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 1장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기에 다른 길을 걷는다 (3)
“크윽! 네가 어떻게?”
담유성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입술과 턱은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릎 한쪽이 박살 나고 왼쪽 어깨는 탈골되어 덜렁거렸다·
무릎을 꿇은 그의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육 척 장신에 탄탄한 체구 다갈색의 피부 그리고 얼굴 한가운데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깊은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는 바로 담수천이었다·
담수천은 담유성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런 담수천의 모습이 담유성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말하라 수천·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냐? 감히 불귀곡을 짓밟다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란 말이냐?”
“사람이길 먼저 포기한 것은 형님입니다·”
“너?”
“왜 그랬습니까?”
“무얼 말이냐?”
“내 어머니··· 굳이 그렇게 죽여야 했습니까?”
담수천의 음성은 덤덤했다· 하지만 담유성은 그 안에 담긴 지독한 살기를 느꼈다·
담유성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엔 시신이 가득했다· 그 속엔 그의 동생인 담진일도 있었다· 갑자기 불귀곡에 침입한 담수천을 막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불귀곡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담수천이 갑작스럽게 들어와 담유성과 담진일 형제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담수천을 막다가 수많은 이가 죽었다·
담수천의 무력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담수천은 그들이 그토록 존경했던 불귀곡주 담적심의 무력에 육박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강해 보였다·
담유성이 이빨을 질근 깨물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형님들이 내 어미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크윽!”
“꼭 그래야 했습니까?”
“그래서 이제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온 것이냐?”
“복수··· 아닙니다· 그저 미련을 털어버리기 위해 찾아온 것뿐입니다·”
“너?”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까?”
“어떻게 그런단 말이냐?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놈을 어떻게 두고 본단 말이냐?”
“그래도 반은 당신과 같은 피를 가지고 태어난 형제였습니다·”
“큿! 웃기는 소리 하지 말거라· 나는 너를 동생으로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형제란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나야 할 뿐 아니라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 어디 그런 유대감이 있단 말이냐?”
“애초부터 당신들은 나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감을 쌓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담수천의 음성은 담담했다· 하지만 담유성은 그의 목소리 안에 내재된 찐득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그때 제거했어야 했다· 아버지 때문에 그냥 놔둔 것이 이토록 무서운 후환이 되어 돌아왔구나·’
그는 죽은 아비를 원망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담수천은 결코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담수천의 음성과 눈빛에 어린 살기가 그의 피부를 아프게 자극했다·
담유성이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자신이 열세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팟!
그가 바닥을 박차고 담수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는 예전부터 네놈이 싫었다· 그 사실은 내가 죽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콰아아!
그가 주먹을 열두 번이나 내질렀다· 열두 줄기의 권강이 담수천을 향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결국····”
권강이 몸에 격중하기 직전 담수천의 전신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권강은 봄바람 앞의 고드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담유성 또한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아!”
담유성의 입에서 한 줄기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털썩!
마침내 빛이 모두 사라졌을 때는 바닥에는 고깃덩이로 변한 담유성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담수천은 담유성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불귀곡의 무인들이 숨을 죽였다·
담수천의 무력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전대 곡주인 담적심보다도 월등히 강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말이다·
담수천이 오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무인들이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불귀곡은 강자존의 대지·
전대 곡주인 담적심이 절대적인 무력을 앞세워 지배했듯이 그들은 강자를 숭상했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담수천은 절대적인 무력을 선보였다· 그들이 담수천을 따를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담수천은 불귀곡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창천문에 이어 불귀곡까지·
엄청난 힘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다음은 당신 차례다· 진무원·”
☆ ☆ ☆
염초하가 고양이처럼 사뿐히 담장 밑에 착지했다·
“휴!”
그녀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았다·
염초하의 얼굴에는 아직도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뜬금없는 목소리에 염초하가 흠칫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녀가 뛰어넘은 담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또래의 소녀가 보였다·
‘함소령·’
상큼한 미모의 소녀는 공동파의 제자인 함소령이었다·
염초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그녀가 뛰어넘은 담장은 하진월의 거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진월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모험을 했는데 뜻밖에 함소령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만 것이다·
함소령이 팔짱을 풀고 염초하에게 다가왔다·
“역시 평범한 악공이 아니었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염초하는 일단 잡아뗐다· 하지만 함소령은 그녀의 생각보다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군사부를 넘었잖아요· 평범한 악공이 군사부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죠· 어디에서 왔나요?”
“····”
“스스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입을 열게 하는 수밖에·”
함소령의 단호한 태도에 염초하가 눈을 데구르 굴렸다·
‘하필 이런 때 아빠는 어디 간 거지?’
염초하가 군사부를 뒤지는 사이 염광설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염광설은 절대로 딸과의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염초하가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되었나요?”
“글쎄요·”
함소령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염초하는 모든 것이 글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함소령에게 제압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함 소저는 생각보다 음흉하군요· 곽 소협은 그런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당신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죠?”
“그냥 감이에요·”
“흥! 염 소저야말로 헛소리하지 말아요· 문정 오빠는 당신처럼 다른 속내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을 싫어하니까·”
“다른 속내라니요?”
“누구의 사주를 받고 군사부를 뒤진 건가요?”
“증거 있나요? 증거도 없이 모함을 하다니·”
“버텨봐야 소용없어요· 지금쯤 염 소저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을 테니까·”
순간 염초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모든 것이 어그러졌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가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공동파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과연 함 소저의 무공도 공동파의 위명에 부끄럽지 않은지 궁금하군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알려 드리죠·”
함소령이 염초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염초하가 군사부를 뒤지는 것을 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꾸만 곽문정의 주위를 맴도는 염초하가 신경에 거슬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밀히 그녀의 뒤를 추적했고 결국 군사부의 담장을 뛰어넘는 것을 보았다· 그 사실을 하진월에게 알려 염광설을 잡아가게 만들었다·
그녀는 염초하가 간자라는 사실보다 곽문정을 이용하기 위해 맴돌았단 사실에 열 받았다· 곽문정은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런 곽문정이 염초하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어·’
그 순간 염초하가 먼저 움직였다·
퉁!
가볍게 발을 튕긴다싶은 순간 염초하의 신형은 어느새 함소령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염초하의 새하얀 손가락이 함소령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함소령은 당황하지 않고 건곤지(乾坤指)를 펼쳐 그녀의 손을 튕겨냈다·
“흑!”
예상보다 강한 함소령의 반격에 염초하가 당혹스러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부 역시 범상치 않았다· 이내 균형을 잡으며 연이어 함소령을 공격했다·
만화불혈수(晩花不血手)·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마치 꽃잎처럼 날렸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실로 무서워서 결코 경시할 수 없었다·
타타타타!
두 소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연이어 부딪쳤다·
아름다운 소녀들의 격돌이었다· 눈이 부시게 화려했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도저히 어린 소녀들의 격돌이라고 볼 수 없는 흉악한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절대로 너에게만은 지지 않아·’
‘죽어도 너에게만은····’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기에 그녀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싸움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무기를 꺼내 든 이는 염초하였다· 그녀가 품속에서 새하얀 옥소를 꺼내 함소령을 공격했다·
함소령도 검을 꺼내들어 그녀와 맞서 싸웠다· 비록 나이도 어리고 무공을 익힌 햇수도 짧았지만 그녀에겐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특히 그녀는 공동파의 윗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각별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녀의 무공은 또래의 무인들보다 월등히 강했다·
쉬아악!
공동파의 절학이라 할 수 있는 복마검(伏魔劍)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따다당!
복마검과 옥소가 연신 부딪쳤다·
그렇게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지나갔고 결국 승기를 잡은 이는 바로 함소령이었다· 염초하는 초조했고 아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십 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반대로 함소령은 자신의 모든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쩌엉!
그녀가 들고 있던 옥소가 산산이 부서지며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함소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염초하의 품을 파고들어 건곤지를 펼쳤다·
퍼벅!
“꺄아악!”
순식간에 전신을 격타당한 염초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휴우!”
함소령이 숨을 고르며 쓰러진 염초하를 바라보았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염초하의 생명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염초하가 쓰러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염초하의 혈도를 제압해 압송했다·
뒤늦게 하진월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이 많았다·”
“아니에요·”
“덕분에 본 문에 침투한 간자를 잡을 수 있었다· 그 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란다·”
“헤헤!”
하진월의 칭찬에 함소령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운중천에서 파견한 간자인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구나· 더 알아봐야 자세한 사실을 알겠지만 내 짐작으로는 흑월처럼 독자적인 정보 조직에 속한 이들 같다·”
“강호에 그런 조직이 많이 있나요?”
“물론이다· 적어도 각 성에 하나씩은 있다고 봐야겠지· 그녀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지는 않는 거군요·”
“지금은 한 명이라도 아군의 도움이 필요할 때다· 굳이 죽여서 그들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지·”
“복잡하네요·”
“원래 어른들의 세계가 복잡하단다·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에휴! 전 모르겠어요·”
“그래! 넌 아직 몰라도 된다·”
하진월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 이만 문정 오빠에게 가볼게요·”
방금 전까지 염초하와 살벌하게 싸웠던 무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줍음 많은 소녀만이 남았다·
그녀는 하진월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곽문정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진월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잠시 후 인상을 굳혔다·
‘저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북천문에는 함소령 같은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 그들의 앞날도 바뀔 것이다·
북천문의 존망이 걸린 싸움뿐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도 걸린 싸움이었다·
하진월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