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 1장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기에 다른 길을 걷는다 (1)
흥망성쇠(興亡盛衰)·
흥하면 언젠가는 망하게 마련이고
성한 것은 언젠가는 쇠락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영원할 거라 믿는다·
절망의 날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
강호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렇다·
진무원의 눈빛이 묵직해졌다·
어깨를 따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피가 아니었다· 그가 어깨에 짊어진 궁문휘가 흘리는 피였다·
모용율천이 날린 지풍은 궁문휘의 가슴을 관통했다·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검붉은 허파가 그대로 내비쳤다· 대라신선이 와도 궁문휘의 목숨을 살릴 수는 없는 상처였다·
진무원은 궁문휘를 바닥에 뉘었다· 그러자 궁문휘가 힘겹게 눈을 떴다·
“당신은··· 북천문주군?”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말을 아끼는 것이 좋습니다·”
“흐흐! 나는 이미 가망이 없소·”
“하지만····”
“위로하지 않아도 되오· 내 몸 상태는 내가 더 잘 아니까·”
궁문휘의 눈이 빛났다·
죽기 전에 일시적으로 활력이 도는 회광반조의 현상이었다·
진무원은 입을 다물었다· 궁문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궁문휘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결국 무적세가와 모용율천을 무너뜨리지 못했군· 밀야의 전력을 다했는데도·”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운이 아니오· 그만큼 무적세가가 무서운 거지·”
“····”
“알고 있을 거요· 밀야가 무너진 이상 다음 차례는 북천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거요· 모용율천 그 늙은 너구리의 심계는 실로 무서우니까· 흐흐!”
웃고 있는 궁문휘의 잇몸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소야주·”
누군가 궁문휘를 부르며 달려왔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바로 가경의였다· 가경의 역시 치열한 전투를 겪은 듯 전신에 엄중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가경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미친 듯이 궁문휘의 가슴을 양손으로 짓눌렀다· 어떻게든 지혈을 시키려는 것이다·
“군··· 사·”
“말씀하지 마십시오 소야주· 피가 더 많이 흐르니까·”
“난 이미 틀렸습니다·”
“아닙니다· 소야주는 살 수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군사·”
“소야주! 크흐흑!”
가경의가 궁문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천하에서 가장 냉철한 이성을 가진 남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무원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휴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궁문휘가 힘겹게 진무원을 올려다봤다·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진무원이 고개를 숙였다·
궁문휘는 허리춤을 뒤져 겨우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 안에 내 무공이 적혀 있소·”
“이걸 왜 내게?”
“적당한 이를 찾아 전수해 주시오· 내 무공이 단절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밀야의 뜻을 잇지 않아도 되니까 단맥이 되지 않게만 해주시오· 부탁이오 진 문주·”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진무원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반드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전수해 주겠습니다·”
“고맙소! 크윽!”
갑자기 궁문휘가 피를 왈칵 토했다· 핏속에 섞인 부서진 내장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야주!”
가경의가 궁문휘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양 볼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합니다 군사· 나는 나는····”
궁문휘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고개가 모로 꺾였다· 절명한 것이다·
“소야주!”
가경의가 절규했다· 하지만 궁문휘는 두 번 다시 대답하지 못했다· 진무원은 궁문휘의 시신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소야주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가경의의 절규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야주 등유명에 이어 소야주인 궁문휘까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밀야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세운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가경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다·
“소야주 나도 가겠습니다· 나도····”
혼이 나간 가경의의 목소리에 진무원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경의가 주먹으로 자신의 천령개를 내려친 것이다·
가경의의 두개골이 박살 나며 그대로 절명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끔찍한 참극 앞에 진무원은 할 말을 잃었다· 이로써 밀야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이 있겠지만 그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휴!”
진무원의 탄식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 ☆ ☆
이날의 사건은 폭풍처럼 천하를 뒤흔들었다·
밀야의 정예가 운중천과 무적세가를 습격했지만 오히려 패퇴를 당했다· 야주인 등유명을 비롯해 수많은 정예들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소수의 몇 명만이 겨우 도주를 했을 뿐이다·
이날 무적세가가 드러낸 무력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운중천이 밀야에 의해 유린당한 데 반해 무적세가는 밀야의 수뇌부를 전멸시킴으로써 엄청난 전력을 과시했다·
사람들은 밀야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환호를 하기보다 무적세가의 가공할 저력에 공포를 느꼈다·
전 강호의 저력이 집중된 운중천으로도 막지 못했던 밀야였다· 그런 밀야를 일개 가문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주었다· 그 말은 곧 무적세가의 힘이 전 중원의 전력에 육박할 정도라는 의미였다·
일개 가문이 가진 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적세가가 중원을 지배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갔다·
모용율천과 무적세가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실체를 드러낸 무적세가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가주인 모용율천을 정점으로 삼대봉공(三大奉公)과 오대수호장(五大守護將) 그리고 십대무객(十大武客)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무위는 운중천의 십대장로에 육박하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면이 있었다·
일개 가문이 가지고 있기엔 너무나 엄청난 힘이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선 그들은 거칠 것 없이 강호의 모든 것을 장악해 나갔다·
훗날 역사가들이 강호의 겨울이라고 부르는 혹한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 모용율천과 무적세가가 있었다·
담수천은 풍운의 중심인 무적세가에 와 있었다·
그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수천·”
곁에 있던 서문혜령이 담수천을 불렀다· 하지만 담수천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전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담수천의 전면에는 반투명한 수정 관이 존재했다· 북해에서만 난다는 지극한음정(地極寒陰晶)으로만 만든 수정 관 안에는 누군가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담수천의 눈동자는 시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
시신의 주인은 바로 담적심 담수천의 아비였다· 아비의 주검 앞에 담수천은 격한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아비였다· 이젠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수정 관에 담긴 담적심의 모습은 초라했다· 생전에는 그렇게 증오스럽던 존재였는데 이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너진 아비의 모습이 담수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떻게 된 겁니까?”
“진무원 그자가 자네의 부친을 죽였네·”
옆에서 대답을 하는 이는 바로 모용율천이었다· 담수천의 고개가 모용율천을 향해 돌아갔다·
“그게 사실입니까?”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네·”
모용율천의 대답에 담수천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시신을 직접 봐야겠습니다·”
“수정 관을 여는 순간 시신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할 걸세· 지금도 지극한음정으로 만든 수정 관으로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걸세·”
“그 정도로 시신이 상했단 말입니까?”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네·”
“으득!”
담수천이 자신도 모르게 이빨을 뿌득 갈았다·
지극한음정으로 만든 수정 관은 반투명해서 담적심의 상처를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많이 훼손되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진무원 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의 전신을 잠식한 분노는 이성마저 앗아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모용율천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미안하네· 설마 진무원 그자가 밀야와 야합해서 쳐들어올 줄은 몰랐다네· 그는 불영신승을 죽인 것도 모자라 자네의 부친까지 처참하게 죽였다네·”
“크윽!”
“자네의 부친은 이미 저항할 힘을 잃어 무기력했다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자네의 부친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네· 내가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어쩔 수가 없었네·”
모용율천이 담수천의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평상시 담수천이라면 절대로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지금 그는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담수천의 어깨에 손을 올린 모용율천의 모습은 너무 자연스러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용율천의 손에 희미한 붉은 기류가 맺혔다가 담수천의 후두부를 통해 체내로 흡수되었다· 일련의 과정은 순식간에 이뤄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담수천마저도·
담수천의 눈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광기 어린 붉은빛은 그의 동공을 한차례 휘젓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용율천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가 자연스럽게 담수천의 어깨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떼었다·
담수천이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진무원에게 복수를 할 겁니다·”
“아비를 죽인 불공지대천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법이지· 무적세가가 자네의 복수를 돕겠네·”
서문혜령이 다급히 담수천을 불렀다·
“수천 일단 시신을 살펴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요·”
“수정 관을 열면 시신이 손상되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그렇게 되면 너무 늦을 거요·”
“수천····”
“미우나 고우나 내 아비요·”
담수천의 단호한 말에 서문혜령은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역시 진무원에 의해 아비를 잃었다· 진무원만 생각하면 그녀 역시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서문혜령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진무원을 제거해야 해· 그는 너무 위험해·’
그때 모용율천이 다시 담수천에게 말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는다고 하네· 진무원 그자가 너무 강하니 아직은 힘을 기르는 것이 나을 걸세·”
“나는 그가 두렵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하나 그에겐 북천문이 있네·”
“나에겐 창천문이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창천문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으니 자네 아비의 유산인 불귀곡을 장악하는 것이 어떻겠나?”
“불귀곡?”
“그렇다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자네의 배다른 형제들이 불귀곡을 장악할 걸세· 잊었는가? 그들이 자네의 어미를 어떻게 했는지?”
순간 담수천의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모용율천의 속삭임이 그의 이성을 잃게 만든 것이다·
“크윽!”
“먼저 불귀곡을 자네의 것으로 만들게· 자네가 불귀곡을 장악한 그 순간 우리는 북천문으로 출발할 것이네· 그날이 북천문의 마지막이 될 걸세·”
모용율천의 나직한 속삭임이 담수천을 유혹했다· 분노에 눈이 먼 담수천은 그의 유혹에 넘어갔다·
“당장 불귀곡으로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모용율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포악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중심에 모용율천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