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 7장 멍석을 깔아 판을 키운다 (3)
하진월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모용진을 바라봤다·
“진심입니까?
“간단하고 좋잖아· 어때?”
“거절하겠습니다·”
“왜? 겁나? 하긴 북천문과 같은 삼류 문파의 무인이 얼마나 무공을 익혔겠어· 겁날 만도 하겠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모용진의 도발에 하진월이 단호히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무상이 앞으로 나섰다·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제안 따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일세·”
“하지만 그는 북천문을 무시했습니다·”
소무상의 음성이 스산했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 생각해서 이제까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북천문을 무시하면서까지 도발을 하는 모용진의 태도에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하진월은 다시 한 번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때 진무원이 소무상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겠습니까?”
“맡겨주십시오 주군· 다른 것은 몰라도 북천문이 모욕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소무상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한기가 뚝뚝 묻어 나왔다· 그에게 북천문은 무한한 긍지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북천문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하진월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항상 이성에 기반을 두고 냉철하게 판단을 하는 자신과 달리 저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무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자존심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진월이 소무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절대 지지 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사·”
소무상이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연무월을 바라보았다· 모용진이 그의 귀에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 있지?”
“물론입니다 공자님·”
연무월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무적세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무인이었다· 모용진을 호위하기 전에는 수많은 임무에 투입되어 많은 이의 피를 묻혔다· 개중에는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초절정고수들도 있었다· 연무월은 소무상이 그들보다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용진의 목소리가 더 은밀해졌다·
“가능하다면 놈을 죽여·”
“뒷감당은 어쩌시려고?”
“흐흐! 제깟 것들이 뭘 할 수 있을까? 놈들은 우리를 어찌할 수 없어·”
“알겠··· 습니다·”
연무월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모용진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섯 사람은 빈객청 뒤쪽에 딸려 있는 조그만 연무장으로 나왔다·
소무상과 연무월이 마주 섰다· 두 사람의 몸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청명한 검음과 함께 시퍼런 검신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그들의 기도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날카롭게 변했다·
연무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소무상의 기수식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청운검법(靑雲劍法)과 비슷한 것 같군·’
운중천의 외당 무사들이 주로 익히는 것이 바로 청운검법이었다· 그만큼 흔한 검법이었고 상승의 경지로 가는 길목이 막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이미 상승의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착각이겠지? 청운검법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기세를 발산할 수 없으니·’
연무월이 익힌 검법은 대연삼검(大然三劍)·
단 삼 초식으로 이뤄진 검법이었지만 가히 파천황의 위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챠핫!”
먼저 대지를 박찬 이는 연무월이었다· 그의 검이 어둠을 가르며 소무상을 향해 날아왔다· 마치 어둠 속에서 섬전이 번쩍이는 듯했다· 하지만 소무상은 당황하지 않고 검으로 섬전을 쳐 냈다·
까앙!
어둠 속에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 격돌에 소무상의 몸이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몸이 유려하게 움직이면서 연무월을 향해 접근해 왔다· 계류보를 펼친 것이다·
진무원이 전수해 준 계류보는 이제 독자적인 경지에 접어들었다· 원류만 같을 뿐 그에게 최적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쉬쉬쉭!
소무상의 검이 어둠 속에서 푸른 꽃을 피워냈다· 연무월도 지지 않고 대연삼검의 절초를 연이어 펼쳐 냈다·
검기와 검기가 격돌했다·
소무상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검을 쥔 손바닥에 짜릿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에 등골이 다 짜릿했다· 황철과 매일같이 비무를 했다· 그 덕에 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철과의 비무는 한 가지가 부족했다·
실수하면 죽는다는 긴장감·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극도의 위기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그는 충분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신경은 확장되고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뛰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냉철했다· 몸은 용광로에 담겨 있는 것 같은데 머리는 북해의 찬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연무월은 강했다· 그의 검은 독사처럼 허점을 파고들어 한 치의 방심도 용납지 않게 했다·
따다다다당!
허공에서 수십여 차례나 검이 부딪쳤다· 쇳소리가 고막을 파고들고 검끼리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번쩍였다· 소무상은 이제까지 갈고닦은 청운검법을 마음껏 펼쳐 냈다·
쉬앙!
연무월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검신에 머금은 섬뜩한 살기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머금었을 때야 비로소 갖게 되는 살기였다· 상대는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 무인이 아니라 사람을 죽일 줄 아는 진짜 무인이었다·
소무상은 그런 상대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대를 만나 자신의 청운검법을 펼칠 수 있어 행운이었다·
청운검법의 절초가 줄줄이 펼쳐졌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위력을 머금고 있는 살인적인 검초였다· 소무상이 그간 쌓아온 공력과 노력이 검초에 깃들어 있었다·
“으음!”
연무월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눈에는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생각보다 소무상의 무위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소무상이 펼치는 검법 그 자체였다·
‘맙소사! 정말 청운검법이라니·’
단지 비슷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다·
삼류 검법이라 불리는 청운검법으로 이 정도 성취를 이루다니· 같이 검의 길을 가는 사람 입장에서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용진의 생각은 그와는 다른 듯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겨우 그 정도에 무인에게 고전을 하다니· 어서 놈을 쓰러뜨리지 못해?”
연무월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무상은 진짜 검객이었다· 몸과 마음을 극한까지 단련한 진짜 검객· 그런 자를 상대로 어지간한 초식은 통하지 않는다·
연무월은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검이 청명한 검명을 터뜨렸다·
우웅!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소무상의 검이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검들의 울음에 하진월이 놀라 진무원을 바라봤다·
진무원은 두 검객의 싸움에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무위는 그야말로 호각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듯 성취도가 비슷한 것이다·
‘성취가 비슷하다면 남는 것은 경험과 임기응변· 거기서 승부가 갈릴 것이다·’
진무원은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싸우는 것이라면 이렇게 긴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아닌 소무상의 싸움이었기에 극도의 긴장감이 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들의 싸움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소무상의 싸움이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소무상 역시 검에 목숨을 건 검객이었다· 그런 이의 싸움에 개입을 하는 것은 소무상에 대한 모욕이었다·
소무상과 연무월의 대결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화학!
갑자기 주위의 기운이 두 사람을 향해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최후의 초식을 펼치기 전에 전 공력을 끌어 올리는 전조였다· 진무원은 하진월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무공을 모르는 하진월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챠핫!”
연무월의 기합성과 함께 검강이 형성됐다· 이 장 길이의 검강이 소무상을 향해 날아왔다· 소무상이 피할 공간은 어디도 없어 보였다· 대연삼검의 마지막 초식인 천라무한(天羅無限)이었다·
그에 반해 소무상의 검에는 별반 변화가 없어 보였다· 아니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 그의 검에는 가공할 공력이 집약되어 들불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쉬가악!
소무상의 검이 연무월이 만들어낸 검강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잔뜩 응축된 기운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풀려나왔다· 소무상의 기운은 순간적으로 검에 덧씌워졌다·
쩌엉!
그들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그 충격으로 소무상의 입술을 비집고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의 검에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잔금이 가고 있었다· 잔금은 거미줄처럼 검신 전체로 번져 갔다· 반면 연무월의 검은 멀쩡했다· 그의 검은 무적세가에서 특별히 제작한 명검이었다· 그 차이가 두 사람의 승부를 가르고 있었다·
소무상은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검이 튼튼하지 못해 졌다는 것은 패자의 변명에 불과했다· 부족한 무기로도 승리를 거두는 것이 무인의 능력이었다·
‘이대로 지는가?’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자신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모습이 맺혔다· 그가 충성을 맹세하고 따르기로 한 사내다· 어떤 험로라도 그의 곁에서 함께하길 맹세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떤가?
‘이 무슨 꼴사나운 모습이란 말인가?’
무기의 열세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가 열악하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머릿속에 열기가 가득 차오르며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다·
툭!
소무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져 나갔다·
이제껏 그를 가로막고 있던 선입견과 스스로가 정한 한계가 강렬한 열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고 검에 실린 힘이 달라졌다· 그의 변화를 제일 먼저 감지한 사람은 바로 연무월이었다·
‘무슨?’
그 순간 연무월은 눈앞에서 강렬한 빛 무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크헉!”
강렬한 충격과 함께 연무월의 몸이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런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뒤이어 사방으로 검의 파편이 비산했다·
쓰러진 연무월의 몸에는 검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소무상은 간신히 버터고 서서 쓰러진 연무월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을 막고 있던 벽이 뚫리면서 새로운 내공의 운용에 눈을 떴다·
그는 부서지기 직전의 검에 오히려 내공을 강하게 주입해서 충돌시켰다· 그 결과 검신이 폭발해서 사방으로 비산한 것이다· 소무상과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붙어 있던 연무월은 비산하는 검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소무상의 극적인 승리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모용진은 달랐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꼴사납게 바닥에 누워서 뭐 하는 거야?!”
그는 연무월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에 연무월이 버둥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구· 어서 일어나란 말이야! 이대로 나에게 망신을 줄 셈이냐?!”
“크윽!”
“죽더라도 싸우다 죽어· 내가 창피하지 않게·”
모용진의 입에서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광기 어린 그의 모습에 하진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진무원이 나섰다·
그는 힘겹게 서 있는 소무상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여준 후 쓰러져 있는 연무월에게 다가갔다·
“뭐야?”
갑작스럽게 끼어든 진무원의 행동에 모용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진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무월을 일으켜 세웠다·
“수고했습니다·”
비록 적이지만 정당히 승부를 겨룬 연무월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진무원은 소무상이 깨달음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가 깨달음을 얻을 만큼 몰아붙인 연무월에게 감사했다· 그가 소무상을 극도로 압박하지 않았다면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황철이 그랬던 것처럼 소무상 역시 지금 일대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절대의 경지를 막고 있는 굳건한 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었으니 앞으로 자신이 어떡하느냐에 따라 경지가 상승할 것이다·
연무월의 얼굴엔 참담한 빛이 가득했다· 상처는 둘째 치고 모용진의 태도가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적보다 못한 아군이 자신이 모셔야 하는 주군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연무월이 표정을 수습하고 모용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속하가 주군의 얼굴에 먹칠을 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죽어야지·”
순간 모용진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경기가 일어나 연무월을 덮쳐 왔다· 무적세가의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경천수(驚天手)의 수법이다· 맨손으로도 검기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발산할 수 있는 극상승의 절기였다·
죽음을 예감한 연무월이 눈을 감았다·
퍼석!
하지만 몸이 잠시 들썩였을 뿐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연무월이 눈을 뜨자 앞을 가로막고 있는 진무원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