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 2장 폭풍이 불어오면 갈대는 알아서 고개를 숙인다 (1)
진무원은 바위 위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무인들이 비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그들이 발산하는 강렬한 열기와 투기가 연무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들은 북천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무인들이었다·
비록 북천문에 몸을 담은 시간만큼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기만큼은 기존의 무인들 못지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북천문에 흠뻑 빠져들었고 기존의 무인들에게 북천문의 정신을 배웠다·
운중천과 무적세가의 침공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발을 뺄 수도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이탈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무원은 그런 젊은 무인들이 고마웠고 또 안타까웠다· 무적세가와 전쟁이 벌어지면 아마 이들 중 상당수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진무원은 젊은 무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비록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그 얼굴만큼은 기억하려고 했다·
“무원!”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무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굳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한설·”
“뭐 하고 있어?”
은한설이 진무원의 곁에 앉았다·
“그냥 보고 있었어·”
“그렇구나·”
은한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무를 하는 무인들을 바라봤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싸우는 무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 진무원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 부담 갖지 마 무원· 그들의 선택과 목숨까지 모두 어깨에 짊어지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니까·”
“아니 그래야 해· 비록 그들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그 중심에는 내가 있어·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삶의 무게까지 모두 짊어져야 해· 저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어·”
“무원·”
은한설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너무나 고지식했다· 조금만 돌아가면 편하게 살 수도 있으련만 절대로 회피할 생각이 없어 묵묵히 앞으로만 나가고 있었다·
은한설은 그런 진무원의 고지식함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런 완고함이야말로 진무원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워서 회피하고 무섭다고 물러서는 것은 진무원의 방식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인내하고 조금씩이나마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진무원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이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만들어진 결과물이 북천문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은한설은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리라 결심했다·
은한설이 진무원의 두툼한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 온기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은한설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표는 나지 않지만 그녀의 뱃속에는 진무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진무원과 사이에서 잉태한 사랑의 결실이었다·
“혹시 무원이 잘못된다면 이 아이가 자기의 뒤를 이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무원이 원하는 길을 가·”
“고마워!”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은한설의 말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준다· 남자로 태어나 이보다 용기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졌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부담감은 사라지고 가슴속이 호수처럼 맑아졌다·
진무원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은한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가려고?”
“잠깐 놀고 올게·”
“놀아?”
진무원이 대답대신 젊은 무인들이 비무를 하고 있는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진무원의 등장에 젊은 무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무원이 격의 없이 대하자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무원은 그들과 웃고 떠들다가 목검을 들었다· 그러자 젊은 무인들 중 가장 용기 있는 자가 진무원에게 덤벼들었다·
진무원은 상대의 수준에 맞춰 대련을 했다· 진무원과 같은 절대고수와 비무를 하는 것은 일종의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젊은 무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진무원에게 덤벼들었다·
처음엔 한 명씩 상대했지만 차츰 수가 늘어났다· 두 명 세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더니 금세 십여 명까지 늘어났다·
싸우고 또 싸웠다·
그만큼 바닥에 널브러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상처를 입고 피가 나도 젊은 무인들은 웃었다·
“으하하!”
그들의 웃음소리가 연무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아울러 독기 어린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문주님이라고 봐줄 필요 없어·”
“조져!”
“와아아!”
그들의 거친 목소리와 함성에 은한설이 미소를 지었다·
하진월은 북천문의 조직을 재편을 단행했다·
현재 북천문에 속한 문도 수는 물경 오천 명에 육박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대인원이었다· 이전까지는 크게 뭉뚱그려 인원을 나눴다면 이제는 세밀하게 병력을 나눠 섬세하게 운용해야 했다· 하진월은 그동안 관찰해 온 바를 토대로 병력을 나눴다·
문주인 진무원의 직할대로 삼백여 명의 무인들을 배정하고 천주대(天柱隊)라고 불렀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 불리는 무인들은 북천문에서도 가장 발군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닌 이들을 진무원에게 배치해 활용도를 높이려 하는 것이다·
장로인 경무생과 능군휘에게도 각각 오백여 명의 무인들을 주고 운용하게 했다· 그들에게는 풍천대(風天隊)와 운월대(雲月隊)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검주 소무상과 무주 마도광에게도 각각 천여 명의 무인이 주어졌다· 그들은 검혈대(劍血隊)와 비황대(飛荒隊)라는 이름을 붙였다·
검혈대는 소무상처럼 검을 잘 쓰는 무인들로 이뤄져 있었고 비황대는 이름 그대로 예전 마도광이 이끌던 비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봉공인 황철에게도 오백여 명의 무인들이 주어졌다· 적하대(赤霞隊)라는 이름의 무인들 중에는 검룡표 곽문정도 있었다·
당기문과 당미려는 기존의 활독당 이백 명을 이끌었다· 나머지 천 명은 군사인 하진월이 직접 운용하기로 했다· 하진월은 필요에 따라 천 명의 인원을 다시 다섯 개의 조직으로 나눴다·
하진월은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인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방안과 각종 병법을 연구했다· 며칠씩 밤을 지세우기 일쑤였고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해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기문은 그런 하진월을 위해 보양단을 만들었다· 당문과 당기문의 비법으로 만든 보양단이 아니었다면 하진월은 진즉에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당기문과 아미파 청성파에서도 북천문에 병력을 지원했다· 세 개 문파에서 각각 오백여 명의 무인이 파견됐다· 그들은 이미 북천문과 뜻을 같이하기로 결정했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룡상단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물자가 들어왔다· 족히 일 년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물자가 창고에 쌓였다·
창고 안에 가득 쌓이는 물자를 보며 사람들은 전쟁의 기운을 느꼈다· 바야흐로 사천성 전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모든 조직을 정비하자 하진월은 은류와 흑월을 동원해 정보전을 시작했다·
은류를 이용해 운중천과 무적세가의 동향을 파악하고 사소한 정보라도 수집했다· 반대로 흑월을 이용해 운중천과 무적세가에 불리한 정보를 흘리거나 교란했다·
조국호는 은류 소속의 무인이었다· 그는 청인이 매우 신뢰하는 무인으로 그만큼 뛰어난 무공과 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하 스무 명을 데리고 은밀히 사천성을 빠져나왔다· 그의 임무는 사천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문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조국호가 우선 향한 곳은 감숙성의 무도(武都)라는 곳이었다· 감숙성에서 사천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조그만 현이었다·
무도는 공동파의 영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별다른 문파가 없었다· 아무래도 구대문파에 속하는 공동파의 영역이다 보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국호는 무도에서 하루 쉰 뒤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로 갈 예정이었다· 공동파를 제외하면 감숙성에는 별다른 위협이 될 만한 문파는 없었다· 때문에 그냥 넘어갈 만도 하건만 하진월은 결코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무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조그만 야산을 넘어야 했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수풀이 무척이나 우거진 야산은 보기보다 험했다·
조국호는 수하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야산을 넘었다·
“무도에 들어가면 모두 조심하거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이상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하들이 분분히 대답했다·
아직은 무도에 도착하기 전이라서 그들의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그런 수하들의 모습을 보며 조국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오랫동안 그와 손발을 맞춰온 경력자들이었다· 정보 계통에 종사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음울해지거나 내성적으로 변하게 마련이지만 이들에겐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더욱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얻어내는 정보만큼 북천문은 유리해질 것이다·
북천문에 들어오기 전 조국호의 가족은 꽤나 비참한 삶을 살았다· 조국호는 무인으로서는 꽤 강한 편이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무공에 미쳐 강호를 떠돌아다니느라 가족의 생계를 등한시했다· 그런 조국호를 대신해 집안을 꾸려 나간 이는 바로 그의 부인이었다·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조국호와 달리 부인은 무척이나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홀로 세 명의 자식을 억척스럽게 키웠다·
하지만 홀로 자식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험한 일도 많이 당했고 고생도 엄청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몸도 상해갔다· 자식에 대한 헌신과 집을 나간 가장을 대신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조국호가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홀로 세 아이를 건사하느라 얻은 각종 질병이 그녀의 육체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조국호는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녔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의술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국호는 절망하고 자신을 저주했다· 그때 아내를 구해준 이가 바로 하진월이었다· 하진월은 조국호의 아내를 당기문에게 보냈다·
모든 의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당기문은 보란 듯이 그녀를 고쳤다· 그 후 조국호는 하진월과 당기문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북천문에 기꺼이 투신했다·
어렵게 질병을 고친 그의 아내는 지금도 북천문에서 애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북천문은 단순히 소속된 문파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 삶을 영위하는 터전이었다·
조국호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천문에는 그들의 가족이 살아가고 있기에 그들이 느끼는 책임감은 더욱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조국호와 수하들이 한참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갑자기 미약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퓩!
“큭!”
맨 뒤쪽에서 걸어오던 수하가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런 수하의 목에는 미세한 은침이 꽂혀 있었다·
“습격이다·”
예고도 없이 이뤄진 습격이었지만 조국호와 수하들은 금세 적의 습격을 눈치챘다·
퓨퓩!
연이어 은침이 날아왔다· 다행히 이번에는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티티티팅!
은침이 무기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은침이 통하지 않자 숲 속에서 적들이 뛰어나왔다· 검은 무복을 입은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들·
그들을 보는 순간 조국호는 알 수 있었다· 적들도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일대일의 비무나 정당한 대결보다 암습을 즐겨 하고 음지의 전투가 더 익숙한 이들· 그들은 무적세가의 정예가 출전하기 전에 안전한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인 척후조였다·
그들은 조국호와 수하들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했다· 암기가 날아오고 도와 검이 허공을 갈랐다·
“큭!”
나직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외엔 그 어떤 함성이나 기합성도 없었다·
어둠 속의 전쟁·
침묵을 수반하는 그들만의 싸움 방식이었다·
‘제길!’
조국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들의 기습에 그의 수하들이 연이어 쓰러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열세였다· 상대는 자신들보다 강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한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자신의 죽음은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수하들이 죽으면 적들의 척후조가 근처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북천문에 알리지 못하게 된다·
북천문이 멸문하면 자신의 가족들 또한 죽게 된다· 그 사실만은 미치게 두려웠다·
“윤광·”
싸움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조국호가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불린 남자가 조국호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대로 북천문으로 달려가거라·”
“형님!”
“누군가는 그들의 척후가 이곳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알리거라· 우리가 시간을 벌겠다· 부탁이다·”
윤광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죽더라도 동료들과 죽고 싶었다· 하지만 조국호의 말대로 누군가는 이 사실을 북천문에 알려야 했다·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윤광이 조국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뒤돌아 달려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무적세가의 척후조 두 명이 그를 추적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조국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윤광의 경공술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것이 그를 북천문으로 보낸 가장 큰 이유였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조국호는 다시 전장에 몸을 던졌다· 피가 튀고 전신에 상처가 생겨났다· 피를 흘리고 한쪽 어깨가 잘려 나가면서도 조국호는 끝까지 싸웠다·
결국 조국호와 수하들은 이름 모를 야산에서 전멸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척후조의 삼분의 이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갔다·
“지독한!”
살아남은 척후조가 그들의 시신을 보며 치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