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 2장 독은 독으로 상대한다 (2)
하진월은 차가운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북천문의 무인들과 화중경이 이끄는 무인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북명로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화중경이 이끌고 온 무인들의 무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특히 화중경의 무위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그가 화룡대도를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북천문 무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서걱!
달려들던 북천문의 문도를 베어낸 화중경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수라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적아를 구별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무인이 뒤엉켜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이 덧없이 사라지고 팔다리를 잃은 무인이 바닥에 널브러져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중엔 그가 아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몰살을 당하고 말 것이다·’
화중경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만큼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정문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하진월을 향했다· 그가 화룡대도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어차피 임무는 실패였다· 북천문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이쪽 전력만 전멸하게 생겼다·
화중경은 결정을 내렸다·
“챠핫!”
그가 하진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데리고 온 병력을 모두 잃더라도 하진월의 목숨만 빼앗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탁! 탁!
대지를 두어 번 박찬 것만으로도 그의 신형은 하진월의 지척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하진월의 얼굴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슈우우!
화룡대도가 일렁이더니 붉은색 도강이 선명하게 치솟아 올랐다· 길이만 석 자가 넘는 도강이 하진월을 향해 내리꽂혔다·
화중경은 이 한 수로 하진월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다음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채앵!
갑자기 하진월의 뒤쪽에서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와 화룡대도를 막아냈다· 화중경의 화룡대도와 달리 평범한 검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검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범상치 않았다·
“칫!”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반진력에 화중경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착지한 화중경이 검의 주인을 바라봤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한없이 순박해 보이는 얼굴에 시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을 가진· 하지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파마저 평범하지 않았다·
그가 하진월을 보호하듯이 뒤에 서 있었다· 화중경이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황철이라고 합니다·”
“황철?”
화중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무적세가에서는 매년 천하에 이름난 무인들의 정보를 수집해 인명록을 작성했다·
황철과 같은 무력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인명록에 이름이 올라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황철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만큼 상대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증거였다· 이 정도의 공력과 기도라면 최소 초절정 이상이었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북천문에 웅크리고 있었단 말인가? 대체 북천문에는 얼마나 더 많은 인재들이 숨어 있는 거지?’
문득 무적세가가 너무 북천문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상념을 지우고 황철을 노려보았다·
“막을 텐가?”
“별 웃긴 소리 다 듣겠군요· 나는 북천문의 무인· 본 문의 군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렇군! 내가 잠시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군·”
화중경이 이를 악물며 황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도 황철을 넘어야만 하진월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쉬익!
화룡대도에서 다시 도강이 뿜어져 나왔다· 강렬한 빛 무리가 덮쳐 옴에도 황철의 표정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황철은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진월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검에서도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검강이었다·
촤앙!
도강과 검강이 격돌하며 사방으로 기파가 넘실거렸다·
황철의 검이 종횡으로 그어졌고 화중경의 패도적인 도격이 연이어 작렬했다·
화중경의 구룡도법(九龍刀法)은 이름만큼이나 강렬한 위력을 자랑했다· 반면 황철의 검법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변초도 없이 간결하게 휘두르는데 그 위력이 결코 구룡도법에 뒤지지 않았다·
“크윽!”
화중경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단숨에 황철을 쓰러뜨리고 하진월을 죽이려 했던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황철은 마치 벽 같았다· 검으로 세운 굳건한 벽· 화중경이 어떤 초식을 펼치든 간에 별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화중경은 평범한 초식으로는 황철을 넘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화중경은 전신의 내력을 모조리 화룡대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화룡대도에 맺힌 검강이 더욱 크게 확장됐다·
우우웅!
화룡대도가 웅혼한 도명을 터뜨렸다·
구룡포효(九龍咆哮)· 구룡도법 최후의 초식을 펼치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구룡포효는 구룡도법의 다른 초식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화중경의 모습에 황철 또한 검에 공력을 극성으로 주입했다· 하지만 화중경과 달리 그의 검강은 작게 응축됐다· 언뜻 보면 검기가 겨우 발현된 것처럼 검에 위태하게 덧씌워진 모습이었다·
화중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식적으로 내공을 극성으로 주입했으면 검강이 더 커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상식과는 달리 황철의 검강은 오히려 작게 응축되고 있었다· 상리를 벗어난 현상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챠하핫!”
결국 화중경이 먼저 황철을 향해 구룡포효의 초식을 펼쳤다· 그의 화룡대도에 맺혀 있던 도강이 아홉 줄기로 갈라져 황철을 향해 날아왔다·
쿠우우!
도강이 다가오기도 전에 공기가 무섭게 요동쳤다·
황철이 허리를 잔뜩 비튼 채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발목과 허리가 한계까지 돌아갔다 싶은 순간 ‘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풀려나왔다·
다리가 돌아가고 허리가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어깨가 돌아가고 검을 잡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황철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아홉 줄기의 도강과 격돌했다·
쿠와앙!
굉음이 터져 나오며 세상이 하얀색으로 물들어갔다· 황철과 화중경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컥!”
누군가 답답한 비명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져 나갔다· 십여 장이나 바닥을 나뒹굴고 나서야 널브러진 남자는 바로 화중경이었다·
화중경의 옆구리는 거의 절반이나 베어져 나가 내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고 화중경의 얼굴엔 죽음이 내려앉고 있었다·
“흐어억!”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황철이 화중경을 내려다보았다· 황철의 얼굴에는 승자라면 으레 가지고 있어야 할 자부심이나 들뜬 표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대신 씁쓸한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화중경이 충혈이 된 눈으로 힘겹게 황철을 올려다보았다·
“무··· 슨 검법이지?”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
“허! 스스로 창··· 안했단 말인가? 쿨럭!”
화중경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의 눈에서 생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말을 이었다·
“적··· 하검(赤霞劍) 어떤가? 마치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것 같았거든·”
“좋은 이름입니다· 앞으로 제 검법을 적하검이라 부르겠습니다·”
“흐흐!”
화중경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것이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황철의 가슴은 큰 바위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평생 보표로 살아왔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엔 익숙했지만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싸움은 아직도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황철은 이것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십삼 년 전 그는 진관호의 죽음과 북천문의 몰락을 그냥 지켜봐야 했다· 당시의 그는 평범한 삼류무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절대의 벽을 엿본 고수였다· 화중경의 죽음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황철이 화중경의 시신을 뒤로하고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북천문의 무인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곳이었다·
“그때는 지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이 황철 북천문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 것이다·”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황철의 얼굴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북천문의 당당한 무인이었다·
뚝뚝!
누군가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순식간에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런 웅덩이가 백여 개가 넘었다·
그 한가운데 진무원이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설공이 겨우 버티고 서서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겨우 열여덟 명의 나한만이 남아 있었다·
설공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참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백팔나한 소림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무너졌다·
그들은 용감했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동료들이 죽었으면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죽음이 내리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결과 눈앞에 보이는 대로 대부분의 나한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설공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비록 배분이 달라 살갑게 지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소림이라는 한 공간에서 깊은 유대감을 갖고 살아온 형제나 다름없었다·
눈앞에 진무원이 있었다· 자신의 형제들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가 밉지 않았다· 그저 그와 대치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진무원 또한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라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백팔나한을 죽이지 않으면 북천문의 많은 이들이 그들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적이 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일단 적이 된 이상 손속에 사정을 둘 수는 없었다·
후웅!
설공이 남은 공력을 끌어 올렸다· 십팔나한도 그에 동조해 마지막 남은 공력을 모조리 뽑아냈다· 누구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득 설공이 십팔나한을 돌아보았다·
“아미타불! 그동안 고마웠네·”
십팔나한이 설공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진무원은 악마였다· 이대로 진무원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운중천은 물론이고 소림의 미래까지 위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십팔나한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진무원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백팔나한 전체가 달려들어도 어쩌지 못한 괴물· 살아남은 십팔나한과 설공만으로 그를 어떻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적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이다·
말없이 교감을 한 십팔나한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무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를 설공이 따랐다·
가장 체격이 큰 중광이 앞장섰다· 금강나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외공을 대성해 가장 튼튼한 육신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육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진무원의 일검을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진무원의 검은 무서웠다· 치가 떨리도록 무서웠다· 그의 일검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려 버렸다·
‘나는 분명 죽을 것이다· 하나 나의 생명을 희생해 그의 검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는 진무원이 빈손이라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콰아아!
그가 진무원을 향해 통배권(通背拳)을 펼쳤다· 불문의 무공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강한 살상력을 가진 통배권이 진무원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순간 진무원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걷어찼다·
쐐애액!
평범하던 나뭇가지가 진무원의 내력을 머금고 가공할 살상력을 머금은 암기가 되었다·
콰앙!
“커억!”
통배권을 펼치던 중광의 주먹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의 가슴엔 진무원이 걷어찬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한 중광이었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흐려지는 중광의 시야에 진무원의 팔다리를 잡는 동료들이 보였다· 열일곱 명이 진무원의 팔과 다리를 족쇄처럼 움켜잡고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설공에게 하는 말이었다·
중광의 희생으로 진무원의 팔다리를 옭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명이나 내력을 모았지만 이 악마 같은 자가 숨을 한번 들이쉬면 끝날 것이라는 것을·
그만큼 절실했다· 그들은 설공이 자신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만을 빌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내공을 운용해 진무원의 속박이 풀리지 않게 했다·
설공 또한 필사적이었다· 금강반야장(金剛般若掌)을 펼쳤다· 설공이 익힌 최강의 절기였다·
콰아아!
엄청난 장력이 진무원을 향해 날아왔다·
진무원이 무형의 검을 떠올렸다·
‘설화야·’
그 순간 설공은 진무원의 손에 들린 칠흑의 검을 보았다· 그리고 칠흑의 검이 세상을 두 조각 냈다· 그것이 설공과 십팔나한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