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 3장 영웅의 길(英雄之路), 패웅의 도(覇雄之道) (3)
담수천은 뒷짐을 쥔 채 창밖을 바라봤다· 창천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전 운중천의 지부였던 흔적은 이제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손으로 일군 문파였다· 아직 문파의 체계가 완전히 갖춰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창천문의 문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기를 점검하고 보급품을 수레에 싣고 있었다·
그때 서문혜령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천·”
“왔소?”
“출진 준비가 거의 끝났어요·”
“고생했소·”
담수천이 미소를 지었다·
창천문은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 목적지는 산서성 정양 지역이었다· 운중천과 밀야의 치열한 전쟁이 치러지는 곳이었다·
운중천은 정식으로 창천문의 참전을 요청했고 담수천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까지는 운중천의 일개 지부로 전쟁을 치렀지만 이제는 창천문이라는 이름을 걸고 치러야 한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창천문의 위상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오?”
“본문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고 전력을 전장에 투입하는 것 말이에요· 너무 위험 부담이 큰 게 아닌가 싶어요· 차라리 출전하는 인원을 줄이는 게 어떨까요?”
“그럴 수는 없소·”
“하지만····”
“당신이 걱정하는 바는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오· 모든 것을 걸든지 그게 아니면 이대로 잠자코 있든지· 중간은 있을 수가 없소·”
“알고 있어요·”
서문혜령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수천이 서문혜령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잠시 흐트러졌던 그녀의 눈빛이 본래의 냉철함을 되찾았다·
“한 가지 알려 드릴게 있어요·”
“말하시오·”
“북천문··· 진무원이 이번에 사천무림대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사천무림대회? 무슨 이유로?”
담수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답은 뻔해요· 사천무림을 규합해서 세를 과시하려는 걸 거예요·”
“세를 과시한다?”
“우리도 한칼 있다· 이 이상 건들면 꼭지가 돌아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마 이 정도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흠! 일리가 있군·”
담수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달랐다·
‘그 남자는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도 감수할 수 있는 남자가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사천무림대회를 연다?’
담수천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혼돈의 시대에서 오직 진무원만이 자신의 적수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오히려 친구보다 진무원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길을 걷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그들이 향하는 곳은 강호의 정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정상에 남는 것은 그들 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진정한 최고의 무인인지·
아무런 이유 없이 세를 과시하는 것은 이제까지 진무원의 행보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담수천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진무원을 언급할 때면 서문혜령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선다· 평소라면 그 누구보다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그녀였지만 진무원과 관계된 일이라면 시야가 좁아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담수천은 될 수 있으면 서문혜령에게 진무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이상 궁금한 것은 물어봐야 했다·
“모용 대협의 반응은 어떻소?”
“그 속내를 누가 알겠어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결코 좌시하지만은 않을 거란 거예요·”
“그렇겠지·”
“북천문은 그쪽에 맡기고 우리는 밀야와의 전쟁에만 집중해요·”
“알겠소·”
담수천이 빙그레 웃었다·
서문혜령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밀야와의 전쟁에 집중할 때였다· 운중천은 밀야와의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 승부를 걸었다· 담수천을 끌어들인 것 역시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다·
‘산서성이 피로 물들 것이다·’
담수천의 눈에는 피로 물든 산서성의 전경이 그려졌다·
수많은 이가 죽어갈 것이다· 전쟁과 상관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루한 전쟁을 끝내려면 큰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담수천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북명로의 밤은 불야성을 방불케 했다· 사천무림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더욱 많은 이가 면양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북명로에 모여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사천무림대회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덕분에 북명로와 면양은 최근 백 년 내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북천문의 대연무장에는 커다란 연단과 비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많은 젊은 무인들이 북천문에 들어와 숙소를 배정받았다·
많은 악사들이 들어와 연주를 하며 흥을 돋우면서 분위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염광설도 대연무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비파를 연주했다· 염초하가 그 곁에서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구슬픈 비파 음률에 맞춰 염초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염초하의 목소리는 실로 아름다웠다· 마치 길이 잘 든 악기처럼 그녀의 목은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오갔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녀의 음성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염초하를 유독 싸늘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염초하를 노려보는 이는 바로 함소령이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골이 살짝 패어 있었다·
“저 아이의 노래가 제법이구나·”
함소령의 뒤에 있던 함지평이 감탄사를 토해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종횡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노래를 들어봤지만 염초하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노래 실력은 발군이었다·
“흥! 그래 봤자 겉멋만 잔뜩 들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저 나이에 이 정도의 노래 실력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뭐 대단하기는 하네요·”
함소령의 날 선 반응에 함지평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원래 강호의 촉망받는 기재들에겐 미녀가 따라붙게 마련이지·’
곽문정 정도의 인재라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게 당연했다· 검룡표라는 별호가 주는 무게감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지평은 딸 함소령을 응원했다·
‘네가 그렇게 애를 태우지 않아도 문정은 결코 한눈을 팔지 않을 것이다·’
문득 처음 곽문정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곽문정은 무공도 변변찮은 일개 보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강호의 그 어떤 대협보다도 넓고 정의로웠다· 곽문정은 한번 마음을 주면 절대 변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을 배신하고 다른 이를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함소령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염초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견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섞여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감정의 부침을 겪어야 했다·
사랑 분노 질투 경쟁 같은 감정은 혼자 살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어른의 감정이었다· 이제 함소령은 그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만큼 성숙했다·
‘잘 자랐구나·’
함지평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비의 변변한 도움 없이도 이리 훌륭하게 큰 딸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함지평은 북천문에 잘 왔다고 생각했다· 이곳이라면 딸을 믿고 맡길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염초하 부녀의 노래가 끝났다· 비파의 탄주가 멎고 염초하는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염초하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염광설이 비파를 다시 등에 맸다·
“한 시진 정도 쉬고 다시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대협들께서 사천무림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길 빌게요·”
순간 곳곳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염초하는 그들에게 일일이 시선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함초령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잠시 두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염초하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함초령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저 여우가····’
함초령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염초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곽문정에게서 멀어지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랬다가는 오히려 자신의 평판만 깎이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마음에 걸려·’
단순히 곽문정 때문이 아니었다· 염초하에게는 함초령의 신경을 긁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섭도록 발달한 여인의 직감은 염초하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기에 함소령은 내색하지 않았다·
염초하 부녀가 함소령 부녀를 지나쳐갔다· 함소령은 멀어지는 염초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염초하는 종종걸음으로 숙소를 향했다· 뒤통수가 꽤 따가웠지만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곁에서 걷고 있던 염광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 그녀의 관심이 너를 향했구나· 꽤나 골치 아파지겠어·”
“골치 아플 것 없어요· 그녀는 단지 저를 정적으로 여길 뿐이니까요·”
“원래 여자의 질투가 가장 무서운 법이지·”
“그래 봤자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해요·”
염초하가 코웃음을 쳤다· 그에 염광설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딸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정보 계통에서 일했다· 악사로 위장해 중원 전역을 떠돌았기에 그녀의 경험은 노회한 무인 못지않게 대단했다· 반면 함소령은 공동파의 제자라고 하지만 경험이 미숙한 애송이였다· 자신의 딸과 비할 수는 없었다·
염광설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그나저나 북천문이 대단하긴 하구나· 경계망에 허점을 도저히 보이지 않아·”
“맞아요· 이곳은 용담호혈이에요· 전각의 배치가 요새나 다름없어요·”
“이곳을 설계한 자가 군사인 하진월이라고 했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요새를 구축해 내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은 문주인 진무원이 아니라 군사인 하진월일지도 몰라요·”
“네 말이 맞다·”
염광설이 염초하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정보를 수집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정보가 아니라 희귀한 정보를 수집해 비싼 가격에 팔았다· 당연히 남들보다 뛰어난 안목이 필요했다· 그들은 하진월이야말로 북천문의 가장 주요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가 있지?”
“이름 석 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나마 한 가지를 뽑자면 예전에 삼뇌서생이란 별호를 얻었다는 것 정도·”
“그 정도 뛰어난 자가 이제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구나·”
“그만큼 자신을 잘 감췄다는 뜻이겠죠·”
“맞다· 그야말로 용의주도한 자다· 그런 자에 관한 정보라면 분명 비싸게 팔릴 것이다·”
두 사람이 빙긋 웃었다·
진무원에 관한 정보는 너무 많이 알려져서 큰돈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진월에 대한 정보는 달랐다· 진무원이 상징적인 존재라면 하진월은 북천문을 실질적으로 운용하는 자였다·
그의 성향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북천문의 움직임도 달라질 것이다· 즉 그를 파악하면 북천문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정보는 분명 큰돈이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에게 접근하냐는 것인데?”
“우리에겐 훌륭한 도구가 있잖아요·”
“곽 소협을 말하는 거냐?”
“그는 진 문주와 하 군사의 거처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염초하의 미소가 짙어졌다· 염광설이 그런 염초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요 앙큼한 것 같으니라구· 어디서 이런 예쁜 여우가 나왔을까?”
“아빠의 훌륭한 가르침 덕분이죠·”
“그래! 그를 잘 이용하거라· 하진월에 관한 정보만 얻을 수 있다면 당분간 일 안 하고도 편히 살 수 있으니까·”
“물론이에요·”
염초하가 힘주어 대답했다·
문득 염광설이 뒤를 돌아봤다· 북천문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들이 빠졌어도 곳곳에서 악공들의 탄주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득 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어렸다·
“그런데 진 문주는 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지? 보통 이 정도 대회를 열면 주인이 얼굴을 보이게 마련인데·”
“바쁘겠죠? 당문과 아미파 청성파의 주인들과 회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걸요·”
“그럴까?”
“알잖아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진 문주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가 보죠·”
“흐음! 역시 그러려나?”
하지만 염광설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진무원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거처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