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 5장 잃을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을 건다 (3)
“아미타불!”
불영신승이 야공을 올려다보았다· 별빛 한 점 없는 어두운 하늘이 그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가슴이 바윗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자비로운 세존이시여· 부디 이 불쌍한 중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너무 많은 죄악을 저질러 두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이 늙은이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불영신승은 하염없이 염주를 돌리며 부처를 찾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백!”
누군가 그를 불렀다·
불영신승이 뒤를 돌아보자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민 중년의 승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원이구나·”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승려의 법호는 설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불영신승에게는 사질이 되었지만 공적으로는 소림사의 사대금강(四大金剛)에 속하는 절정의 무승이었다·
설원은 사대금강의 우두머리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평소 성격이 무척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일단 한번 무언가를 결정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무골이었다·
불영신승을 바라보는 설원의 눈가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빛을 숨기기 위해 애써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미타불! 불쌍하신 분·’
불영신승은 소림이 낳은 최고의 기재였다· 그 덕에 소림의 무공 수준이 한 단계가 더 상승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설원 자신도 불영신승에게 가르침을 받아 큰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불영신승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불영신승 때문에 소림사가 세속의 일에 휩쓸리는 것은 탐탁지가 않았다·
운중천이 태동하기 전까지 소림은 구파의 태두로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굳이 강호의 일에 개입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소림을 공경했다·
하지만 운중천이 출범하고 불영신승이 운중천의 일에 깊숙이 개입을 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아홉 하늘의 하나라며 모두가 불영신승을 경외시했고 또한 두려워했다· 소림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강호에서 위상은 더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대신 존경을 잃어버렸다· 많은 승려들이 그런 사실을 무심코 넘어갔지만 설원처럼 생각이 깊은 승려들은 그런 현실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아미타불! 소림사는 언제나 은둔하는 거인으로 남아야 한다· 승려가 세속의 일에 너무 많은 관여를 하는 순간부터 타락할 수밖에 없다·’
불영신승도 뒤늦게 그런 사실을 깨닫고 발을 빼고자 했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많은 일에 엮여 버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늪에 빠진 것처럼 불영신승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비단 늪에 빠진 것은 불영신승만의 일이 아니었다· 소림사도 같은 운명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소림사가 불영신승 개인의 위명에 의지할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좋으나 싫으나 불영신승과 소림사는 공동 운명체였다·
문득 불영신승이 설원에게 물었다·
“설공과 백팔나한에게서 소식은 없는가?”
“아직 없습니다·”
“아미타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다른 이도 아닌 백팔나한입니다· 그들이 펼치는 백팔나한진은 무적입니다·”
“알고 있네· 하나 가슴이 답답하군·”
“사백?”
“자네의 눈에는 이런 내가 위선자로 보이겠지?”
“아닙니다·”
“괜찮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니까·”
불영신승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들의 편린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모용율천의 뜻을 못 이겨 백팔나한을 사천성에 보냈다· 그들을 보내면서 속으로 얼마나 기원했는지 모른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라고· 한 명도 남김없이 소림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백팔나한은 연락이 끊겼다·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불영신승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내가 소림에 또다시 죄를 지었구나·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성만 돋운 꼴이 되었으니·’
제대로 된 백팔나한을 키우기 위해선 최소 이십여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삼대제자 중에서 싹수가 보이는 기재를 선별해 무공을 전수하고 엄격한 과정을 통해 선별해 백팔나한진을 전수한다·
백팔나한진을 익히는 과정은 뼈를 깎는 각고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백팔나한이 탄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이십여 년이었다·
정말 기존의 백팔나한이 쓰러졌다면 새로운 백팔나한을 키우기까지 이십여 년의 공백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그가 말년에 키운 제자 설공까지 연락이 끊겼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모를 불영신승이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
‘아미타불! 이 업보를 어찌 갚을꼬? 늙어 죽지 못하는 주제에 자꾸 죄업만 쌓고 있으니·’
그가 눈을 뜨고 설원을 바라보았다·
“설원·”
“말씀하십시오·”
“혹여라도 내가 잘못되면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 사대금강과 제자들을 이끌고 소림으로 돌아가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백이 왜 잘못된단 말씀이십니까?”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일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 설원이 지키는 이상·”
“알고 있네· 그래도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것· 혹시 내가 잘못되면 절대로 복수는 생각하지 말게· 소림에도 그렇게 전해주게· 약속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약속하겠습니다·”
“고맙네! 아미타불!”
후두둑!
그 순간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영신승은 쏟아지는 비를 우두커니 서서 맞았다· 빗물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설원은 그런 불영신승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도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무원과 마도광은 비를 피해 객잔으로 들어왔다·
한 시진 전부터 시작된 비는 세상을 쓸어버릴 것처럼 무섭게 퍼붓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달리는 것은 무리였기에 두 사람은 객잔을 찾아들어 왔다·
객잔 안에는 두 사람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몸 역시 진무원과 마도광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진무원과 마도광은 삼매진화로 젖은 몸을 말릴 수도 있을 정도로 고강한 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젖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어려 보이는 점소이가 다가왔다·
“헤헤! 비가 무지하게 퍼붓네요· 주무시고 가실 건가요?”
“그럴 생각이다· 남는 방 있느냐?”
“다행히도 좋은 방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요·”
“잘됐구나· 방을 다오· 저녁도 이곳에서 먹겠다·”
“헤헤! 저희 집은 돼지고기 볶음을 잘합니다· 거기에다 직접 담근 분주까지 마시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지요·”
“알겠다· 그렇게 다오·”
“금방 가져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한바탕 혼을 쏙 빼놓은 점소이가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마도광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녀석이 장사를 할 줄 아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 덕분에 술 한잔하게 되서 좋군요·”
마도광이 히죽 웃었다· 그에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닷새 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객잔에 머무는 시간이 아까워 노숙을 하면서 시간을 줄였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 한계에 달했다· 사람이 지친 것이 아니라 말이 먼저 지친 것이다·
아무리 지구력이 좋다고 하지만 말 역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힘을 낼 수 있는 생명체였다· 비를 핑계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무원과 마도광 역시 많이 지쳐 있었다· 운공으로 간간히 피로를 푼다고 하지만 충분한 잠을 자는 것만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듯싶었다·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과 술을 내왔다· 두 사람 모두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우선 술을 마셨다·
“크으! 좋군요· 속이 짜릿한 게 제대로 담근 분주가 분명하군요·”
마도광이 소매로 입가에 흘러내린 술을 닦으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무원도 마도광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름 모를 객잔에서 담갔다고 보기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술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술을 한 잔씩 나눠 마신 후 이번에는 돼지고기 볶음을 먹었다· 예상대로 돼지고기 볶음의 맛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 닷새간의 강행군에 지쳐 있던 육체에 다시 활력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공을 이용하면 금방이라도 취기를 날려 버릴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금의 좋은 기분을 일부러 깨고 싶지 않았기에 취기를 즐겼다·
마도광은 흥에 겨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대부분이 북방에서 마적 떼로 활동할 때의 무용담이었다· 진무원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였다· 반복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지겹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큰 신뢰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그는 마도광과 진정한 신뢰를 쌓고 있었다·
진무원이 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켤 때였다· 일단의 무리가 문을 열고 객잔으로 들어왔다·
“허! 지독하게 쏟아붓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뻥 뚫린 것 같습니다· 웬 비가 이렇게 오는지·”
그들이 머리에 눌러쓰고 있던 죽립을 벗으며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그러자 허리에 차고 있는 도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진무원이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한눈에 새로 나타난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운중천의 외당 무인들·’
예전 소무상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복장이 딱 저들과 같았다· 소무상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운중천 외당 출신이었다·
무인들의 수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봐 점소이·”
“예!”
어린 점소이가 재빨리 달려왔다·
“이 어르신들이 먼 길을 와서 무척 피곤하니 어서 술과 안주를 내오거라·”
“알겠습니다요· 조금만 쉬고 계시면 금방 내오겠습니다·”
“흐흐! 서두르거라· 이 어른들이 더 배고파지면 너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니까·”
“아 알겠습니다·”
외당 무인들의 농담에 점소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방으로 급히 달려갔다·
객잔에 들어온 이들은 운중천 외당 사조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운중천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비가 퍼부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꼼짝할 수 없겠구나·”
“흐흐! 그 핑계로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조장·”
“하기는····”
조장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 경산(京山)에서 운중천까지는 수삼 일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그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하루 정도 쉬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조장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처럼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객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덩치가 큰 남자 바로 마도광이었다· 엄청난 덩치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것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누구지?’
운중천 외당 조장으로 제법 많은 무림 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정보 어디에도 저와 같은 특징을 가진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도광에게 다가갔다· 그가 마도광에게 포권을 취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난 운중천 외당 사조장 장우경이라고 하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형장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마도광·”
마도광이 고개도 들지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마도광의 태도에 장우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문파 출신인지 알 수 있겠소?”
“충분히 실례가 되는데·”
“별다른 뜻은 없소· 다만 요즘 시국이 하도 흉흉한지라 미리미리 통성명을 해두어야 불미스러운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러오·”
“그쪽에서 건들지만 않으면 불미스러운 일 따윈 없을 거야·”
순간 장우경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감히!’
그래도 운중천의 외당 조장이라고 하면 어느 누구나 예의를 차려준다· 외당 조장이라는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운중천이라는 배경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그런 운중천의 배경을 싸그리 무시하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런 마도광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겠지만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운중천으로 가는 길이오?”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운중천에 들어갈지는 모르겠군·”
“그렇다면 충고를 하겠소· 부디 그쪽에 가면 지금처럼 버릇없는 행동은 하지 마시오· 그곳에 있는 분들은 나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않으니까·”
“명심하지· 흐흐!”
한동안 마도광을 노려보던 장우경이 뒤돌아서 자리로 돌아갔다· 진무원이 그런 장우경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꽤나 강단이 있는 자군·’
운중천 자체는 타락했을지 모르지만 장우경 개인은 무척이나 공명정대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에도 충실한 듯싶었다·
‘밑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맡은 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데····’
어딜 가나 위에 있는 자들이 문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뜻에 따라 조직은 움직이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장우경처럼 밑에서 임무에 충실한 자들이다·
아직도 장우경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은 채 마도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도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흐흐! 술맛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