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 7장 멍석을 깔아 판을 키운다 (2)
열린 문 너머 진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 뒤엔 하진월과 소무상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모용진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당신이 북천문의 문주인가?”
“그렇습니다·”
“하! 망한 문파를 다시 세웠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내가 누군지 알고 이리 푸대접을 하는 건가?”
“무적세가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알면서도 그런단 말이지?”
모용진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순간 폭발적인 기세가 일어나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모용진을 달래는 대신 시비를 향해 말했다·
“괜찮습니까?”
“저 저는 괜찮습니다 문주님·”
대답을 하는 시비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시비는 북천문이 면양에서 개파하면서 새로이 고용한 사람이었다· 일초반식의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여인인 것이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가 언제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본 적이 있을까· 그녀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진월이 앞으로 나섰다·
“밖에 나가서 쉬고 있거라·”
“예!”
시비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한편 모용진은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시비를 걱정하는 진무원의 모습이 그의 성질을 더욱 돋웠다·
“감히!”
그가 막 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한 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고용한 눈빛을 보는 순간 모용진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눈빛이었다· 그가 수많은 이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진무원 역시 보다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껴졌다·
평소라면 자신을 향해 그렇게 건방진 눈빛을 보는 자의 머리를 부수고 몸통을 짓이겼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수행해 온 검객이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지금 그는 모용진 개인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운중천의 사자 자격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그가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나는 운중천의 사자로 이곳에 왔다· 그러니 합당한 대우를 해주길 바란다·”
“공적인 용무로 왔단 말입니까?”
“그렇다·”
“운중천에서는 사자를 보내기 전에 공문을 보내지도 않는 모양이군요·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사자라고 말하면 누가 믿습니까? 일의 전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게 본 문이 우습게 보였습니까?”
송곳처럼 찔러오는 진무원의 말에 모용진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는 북천문을 우습게 보았다· 잊어진 망령을 현시대에 다시 살린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일이지만 운중천이나 무적세가에 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용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둘러 진무원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똥개도 자신의 집 안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던가? 오냐! 봐주마· 하나 다음에 사천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를 보게 되면 그 눈깔을 뽑아주마·’
모용진은 복수를 다짐하며 이빨을 뿌득 갈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온 신경을 진무원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 하진월이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역시 아직은 애송이군·’
모용진을 홀로 방치하잔 생각은 바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모용진의 그릇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무려 무적세가의 이공자였다· 대공자인 모용현의 무명은 강호를 떠들썩하게 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향에 대해선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반대로 모용진은 완전히 무명이었다· 무적세가의 이공자라는 사실을 빼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 파악해야 했다·
그는 대공자인 모용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 정도에 따라 모용현의 정책 또한 바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파악해야 했다· 하진월은 그를 혼자 둠으로써 인내심과 성격을 파악했다·
하진월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졌군요· 모용 공자님께 죄송하지만 갑작스럽게 본 문에 회의가 있어서 늦었습니다· 이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크음!”
“이럴 게 아니라 모두 앉으시지요· 따뜻한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는 모용진에게 자리를 권함과 동시에 직접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진무원과 모용진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잠시 후 하진월이 직접 우린 차를 사람들 앞에 내놨다· 향긋한 차향이 후각을 자극하자 모용진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그 정도로 하진월이 차를 끓이는 솜씨는 훌륭했다·
하진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운중천에서 무슨 용무로 모용 공자님을 보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북천문을 인정해 주겠으니 운중천을 도와라·”
“무엇을 도우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북천문이 만들어진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밀야를 견제하고 막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십수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운중천의 손으로 북천문을 압박해 전대 문주님께서 자결을 하셨구요· 그것으로 운중천과의 모든 관계는 끊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인가?”
“모용 공자께서 생각하기에 지금 제안이 말이 되는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안이라면 조금 더 그럴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천문엔 그 정도의 제안도 과분할 텐데·”
“그렇습니까?”
“지금 당장이야 운중천이 밀야와의 전쟁 때문에 전력을 뺄 수 없지만 전쟁이 끝나면 우리의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나? 북천문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지·”
모용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사실 운중천에서는 다른 이를 사자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모용진이 우겨서 이곳으로 직접 왔다· 자신의 눈으로 북천문을 확인하고 진무원의 무력을 가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용진은 이쯤 이야기했으면 진무원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굳게 입술을 다문 채 앉아 있었다· 눈빛이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아무리 태연한 척 위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고민될 것이다·’
그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급한 것은 자신이 아닌 진무원과 북천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진무원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지 않게 하면 되겠군요·”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진무원의 반문에 모용진이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모를 모용진이 아니었다·
전쟁을 장기화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밀야를 은밀히 지원하는 방법도 있었다·
“지금 밀야와 손을 잡겠다고 협박하는 건가?”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게 아니면?”
“뭐 세상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법이니까요·”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모용진은 웃을 수 없었다· 그가 진무원을 노려보았다· 꽉 쥔 주먹에 절로 내공이 주입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모용진의 등 뒤에 서 있던 검객이 은밀히 검을 잡았다·
그의 이름은 연무월 무적세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무인이었다· 모용현의 무적삼십육검수에 비견될 만큼 강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바로 모용진을 무사히 지키는 것이었다·
모용진에게 단점이 있다면 단 한 번도 실패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적세가의 안배에 따라 성장을 해왔기에 그에겐 실패의 기회가 아예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었다·
모용진은 천재였다· 무공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형인 모용현은 훨씬 뛰어난 천재였다·
그가 한 달 안에 익힌 무공을 열흘에 익혀내는·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가문의 모든 사람이 그런 모용현을 찬양했다· 그 때문에 모용진은 항상 한켠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용진은 항상 형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모용현의 위명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적세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그를 북천문에 오게 만들었다·
북천문을 직접 포섭한다면 적어도 모용현에 밀리지 않는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문 내에서 그의 입지도 한층 더 단단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직접 그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모용진이 북천문에 사자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연무월은 그런 모용진의 성향이 협상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었다·
모용진은 협상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고 진무원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가 본 진무원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진무원은 이제까지 모용진이 만나온 그 어떤 사람과도 격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 정도의 거대 문파를 일군 남자다· 무공은 둘째 치고 배포나 강인한 정신력은 공자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사자의 자격으로 왔으니 진무원이 먼저 손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용진이 발작해서 난동을 부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무월은 그런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무상이 그런 연무월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마찬가지로 검을 잡아갔다· 그의 서늘한 두 눈에 은은한 살기가 떠오른 그 순간 하진월이 일어서 모용진의 잔에 차를 다시 따랐다·
“이것 참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군요· 다들 진정하시고 차나 한잔하시지요· 차 맛이 아주 좋습니다·”
“흠!”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북천문이 밀야를 돕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는 이제 출범한 신생 문파· 아직 기반이 약해 사천성 밖으로 전력을 내돌리는 것은 무립니다·”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어쩌겠습니까? 그게 진실인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그럼 어떡하면 믿겠습니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여기 머물겠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건··· 조금 곤란하겠군요· 아무리 신생 문파라도 외부에 보여줄 수 없는 비밀스러운 부분도 조금은 있으니까요·”
하진월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모용진은 도끼눈을 치뜨고 노려봤다·
“숨기는 것이 없다면 못 보여줄 이유도 없지 않은가?”
“혹시 무적세가에서도 중지를 타인에게 보여줍니까?”
“그건····”
순간 모용진의 말문이 탁 막혔다· 그런 모용진의 모습에 하진월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상대로 모용진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애송이였다· 무공은 강할지 모르지만 세상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치 강한 힘을 가진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았다·
문제는 무적세가에서 그런 모용진의 문제를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용진을 이곳에 사자로 보냈다는 것은 경험을 키워주려는 목적인가?’
아무리 북천문이 운중천과 원한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모용진을 쉽게 죽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명분이 운중천과 무적세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모용진이 경험을 얻으면 나름 좋은 것이고 혹여 우리와 충돌을 일으켜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어쩌면 무적세가는 모용진이 북천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더 크게 원한 것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소름이 다 끼쳤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용진의 호위가 생각보다 빈약한 것이 이해가 됐다· 모용진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희생양으로 이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진월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이 같은 계획을 세운 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치밀함과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는 그 같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표출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무적세가의 이공자를 미끼로 내던질 만한 자가· 역시 모용율천뿐인가?’
만일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율천에겐 친혈육마저도 목적을 위해선 언제든 희생시킬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모용율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자구나·’
그는 단순히 장막 뒤의 지배자가 아니라 야망을 위해서라면 친 혈육마저 아무렇지 않게 희생할 수 있는 독심의 소유자였다·
이제 자신과 진무원은 그런 독심을 가진 자를 상대해야 했다· 단순히 무공만 고강한 자라면 두렵지 않았다· 북천문에도 무공이 강한 고수들은 수두룩하니까· 하지만 무공이 천하를 아우를 정도로 대단한 자가 독심마저 갖추고 있으면 이미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에 비하면 모용진은 철모르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어린애가 하진월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내기를 하는 것이 어때?”
“내기?”
모용진이 손가락으로 소무상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은데 내 호위무사와 싸우게 하는 게 어때? 진 자는 이긴 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걸로·”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에 소무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