수천의 주먹이 작렬했다· 태무강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훌훌 뒤로 날려갔다· 이제까지 그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던 반탄강기가 위태롭게 출렁였다·
바닥을 나뒹구는 태무강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반탄강기를 뚫고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반탄강기는 단순한 호신강기의 발전형이 아니었다· 혼강이라는 그만의 독문 내공의 집약체였다·
그의 반탄강기를 뚫고 충격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무공이 범상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게 무슨 무공이냐?”
“성광류·”
담수천의 대답에 태무강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담수천도 굳이 성광류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성광류(聖光流)는 완성형의 무공이 아니었다·
아직도 보완이 필요한 발전형의 무공이었다·
백오십 년 전 강호에는 승부에 미친 미치광이 무인이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강자들을 찾아 생사결을 치렀다·
그는 평생 삼백여 회의 크고 작은 비무를 치렀는데 그중 이백오십 회의 싸움에선 처절하게 패했고 오십 회 정도만 승리했다· 그 와중에 생사가 오갈 정도로 중상을 입은 것이 무려 삼십 회가 넘었다·
강호의 그 누구도 그를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긴 것보다 진 것이 월등히 많았고 그가 이긴 싸움도 크게 인상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삼백여 회의 생사결을 치르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승리 대부분이 마지막 오십여 회의 비무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어떤 험악한 싸움에서도 살아남았고 싸울 때마다 발전을 거듭했다· 그렇게 삼백여 회의 비무를 끝냈을 때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무공의 개념을 잡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사마(邪魔)와 상극인 무공 그 어떤 무공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무공·
남자는 그토록 원하던 무공에 성광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광류는 일인전승으로 전해졌고 전승자들은 평생을 성광류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담수천은 성광류의 제육대 전승자였다·
그가 이어받은 성광류는 아직 불완전했다· 그가 백인비무행을 치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광류의 문제점을 파악해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팟!
담수천이 대지를 박찼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성광류는 극강의 위력을 자랑한다· 일권 일권에 파천의 힘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만큼 내공의 소모가 엄청나다·
쾅!
담수천의 주먹에 직격당한 태무강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려갔다·
담수천의 입가를 따라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강대한 위력을 자랑하지만 반대로 시전자는 그 반동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감내해야 한다· 상대를 파괴하는 만큼 자신 역시 어느 정도 충격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콰앙!
다시 한 번 태무강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담벼락과 충돌 직전 태무강의 몸이 균형을 잡더니 바닥을 박찼다· 순간 혼탁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냐?’
담수천이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심안이 열리면서 미간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혹자는 성광류를 삼안류(三眼流)라 부르기도 했다· 심안이 열리면서 미간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이 꼭 또 하나의 눈이 뜨고 있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심안이 열리면서 보이지 않던 태무강의 모습이 포착됐다·
담수천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태무강의 모습이 보였다· 태무강의 몸 주위에서는 예의 혼탁한 강기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콰우우우!
혼마회선추(混魔回旋錐)·
태무강이 펼치는 초식의 이름이다· 천근추에 회선강의 묘리가 더해져 그야말로 극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수법이었다·
“큭!”
담수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해야 맞다· 하지만 담수천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 성광류의 맥을 이은 유일한 무인이라는 자부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담수천이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미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더욱 강력해졌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면서 다가오는 강기 한줄기 한줄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피하지 않으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담수천은 돌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본능은 어서 피하라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강력한 이성으로 억눌렀다·
‘아직 아직이다·’
마치 그림을 선명하게 그리는 것처럼 잠시 후 일어날 일들이 머릿속에 연속으로 떠올랐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그의 머리는 벌써 미래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 또한 그가 열어젖힌 심안의 이능이었다·
담수천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바로 지금·”
태무강의 혼마회선추가 내리꽂히기 직전 담수천이 움직였다·
그의 두 주먹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