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 2장 폭풍이 불어오면 갈대는 알아서 고개를 숙인다 (3)
담수천은 약간은 충혈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감숙성 무도(武都)였다· 얼마 전 무적세가의 척후대와 북천문의 은류가 치열하게 싸운 곳이었다·
무적세가에서 파견한 척후대가 길을 뚫어줬기에 그와 창천문의 무인들은 별반 힘을 들이지 않고 무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무적세가에서 파견한 척후대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담수천은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적세가에서도 필요에 의해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천·”
서문혜령이 그윽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하지만 담수천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남쪽 바로 북천문이 있는 곳이었다·
약간은 붉은 기를 띠고 있는 그의 눈동자 속에는 무시무시한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담수천이 이렇게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기에 서문혜령도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평소의 수천답지 않아·’
담수천과 십수 년을 함께한 서문혜령이었다· 그의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지금 담수천은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큰 전쟁을 앞두면 누구나 필요 이상으로 흥분할 수 있기에 아직까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문혜령의 정신 상태도 담수천과 다를 것이 거의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진무원 그자를 죽일 수 있다· 갈가리 찢어 머리는 늑대에게 던져 주고 사지는 돼지의 밥으로 던져 주리라·’
그녀는 진무원과 조우하게 될 순간을 기대했다· 그의 죽음을 자신의 손으로 집행하길 고대했다· 그녀는 그 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혜령”
이제까지 전방만 바라보던 담수천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수천·”
“미안하오·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당신이 온 줄도 몰랐군·”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당신의 상념을 방해한 것 같아서·”
“아니오·”
담수천이 양손을 벌려 서문혜령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그의 따스한 온기에 서문혜령이 눈을 감았다·
그가 사랑하는 남자는 언제나 너른 품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담수천의 품에서 안정을 찾은 서문혜령이 다시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담수천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천성이 멀지 않다 보니 잠시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소·”
“수천·”
“은원을 떠나서 진무원은 나의 진정한 적수라 할 만하오· 그와 진정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소·”
“반드시 그를 죽여줘요·”
“그럴 거요·”
“처참하게··· 내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 죽여줘요·”
“당신 뜻대로 될 것이오· 그는 나에게도 살부지수(殺父之讐)니까·”
담수천이 서문혜령을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그런 그의 눈에 어린 붉은빛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서문혜령은 그의 품에 안겨 있어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담수천이 서문혜령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욱 꽉 줬다·
☆ ☆ ☆
밖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엉덩이에서는 연신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돌부리에 걸렸는지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그래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인상 한번 쓰지 않았다·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모용율천과 모용현이었다·
“담수천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님?”
“믿을 수 있다·”
“그는 할아버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믿는단 말씀이십니까?”
모용현의 의혹어린 말에도 모용율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겉모습만 보면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그랬다·
모용율천의 외모는 늘 똑 같았다· 모용현이 어렸을 때도 다 큰 지금에도 모용율천의 외모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직 그 혼자만 시간에서 빗겨나가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
인외의 길을 걷는 자가 바로 그의 조부였다· 그 때문에 모용율천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경외와 두려움의 빛이 가득했다·
모용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용율천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너는 아직도 본 가의 저력을 모르고 있구나·”
“아닙니다· 제가 어찌 본 가의 저력을 모르겠습니까?”
“모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란다·”
“예?”
의아한 표정을 짓는 모용현에게 모용율천은 뜻 모를 미소만 지어 보였다· 궁금증이 증폭됐지만 모용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조부는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현아!”
“예! 할아버님·”
“본 가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많은 이들이 본 가를 노릴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본 가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본 가는 엄청난 힘을 비축해 두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진무원 그 아이는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니까· 자칫 잘못하면 놈에게 숨통을 뜯길 수가 있다·”
순간 모용현의 눈에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무적세가 최고의 기재라고 칭송받는 그조차 모용율천에게 들은 칭찬은 그저 잘한다는 몇 마디 말뿐이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모용율천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전의를 불태우는 모용현을 보며 모용율천이 혀를 찼다·
공작신검(孔雀神劍)이라는 엄청난 위명으로 천하를 질타하고 있었지만 모용율천의 눈에는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해 보였다·
‘쯧! 애비만 있었어도 이리 조급하지는 않았을 것을·’
모용현의 아비 모용진명은 주화입마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당시 모용진명은 무공을 익히는 데 중대한 고비에 들어서 있었다· 모두가 그의 성취를 낙관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역대 무적세가의 가주들이 그래왔듯 그 역시 훌륭하게 난관을 헤치고 훌륭한 성취를 이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용진명은 뜻밖에도 주화입마에 걸려 날뛰었다·
이미 절대지경에 이른 모용진명이 날뛰자 그를 마땅히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피해는 커져만 갔고 수많은 이가 죽자 결국 모용율천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모용진명의 반항이 생각보다 격렬해서 모용율천 또한 생각보다 많은 힘을 써야 했다· 결국 모용진명은 뜻하지 않게 목숨을 잃었고 그 때문에 두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모용현 역시 큰 충격을 받았고 은연중 모용율천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운 모용율천이었다·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진무원은 분명 심검의 경지에 달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렇다· 내 두 눈으로 그 아이가 심검을 사용하는 것을 봤다·”
“그럴 수가····”
모용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심검이라면 그로서는 요원한 경지다· 자신보다 어린 진무원이 그와 같은 경지에 달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어째서입니까?”
“심검이란 경지가 분명 대단하긴 하지만 그만큼 심력의 소모가 엄청나다· 결코 함부로 남발할 수가 없지·”
“하지만····”
“그리고 굳이 네가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를 상대할 자는 따로 있으니까·”
“그게··· 담수천입니까?”
“그렇다· 그라면 진무원의 훌륭한 상대가 될 것이다·”
“그의 성광류가 그렇게 강합니까?”
모용현의 얼굴에 질시의 빛이 떠올랐다·
일검일제라 불리는 이 시대의 젊은 기린아들· 모용현의 이름은 항상 그들보다 아래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다· 지금은 그가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것은 너니까·”
“하지만····”
“우리는 수백 년을 어둠 속에 숨어 힘을 길렀다· 우리 무적세가의 가장 큰 장점은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안다는 것이지·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가면 우리는 또 역사의 전면에 숨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무적세가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결코 공명을 탐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무적세가는 음지에서 세상을 지배해 왔다· 운중천이라는 방패막이를 사용했기에 세상의 관심에서 비껴난 채 착실하게 힘을 쌓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쌓아온 힘이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졌다는 것이다· 분출하는 못하는 힘은 필연코 내부에 분열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지금이야 모용율천이 확실하게 무적세가를 장악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지만 모용현의 대에 이르면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모용율천은 그동안 수백 년 동안 내부에 쌓인 힘을 분출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 대상을 북천문으로 정했다· 북천문을 정벌하고 나면 더 이상 무적세가를 위협할 수 있는 문파나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진정한 지배자라면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었을 거라 믿는다·”
“물론입니다 할아버님·”
“인내하거라· 그러면 반드시 너의 세상이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모용현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모용율천의 말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젊기 때문이겠지·’
모용율천은 그런 모용현의 혈기조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저 나이 때는 으레 불같은 호승심과 도전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 감정들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테니까·
‘너는 너의 길을 걷거라· 네 앞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은 내가 모두 치울 테니까·’
모용율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제아무리 북천문과 창천문의 기세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반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가공할 저력을 쌓아온 무적세가 앞에서는 언제 물결에 휩쓸려 나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기반이 부실했다·
모용율천은 두 번 다시 진무원과 같은 자가 나오지 못하게 북천문의 싹을 확실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북천문을 말살하면 더 이상 무적세가에 도전할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가주님·”
밖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무슨 일인가?”
“석천(石泉)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가?”
모용율천이 문을 열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밖의 풍경이 보였다· 거대한 호수와 그 옆에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거대한 전각군들이·
모용율천과 모용현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구름처럼 운집한 수많은 무인들이 보였다· 수천 명이 넘는 엄청난 대인원이 모여 있음에도 누구 한 명 소리 내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무적세가의 정예들이었다· 먼 길을 이동했음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한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모용율천과 모용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율천의 시선은 정작 무적세가의 정예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무적세가의 정예들과 동떨어져 무리 지어 있는 일단의 도사들이었다·
연녹색의 도포를 입고 있는 도사들은 무당파의 제자들이 분명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모용율천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이 무당파의 도사들을 향했다· 그러자 무당파 도사들의 선두에 서 있는 노도사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무량수불! 무당파의 해경(海硬)이 무적수사 모용 대협을 뵙습니다·”
“반갑군·”
노도사의 도명은 해경· 무당파에서 장로직을 맡고 있는 지고한 신분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해검진인의 사제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무당파의 정예들을 이끌고 멀리 석천에 나타난 것이다·
“이곳까지 어인 일인가 해경?”
“북천문을 정벌한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보다시피 사실이라네·”
모용율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숨길 것도 없었고 이미 무당파를 비롯한 구대문파에도 협조 요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몇몇 문파들은 자발적으로 정예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소림과 화산파는 봉문을 이유로 거절을 하기도 했다·
“저희 무당파도 북천문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고 싶습니다·”
“무당파가? 봉문을 한 것이 아니었나?”
“대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파의 큰어르신을 북검에게 잃었습니다· 그 원한을 어찌 잊겠습니까? 큰어르신을 죽인 살천랑이 진무원으로 밝혀졌으니 저희 무당도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행사에 한 팔을 보태겠습니다·”
“고맙군!”
모용율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곳에 나온 무당파의 도사들은 몇 명 되지 않지만 한 명 한 명이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사실상 무당파의 정예들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특히 이들을 이끌고 온 해경 진인은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다· 그런 고수들의 합세는 무적세가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패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설령 버리는 패일지라도·’
모용율천의 눈에 비친 무당파는 무척 좋은 패였다·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은·
“안으로 들어가지· 할 이야기가 많아·”
“감사합니다 모용 대협·”
“무당파가 북천문을 멸하는 데 선봉에 서줬으면 좋겠군·”
“이를 말이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해경 진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