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 4장 타인을 짓밟은 자, 언제든 짓밟힐 수도 있음이다 (1)
곳곳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모닥불 위에 걸린 솥에서는 정체 모를 음식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는 수많은 무인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운중천과 무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사천성으로 들어오는 내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건량으로만 겨우 허기를 때웠던 그들이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자 그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맴돌았다· 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들과 달리 연무월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모닥불 위에 걸린 음식과 솥은 화전민 촌에서 약탈해 온 것들이었다·
화전민 마을을 발견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모용진과 수하들은 화전민에게서 따스한 음식을 얻어먹길 원했다·
화전민들은 겁에 질린 채 음식을 내줬다· 비록 무지한 그들이었지만 칼을 든 무인들이 얼마나 흉악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인들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길 바라면서 음식을 내줬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몇몇 무인과 마을 사람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도에 넘치는 요구를 하는 무인들에게 마을 사람들 중 몇 명이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무인들이 우발적으로 그들을 죽이고 말았다·
강호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북천문을 멸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었다· 빈약한 논리지만 그래도 명분이 없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죄 없는 화전민들을 죽인 것은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그들의 논리와 명분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세상은 무적세가와 운중천을 지탄할 것이 분명했다·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세상에 외면을 받는 상황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모용진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 화전민들을 모조리 죽여 입을 막는 것· 그렇게 평범했던 화전민촌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화전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식량을 가져왔다· 지금 무인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무인에게 지켜야 할 바를 지키지 않고 약탈을 하면 도적이나 다름없다· 과연 이들에게 북천문을 정벌할 자격이 있는가?’
연무월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 뻔했다· 단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을 뿐·
연무월은 이번 정벌에 회의를 느꼈다· 스스로가 정당할 수가 없는데 누가 누구를 벌한단 말인가?
“휴!”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다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부턴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지금 계절이라면 풀벌레 소리가 수풀 속에서 가득 울려 퍼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무인들은 그런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솥에 든 음식을 퍼먹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주군·”
연무월이 모용진에게 다가갔다· 모용진이 신경질이 가득한 눈빛으로 연무월을 바라봤다·
“왜 그러는가?”
대번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지금 모용진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마치 진흙탕 속에서 뒹군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비록 성정이 오만해 세상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내려다보지만 그래도 무공을 모르는 화전민들을 학살한 것은 그에게도 큰 심적 부담을 안겼다·
연무월도 평상시라면 모용진이 기분 좋지 않을 때는 될수록 심기를 건드리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뭐가?”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게 뭐가 어때서?”
모용진의 목소리가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풀벌레들은 위협을 느낄 때는 울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주위에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놈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또 누가 위협한단 말인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있어·”
“주군!”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기분이 더러우니까 그 입 다물고 있으라구·”
모용진이 결국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그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연무월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모용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절망의 빛이 가득했다·
‘틀렸구나· 그는 더 이상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는구나·’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뒤돌아섰다·
그가 향한 곳은 근천의 수풀이었다· 모용진이 말을 듣지 않으니 자신이라도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다·
연무월은 한 걸음 한 걸음 수풀로 향했다· 그 누구도 그런 연무월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솥에 든 음식뿐이었다·
십여 걸음이나 들어갔을까?
연무월은 수풀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연무월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전신을 떨었다·
수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한가운데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무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심해처럼 깊은 눈빛으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를 확인하는 순간 연무월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결국 그는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 것 같았었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스릉!
연무월이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진무원이 그를 향해 말없이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연무월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순간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살짝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아무 죄 없는 화전민촌을 몰살시킨 이들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무 죄책감 없이 음식을 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분노케 했다·
저벅!
그의 발자국 소리가 마치 망치처럼 연무월의 심장을 때렸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에 연무월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자신의 주군과 무적세가가 백번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비켜줄 수는 없었다·
무적세가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의 한 목숨 보존하고자 무적세가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검병을 힘주어 잡더니 온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대연삼검(大然三劍)의 마지막 초식인 천라무한(天羅無限)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것이다·
쏴아아!
가공할 경력이 검을 통해 빠져나가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까지 수천 수만 번도 더 펼쳤던 절초였다· 그만큼 손에 익었으며 눈감고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대성했다·
절실한 마음 탓인지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완벽하게 천라무한을 펼쳤다·
칼바람과 가공할 경력이 진무원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까지도 진무원은 움직일 줄 몰랐다· 연무월은 그 모습에서 한 줄기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하지만 그의 희망은 진무원이 움직이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진무원의 손에서 무언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갑자기 이마가 화끈해지며 세상 모든 것이 까맣게 보였다·
연무월은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모용진의 안위였다·
털썩!
연무월의 시신이 수풀 밖으로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제야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무인들이 변고가 일어난 것을 깨달았다·
“뭐 뭐야?”
“습격이다·”
그들이 급히 수저와 그릇을 버리고 무기를 들었다· 그 순간 천주대가 들이닥쳤다·
“이 짐승 같은 놈들· 모조리 죽인다·”
“이야앗!”
천주대 무인들의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비록 외딴곳에서 살아가는 화전민들에 불과했지만 그들 역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천주대 무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검과 검이 격돌하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제까지 음식이 들어 있던 솥이 바닥에 나뒹굴고 모닥불이 발에 짓밟히며 불씨를 흩날렸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용진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분노를 발산했다·
“웬 놈들이냐? 감히 무적세가의 무인들을 습격하다니·”
“역시 당신이었군요·”
그 순간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모용진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홱 돌아갔다·
모용진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네놈은 진무원?”
날이 서지 않은 검을 든 채 서서히 다가오는 남자는 분명 진무원이었다·
“꼭 그래야 했습니까?”
“무슨 말이냐?”
“화전민 마을을 그렇게 몰살시켜야 했습니까?”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그들도 사람입니다·”
“사람만도 못한 것들이지· 내가 왜 버러지의 삶에 신경을 써야 하나?”
“그들은 살기 위해 척박한 산에 밭을 일궜습니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선택한 삶이 버러지라고 불릴 이유는 없습니다·”
“큭! 헛소리 따윈 개에게나 하고 싸울 거면 어서 덤벼라· 이번 기회에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모용진이 검을 뽑아 들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의 얼굴에 반성의 빛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진무원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화도 통하는 사람하고 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과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어랏!”
먼저 움직인 이는 모용진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그는 예전에 북천문에서 진무원에게 망신당했던 일을 아직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는 언제고 진무원을 만나면 천참만륙할 거라 다짐했었다·
쉬아악!
무적세가의 비전 검공인 단혼절광검(斷魂絶光劍)을 펼쳤다·
혼을 베고 빛을 잘라낸다는 이름처럼 단혼절광검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이 장에 가까운 검강이 그의 검을 통해 발현됐다· 팔의 길이까지 합하면 방원 삼 장이 모용진의 영역 아래 놓인 셈이다·
방원 삼 장 안에 놓인 모든 것이 베어져 나갔다· 거대한 바위는 물론이고 아름드리나무도 성둥 잘려 나갔다· 하지만 가공할 검강으로도 진무원을 상하게 하지는 못했다·
캉캉!
검강을 머금은 검이 진무원의 무인검에 막혀 튕겨 나갔다·
‘무슨?’
모용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도 자신을 상대로 말이다·
쉬쉭!
분광혈류(分光血流)에 이어 양광멸암(陽光滅暗)의 초식이 연거푸 펼쳐졌다· 두 초식 모두 단혼절광검의 절초로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별반 힘들이지 않고 두 초식을 받아넘겼다·
여전히 깊은 눈빛에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마치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자가 대지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에 모용진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두렵다는 생각이 더 컸다· 제아무리 오만하고 타인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모용진이었지만 상대의 무위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이자의 무위가 이 정도였던가?’
그제야 조부 모용율천이 왜 그렇게 진무원에게 신경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진무원은 그가 어떤 초식을 펼치든 철저히 분쇄하며 접근했다· 그 모습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으아아! 죽어랏!”
모용진이 마구 검을 휘둘렀다·
절박함에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려 검에 집중했다· 그에 검강이 더욱 선명해지고 길어졌다· 그만큼 위력도 강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검강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무수한 허점이 보였다·
검강의 위력 자체는 대단하지만 문제는 초식에 수많은 파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진무원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단번에 꿰뚫어 봤다·
“당신은 당신보다 강한 사람과 싸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군요·”
“무슨 개소리냐?”
“당신의 검공엔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짓누르기 위한 습관이 배어 있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자나 대등한 자와 싸우기 위한 치열함이나 고민이 보이지 않습니다·”
“헛소리 하지 마라· 나는 강하다· 무적세가의 이공자란 말이다· 너 따위가 평가할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모용진이 있는 내공을 모조리 끌어내 단혼절광검의 최후 초식을 펼쳤다·
모용진의 검강이 갑자기 응축되더니 둥그런 환(丸)이 되었다· 검강이 응축된 검환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용진이 검환을 진무원에게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진무원이 대지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어?”
모용진이 눈을 크게 치떴다· 진무원의 모습이 갑자기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환상처럼 진무원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푹!
진무원이 무인검을 모용진의 목에 가볍게 찔러 넣었다·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이 너무 쉽게 모용진의 목을 파고들었다·
모용진이 검환을 날리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그르륵!”
그의 목에서 피가 섞인 가래가 끓어올랐다·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진무원 그런 모용진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검을 빼냈다·
쿵!
모용진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것이 무적세가의 이공자인 모용진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