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 5장 잃을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을 건다 (2)
진무원의 손가락이 첩지 바닥 부분을 훑었다· 밀봉 반대편 부분이었다·
사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첩지 밑 부분이 갈라지고 내용물이 보였다· 진무원은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내 읽었다·
“이건?”
“왜 그러십니까?”
진무원의 안색이 변하자 마도광이 다가와 서신을 읽었다· 마침내 서신을 모두 읽은 마도광의 안색 또한 진무원과 비슷하게 변했다·
“허!”
마도광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서신 안에는 종남파의 장문인인 청학진인이 관대승에게 보내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무척 심각한 것이었다·
“밀야의 무인들 중 상당수가 전열에서 이탈해 남하하는 것을 포착· 각별한 주의와 운중천의 경계 태세 상향 조정 요망이라···· 이게 사실일까요?”
마도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밀야는 산서성에서 운중천과 박빙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운중천을 상대하면서 따로 전력을 빼돌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거짓이라면 굳이 종남파에서 운중천에 사람을 보낼 이유가 없을 겁니다· 종남파에서도 이 정도의 전력을 빼서 운중천으로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진무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총관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밀야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 이 시점에서 밀야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면 밀야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서둘러 운중천이 있는 무한으로 가야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마도광이 대답했다·
진무원은 서신을 봉투에 다시 넣었다· 잘려 나간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감쪽같이 밀봉됐다· 진무원은 첩지를 다시 청율 진인의 품에 집어넣었다·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첩지가 개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겁니다·”
“흐흐! 도사들 입장에서는 눈 뜨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겠군요·”
마도광이 음소를 흘렸다·
아직도 도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이 되기 전까지 이들은 깊은 잠을 잘 것이다·
진무원과 마도광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새벽 동이 틀 무렵 노숙지를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직후 도사들이 하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으음!”
정신을 차린 도사들은 잠시 영문을 알지 못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도광에게 구타당한 충격에 잠시 기억이 단절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놈들은?”
하지만 어디에도 진무원과 마도광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휴!”
누군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한숨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청율 진인이 급히 품을 뒤졌다· 첩지가 무사히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사들이 하나둘 청율 진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체 누굴까요? 강호에 그와 같은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밀야가 아닐까요?”
순간 청율 진인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것은 다른 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종남파의 정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이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농락당했다· 정파의 무인들이 종남파의 무인들을 업신여길 리 없으니 당연히 사파 성향의 무인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밀야밖에 없었다·
“정말 밀야란 말인가?”
“그들이 아니고서는 우리 종남파에 시비를 걸 곳이 또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왜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을까?”
“글쎄요!”
청율 진인의 마지막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대가 정말 밀야의 무인들이었다면 자신들은 벌써 숨이 끊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쨌거나 이 사실을 빨리 운중천에 알려야겠구나·”
청율 진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혼절한 채 밤새 널브러져 있었더니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하지만 한가하게 휴식을 취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말에 올라타려 했다·
“어? 말들이····”
근처에 묶어두었던 말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말 위에 올려두었던 열 개의 안장뿐·
도사들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으하하!”
마도광이 시원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들을 풀어준 이는 바로 마도광이었다· 그는 지금쯤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종남파의 도사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마도광의 모습에 진무원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야주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가 아는 가경의는 결코 승산 없는 일에 승부를 거는 부류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이해득실을 면밀히 따져서 움직이는 이였다· 그런 이가 산서성의 병력을 두 개로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말을 달렸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호북성 북서쪽에 있는 방현(房縣)이었다·
진무원은 방현에 들어오자마자 흑월의 지부를 찾았다· 흑월의 지부장이 버선발로 진무원과 마도광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밀야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습니다· 최근에 들어온 소식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북방에서 큰일이 있었습니다·”
지부장이 침을 튀기며 산서성에서 있었던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에 관해 설명했다·
“산서성 정양에 진을 치고 있던 밀야의 전력이 전멸했습니다·”
“무슨?”
“운중천뿐 아니라 사사천과 불귀곡 창천문의 무인들도 총동원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인 거지요· 그 때문에 정양이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답니다·”
“초토화? 정양엔 일반 백성들이 많이 살아서 불가능할 텐데요·”
“그게····”
지부장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휴우! 일반 백성들 사이에 숨어들어 가 구별할 수 없게 되자 아예 정양 전체를 폐쇄하고 백성들까지 학살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담수천과 창천문이 동원된 것이 분명합니까?”
“확실합니다· 전장에서 담수천과 서문혜령을 보았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으음! 담수천이····”
다른 이들은 몰라도 담수천이 이런 대학살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다른 이도 아닌 흑월의 지부장이 하는 말이었으니까·
진무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정양 전체를 폐쇄하고 학살을 자행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린 미친 짓을 저지르다니· 믿기 힘들군요·”
“지급으로 들어온 소식입니다· 저희도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밀야의 야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죽은 가장 큰 거물이 흑익신창 우문천입니다· 그리고 천무대의 무인들이 밀야에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 백야마녀나 가경의는?”
“그들 역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흑익신창 우문천을 제외하면 밀야의 수뇌부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군요·”
“그렇습니다·”
진무원은 얼마 전 청율 진인의 첩지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밀야에서 상당한 인원이 떨어져 나와 남하를 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야주와 가경의가 따로 움직였다는 건가?’
가경의 역시 운중천이 이 정도로 대공세를 펼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반의 대비를 했을 테니까·
‘결국 우문천은 적들의 시선을 잡아끌 미끼였나 보군· 적당히 운중천의 관심을 잡아끄는 역할만 하면 됐는데 예상을 뛰어넘은 대공세에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하구나· 그렇다면 등유명과 가경의는 정예를 이끌고 어디로 간 거지? 분명 남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순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단어 하나·
운중천·
‘흑익신창을 미끼로 삼은 이대도강(李代桃僵)의 계· 우문천이라는 살을 주고 운중천이라는 뼈를 취한다· 그들은 운중천을 직접적으로 노리고 있다·’
이미 전에도 한번 실행했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모용율천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다시 실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자 가경의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문주님?”
진무원은 마도광에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마도광은 물론이고 지부장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밀야의 정예들이 운중천을 공격할 거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진무원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율천과 운중천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 전력의 반을 송두리째 희생시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무서울 정도의 독심이었다· 또한 그만큼 절박한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양에 있는 밀야의 병력을 잃었으니 그들의 독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겁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운중천이 있는 무한에 피바람이 불겁니다·”
지부장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진무원이 그에게 말했다·
“이 사실을 어서 빨리 북천문의 하 군사에게 알려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전서구를 띄우겠습니다·”
진무원의 시선이 이번에는 마도광을 향했다·
“무주께서는 저와 함께 서둘러 운중천으로 가시죠·”
“알겠습니다 문주님·”
마도광이 힘차게 대답했다·
방현에서 운중천이 있는 한천까지는 물경 천여 리가 넘었다· 말을 쉴 새 없이 달려도 열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진무원과 마도광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바로 말에 올라탄 후 방현을 떠났다·
☆ ☆ ☆
수주(隨州)는 호북성과 하남성 접경 지역에 위치한 조그만 현이었다· 폐쇄적인 지형 탓에 평소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조용한 곳이 바로 수주였다·
수주의 조그만 야산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평범한 상인이나 여행객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전신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천 명이 넘는 대인원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숨소리 크게 내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목소리를 내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중앙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욱! 후욱!”
장한 한 명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격랑에 젖어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크게 치뜨고 간신히 호흡을 조절하는 남자는 바로 등유명이었다·
등유명의 곁에는 가경의와 소금향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 역시 등유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수주의 이름 없는 야산에 모인 이들은 밀야의 정예들이었다· 그들이 숨을 죽인 채 등유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유명이 겨우 입을 열었다·
“신창께서 그렇게 가셨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문주님·”
“자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네·”
“문주님····”
가경의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금향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반 식경 전에 급보가 날아왔다·
산서성 정양에 남겨두고 온 전력이 몰살당했다· 운중천의 시선을 의식해 남겨두었던 흑익신창 우문천과 천무대주 궁상화까지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정도 밀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전멸을 당할 줄은 몰랐는지라 등유명과 가경의가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운중천의 전력에 불귀곡 사사천 그리고 창천문까지 가세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가경의는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 역시 등유명만큼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서문혜령 결국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구나·’
운중천의 총공세를 계획한 이가 서문혜령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뒤통수를 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시기에 이런 식으로 얻어맞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가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그때 등유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살기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에 동조하듯 밀야 무인들의 눈에도 살기가 어렸다·
“정양에 남겨두었던 우리의 형제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
“피값은 피로 받아낸다· 운중천과 무적세가는 우리가 흘린 피 이상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반드시!”
“피값은 피로 받아낸다·”
그들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