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 2장 독은 독으로 상대한다 (3)
양천(陽泉)은 산서성과 하북성 접경에 위치한 현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수려한 풍경으로 무척 유명했다· 때문에 평소에는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양천의 번화가에는 소가장(巢家莊)이 있다· 백여 년 전부터 양천에 자리를 잡은 이후 소가장은 꽤나 번성을 해서 지금은 명문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보통 명문이라고 불리려면 무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소가장은 가문의 무공으로 무력을 갖췄으며 자체 상단을 보유해서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다· 그렇게 보면 소가장 역시 명문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소가장의 장주 소인경은 이제 육십 대에 접어든 노인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무공을 수련해 겨우 사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인경의 거처에는 소가장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소인경을 보좌해온 수뇌부들의 얼굴에는 심각한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결국 입을 연 이는 장주인 소인경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비밀리에 호남성으로 들어가는 것·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날이 더 풀리면 어차피 호남성으로 상단을 파견해야 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면 너무 늦소· 우리는 반드시 한 달 이내에 호북성으로 가야 하오·”
“으음!”
“밀야의 운명이 달린 일이오· 기탄없이 여러분들의 의견을 말해주시오·”
소인경의 입에서 밀야라는 단어가 나왔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모두가 소가장을 평범한 가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기실 그들은 밀야의 비밀 거점 중 하나였다·
운중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백여 년 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아 착실히 세를 불려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소가장의 규모를 키웠기에 누구도 이곳이 밀야의 지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밀야와도 수년에 한 번씩 연락을 해왔을 뿐 직접적인 접촉은 삼갔다· 때문에 소가장의 식솔들조차 자신들이 밀야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이곳에 모인 극소수의 수뇌부들뿐이었다·
수뇌부들의 얼굴에는 갈등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밀야 출신이었다· 오래전 이곳에 소가장을 세운 이들이 그들의 조부였으니까· 하지만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부에서 아비로 다시 그들에게까지 삼 대가 내려왔다·
조부나 아비는 밀야에 큰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달랐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은 중원과 동화가 되었고 현재에는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굳건하던 충성심은 삼 대를 내려오면서 많이 희석되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밀야의 명령에도 소극적이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곳에서 제왕처럼 살 텐데 굳이 운중천을 공격할 이유가 있는가?’
밖에서는 한참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류인 밀야의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소인경은 그런 수뇌부들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비록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각이 손금 보듯 훤히 읽혔다·
‘으음! 너무 오래 독립해 있었던가? 누구 한 명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니·’
소인경은 어떻게든 밀야의 명령을 수행할 작정이었으나 수뇌부들은 차일피일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지금의 부와 명예를 놓기 싫었다· 하지만 그는 뼛속 깊은 곳까지 충성심으로 무장한 밀야의 무인이었다· 어떻게든 병력을 수습해 운중천이 있는 호북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으아악!”
소인경이 입을 여는 순간 밖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소인경과 수뇌부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 순간 다시 밖에서 소가장 식솔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이다·”
“적들이 쳐들어왔다·”
소인경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뒤를 따라 수뇌부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의문의 빛이 가득했다·
“무슨?”
소인경과 수뇌부들이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들의 눈에 소가장의 식솔들을 도륙하고 있는 일단의 무인들이 보였다·
붉은 피풍의를 걸친 백여 명의 사내들은 마치 닭을 잡듯 소가장의 식솔들을 죽이고 있었다·
“멈춰라·”
소인경의 목소리가 소가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붉은 피풍의를 입은 이들 중 누구도 멈추거나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익! 놈들을 막으시오· 어서!”
그의 명령에 수뇌부가 망설이지 않고 붉은 피풍의를 걸친 사내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운중천의 본진을 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지만 이곳을 지키는 것은 타협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가 걸린 일이었기에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적들에게 덤벼들었다·
챙챙!
곳곳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뇌부들이 달라붙었지만 전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붉은 피풍의를 입은 무인들의 무위는 그야말로 가공했다·
그들은 날이 곧게 선 직도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초식에 곡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점과 점을 잇는 직선의 도법· 쓸데없는 가지는 모두 쳐 낸 오직 살상만을 위한 도법·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부러졌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불과 일각 전까지 평화롭던 소가장엔 죽음이 가득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소인경이 이빨을 뿌득 갈았다· 그 순간 붉은 피풍의를 입은 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이곳 소가장의 장주인 소인경인가?”
“그렇다· 네놈들은 누구기에 감히 소가장에서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냐?”
“우리는 무적세가에서 나왔다네·”
“무적세가?”
소인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역시 무적세가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알고 있는 까닭이다·
“적포사신대(赤袍死神隊)라고 하지·”
우두머리 남자가 히죽 웃었다· 남자는 적포사신대의 대주인 남휘경이었다·
남휘경은 무적세가가 자랑하는 초절정의 도객이었다· 그가 이끄는 적포사신대는 백 명의 도객으로 이뤄져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절정에 달한 도객으로 이뤄진 사신(死神)의 집단이 바로 적포사신대였다·
무적세가 안에 적포사신대와 같은 조직이 얼마나 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오직 모용율천만이 정확한 수를 알고 있을 뿐이다·
소인경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적포사신대라는 이름 가지는 무게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적세가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소가장의 식솔들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살육을 하는 적포사신대의 무공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소인경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는 거요?”
“몰라서 묻는 것인가?”
“그렇소! 우리는 무적세가에 책잡힐 짓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소·”
“정말인가? 밀야의 양천분타주 소인경·”
“····”
너무나 정확하게 자신의 정체를 말하는 남휘경의 말에 소인경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상대는 이미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왔다· 그런 존재에게 서툰 변명은 안 한 만 못했다·
소인경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글쎄! 한 몇 년 되지 않았을까?”
남휘경의 대답에 소인경이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렸다· 그에 남휘경이 히죽 웃었다·
“백여 년 전부터 중원에 들어와 은밀히 뿌리를 내리다니· 꽤나 재밌는 발상이었어·”
“그런데 왜 이제까지 두고 봤던 거요?”
“위쪽의 생각을 내가 어찌 알겠나? 나 역시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개 졸에 불과할진대·”
“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위에서 더 이상 좌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거지·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분타들도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야·”
소인경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모든 분타가 들통났단 말인가?’
남휘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밀야의 백 년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거나 다름없다·
소인경이 검을 꺼내 들었다· 남휘경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휘경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왜 덤비려고? 후회할 텐데·”
“이 소인경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자존심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오·”
“그런가?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남휘경이 직도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그의 기세가 일변했다· 마치 그 자체가 잘 벼려진 도(刀) 같았다·
소인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챠핫!”
그는 체면 따윈 던져 버리고 남휘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가장 비전의 검공인 청강비검(靑剛秘劍)이 펼쳐졌다·
쉬쉭!
허공을 가득 뒤덮는 검영· 온 천하가 소인경이 펼친 청강비검의 그림자에 갇힌 것 같았다·
남휘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직도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싶은 순간 빗살처럼 뻗어 나왔다·
쐐애액!
그의 도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온 천하를 가득 뒤덮었던 검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인경이 청강비검을 펼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 그의 미간 사이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 도귀(刀鬼)로구나·”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지·”
“저주받을 무적세가· 당신들의 최후 또한 그리 좋지 않을 것이오· 내 지옥에서 먼저 기다리겠소·”
말을 마친 소인경이 썩은 통나무처럼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남휘경이 그런 소인경의 시신을 보며 히죽 웃었다·
“흐흐! 꽤나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 그런 저주 따위에 무너지기엔 무적세가가 너무 강하거든·”
남휘경이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포사신대에게 달려들던 소가장의 수뇌부들과 정예들은 이미 전멸한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직 살육뿐·
적포사신대는 살아남은 모든 것을 도륙했다· 어른 여자 아이 그리고 소가장에서 키우던 짐승들까지도· 그렇게 소가장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중원 전역에서 소가장처럼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한 문파가 열 곳이 넘었다· 그리고 그런 문파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갔다·
허름한 전각 안에 지대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전각 안에는 등유명을 필두로 밀야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흑익신창 우문천 백야마녀 소금향 군사인 가경의 궁문휘와 궁상화 그리고 육마존까지· 밀야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전력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등유명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가경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밀리에 중원에 구축한 분타들이 모조리 날아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열여섯 개 비밀 분타가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했습니다·”
가경의의 대답에 등유명이 혀를 찼다·
“허! 백 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단 말이군·”
“무적세가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등유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겠지· 그 늙은이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우리의 비밀 분타를 그렇게 거덜 낼 수 있을까?”
“최후를 대비해 중원에 구축해 놓은 세력들이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허! 대단하구만· 역시 만만치 않은 늙은이야·”
“이대로 전쟁을 더 수행하는 것은 무립니다·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 때입니다·”
“무슨 결정?”
“이대로 무리해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느냐 아니면 대세를 인정하고 물러나느냐? 한시라도 빨리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가경의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더 침중하게 변했다·
우문천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인가?”
“장기전으로 돌입한 순간부터 저희가 불리했습니다· 저들은 끝없이 전력을 보충할 수 있는 데 반해 저희는 그렇지 못하니까요· 이대로 전쟁이 길어지면 저희의 필패입니다·”
“음!”
우문천의 안색이 굳었다· 애초 전쟁을 반대했던 그였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물러나는 것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목숨이 잃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가는 그들의 희생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문천의 시선이 등유명을 향했다·
“어떡하시겠소 야주? 나는 야주의 뜻을 따르겠소·”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등유명의 시선이 가경의를 향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은 네가 잘 알고 있잖아· 어차피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 밀야에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방법이나 말해봐·”
모두의 시선이 가경의를 향했다·
가경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평소보다 냉철한 그의 모습에 모두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침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무게추는 저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끝이 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습니다· 이 한 수에 우리의 운명을 겁니다·”
“····”
“역천지계(逆天之計)를 발동하겠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야주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역시 그 수밖에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