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 6장 깊은 호수는 용을 불어들이기도 한다 (2)
마치 폭풍 앞의 갈대처럼 하진월의 몸이 위태하게 흔들렸다· 그나마 쓰러지지 않은 것은 하진월의 정신력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하진월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야주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기파는 사대마장이라 할지라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광포한 힘을 담고 있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책사 따위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역시 자네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 정말 대단해·”
“정말 밀야의 야주가 맞습니까?”
“맞다네· 내가 밀야의 야주인 등유명이라네·”
“등유명?”
“그렇다네· 나의 진명을 아는 자는 밀야에서도 오직 극소수뿐· 자네는 영광으로 알아야 하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외인 중에 나의 이름을 알고 살아 있는 자는 아직 자네가 유일하거든·”
“그 말은 꼭 저를 죽이겠다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군·”
등유명은 담담히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등유명·’
하진월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밀야의 야주는 이름만큼이나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비인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중원의 그 누구도 야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신상 내력은 물론이고 나이와 성별까지도 완벽하게 어둠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것이다·
하진월은 밀야의 야주가 조금 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일 줄 알았다· 아무래도 밀야라는 거대한 세력을 이끌어 나가려면 무공도 무공이지만 경륜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등유명은 무척이나 젊어 보였다· 아무리 많이 잡아줘도 서른 초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가 밀야의 야주인가? 그도 아니면····’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반··· 로환동?”
“흐음! 눈치가 제법이군· 북천문의 군사답다고나 할까?”
등유명은 하진월의 추측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하진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진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반로환동이라니?’
반로환동(返老還童)·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인간이 평생 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강호의 신공절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의 한계 범주 안에서 내공을 극성까지 활용하게 만든다·
하지만 간혹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내공을 쌓아두는 자들이 나오곤 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그릇을 넓게 만들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그릇을 확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육체가 엄청나게 불어난 내공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 변화를 택하게 된다· 강대한 내공에 걸맞은 강대한 육체로의 변화· 늙어서 힘이 없는 육체를 버리고 싱싱하고 젊은 육체로 갈아탄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반로환동이었다·
말은 쉽지만 반로환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사를 통틀어봐도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른 자들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무림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간혹 강대한 내공으로 노화 자체를 억제하는 자들도 나오지만 반로환동은 그와는 또 달랐다· 반로환동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무공에 걸맞은 육체를 스스로 선택하고 키워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공에 가장 알맞은 최적의 육체· 그래서 반로환동을 한 자는 단순히 노화를 억제한 자들보다 훨씬 더 육체적으로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월을 보며 등유명이 나직이 웃었다·
“생각해 보면 하늘의 법도는 그야말로 완전무결해서 하나도 허투루 보내는 것이 없다네· 설마 부야주의 배신으로 빈사상태에 이르렀던 내가 오히려 깨달음을 얻을 줄 누가 알았을까?”
십수 년 전 등유명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 폐관 중이었고 운공중에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 상태였다· 그때 모용율천의 사주를 받은 부야주 장무경이 기습을 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습에 등유명은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이때 입은 상처로 인해 등유명은 주화입마에 빠졌다· 깨달음의 고비에 있었기에 외부의 타격은 그에게 더욱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등유명은 폐인이 되어 몇 년을 홀로 칩거해야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했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등유명은 단 한순간도 스스로를 놓지 않았다· 그는 폐인이 되어서도 용맹 정진했다·
몸으로 익힐 수 없으니 머리로 상상했다· 수많은 무공을 읽고 익히고 분석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을 때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 순간 그는 거추장스럽던 옛 육신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육신을 얻었다· 그가 얻은 깨달음에 비견될 만큼 강력해진 육신을· 그렇게 등유명은 새로이 태어났다·
반로환동을 한 후 등유명은 비약적인 무공의 상승을 이뤘다· 예전의 깨달음에 새로이 얻은 깨달음까지 더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그렇게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달했는지 밀야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짐작하는 자가 있다면 단 한 명 궁문휘 정도였다·
본래는 제자를 키우지 않으려 했던 등유명이었다· 하지만 궁문휘의 가공할 재능에 생각을 바꿔 직접 무공을 가르쳤다·
궁문휘의 무재는 실로 대단했다· 그는 마치 솜이 물을 흡수하듯 등유명의 가르침을 흡수했다· 그 때문에 오직 그만이 등유명의 무위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싶어서 세상에 나왔네· 가경의라는 천재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었으니 안심하고 있었지· 헌데 세상에 나오니 많은 것이 내 뜻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더군· 운중천과의 전쟁은 둘째 치고 북천문이라는 존재가 툭 튀어나왔네·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겁니까?”
“그렇다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북천문을 만들어낸 책사가 누군지 궁금했지· 천하의 가경의를 곤란하게 만든 북천문의 두뇌가 누군지 말이야·”
“저희 문주님보다 제가 더 궁금했단 말입니까?”
“물론 자네 문주도 궁금하다네· 하지만 자네가 더 궁금했다네· 단시간 안에 북천문의 기틀을 만들어낸 자라면 천하 경영에도 관심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우리 밀야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이니·”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겠군요?”
“그렇다네·”
등유명의 목소리가 나직이 가라앉았다· 아울러 일대의 공기도 착 가라앉았다· 그 한가운데 하진월이 존재했다·
“궁금하군요· 저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셨는지·”
“자네는 위험하다네·”
“제가 말입니까?”
“단순히 무공이 강한 자는 한 지역의 패자가 될 뿐이지만 제대로 된 군사를 가진 자는 천하를 제패하게 마련이지· 자네는 주군을 천하 정점에 올릴 재능을 가진 자야·”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야· 자네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북천문을 단시간 안에 이 정도로 만들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솔직히 가경의가 자네를 감당할 수 있을지 나도 의문이야·”
등유명의 눈빛이 서늘했다· 그 의미를 모를 하진월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나에게 살심을 품었구나·’
심복지환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자신이 표적이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진월의 등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곳엔 절진이 펼쳐져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발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절진을 발동시킨다고 할지라도 눈앞에 있는 괴물을 어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가 펼친 절진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지 규격을 벗어난 괴물 같은 존재를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내 실수다· 너무 안일했다·’
하진월은 후회했지만 때가 늦었다·
등유명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하진월을 압박했다·
“끄으!”
“소리를 질러도 상관없네· 하지만 어차피 밖에서는 듣지 못할 테니 소용없을 걸세·”
등유명의 미소가 더욱 차가워졌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하진월을 가리켰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하진월 따윈 손가락 하나 까닥이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다행일세· 자네란 묘목이 더 크기 전에 제거할 수 있어서·”
진심이었다· 이 이상 하진월이 성장하게 되면 밀야가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운중천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그 이상 많은 이들이 하진월의 손에 죽는 것은 막아야 했다·
비겁하다고 욕을 해도 상관없었다· 이 정도의 오물을 묻히는 것 따윈 그에게 별일 아니었다· 밀야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오욕도 감내할 수 있었고 지옥 같은 가시밭길이라도 걸어갈 수 있었다·
등유명이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게!”
“누구 마음대로 그를 보낸단 말입니까?”
그때 밤하늘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등유명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진월의 전신을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드니 그의 앞을 막아선 누군가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문주님·”
“괜찮습니까?”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입을 여는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방금 전 그는 북천문 내부에서 음습하면서도 포악한 기운을 느꼈다· 순간적이나마 진무원의 전신에 소름이 올라올 정도로 강력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진무원은 그렇게 느슨한 사람이 아니었다· 북천문 내에 변고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기운의 주체를 찾아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등유명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눈은 평범한 모습에 가려진 등유명의 진실된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물·
등유명을 처음 본 진무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만큼 등유명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엄청났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을 눈앞에 두고 보는 기분이었다· 적엽진인이나 마령제 현현소의 존재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등유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네는?”
“진무원 북천문의 문주입니다·”
“내 이름은 등유명이라네· 부끄럽지만 밀야의 야주라네·”
“본 문에 용건이 있으시면 대낮에 찾아오실 것이지 뭐하러 이 야밤에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들어오셨는지 모르겠군요·”
“도둑고양이라· 거 신랄하구먼 쩝!”
등유명은 변명 대신 넉살 좋은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그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무원이 하진월의 앞을 막아서기까지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황당한 것은 진무원을 눈앞에 두고도 그의 정확한 무력을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검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진무원의 모든 것이 모호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등유명도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몰래 온 것은 미안하군· 하나 일문의 주인 된 입장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네· 자네도 그래서 단천운이라는 이름으로 운중천과 밀야를 충돌시킨 것 아닌가?”
등유명이 웃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등유명의 담담한 말투 속에 숨겨진 거대한 살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등유명과 싸우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북천문이 피해를 입는 것이 문제였다· 북천문은 이제야 홀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직은 불완전해 다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등유명과의 싸움에서 기반이 파괴되면 다시 일어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등유명은 아직도 하진월에 대한 살의를 완전히 거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이 문제였다·
‘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진무원의 등 뒤에 숨은 하진월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진신 무력이 가늠이 되지 않아 영 껄끄러웠다· 단번에 그를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북천문의 본진이었다· 수많은 무인이 숨어 있는 용담호혈이었다· 그가 제아무리 천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절대고수라지만 그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때가 아닌 모양이군·’
등유명이 대신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대단해·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문파를 만들고 성장시킬 수 있다니· 문파라는 것이 대저 하루 이틀 안에 뚝딱 만들 수 있는 장난감도 아닌데 말이야·”
“운이 좋았습니다·”
“흠! 그런가? 부럽군! 그런 운이라면 나도 가지고 싶군· 혹시 빌려줄 수 있겠는가?”
“등 대협 정도의 무인에게 따로 운은 필요하지 않을 거라 봅니다만·”
“운중천의 괴물을 상대하려면 천운이 필요하지·”
“모용··· 율천을 말하는 겁니까?”
“그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흥!”
등유명이 콧방귀를 끼며 근처에 있던 정원석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후원을 뒤덮었던 등유명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등유명이 살의를 거둔 것이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에 앉지그래?”
등유명이 앞쪽에 있는 정원석을 가리켰다· 진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석에 앉았다·
밀야의 수뇌부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등유명은 결코 그 누구도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진무원을 자신의 앞에 앉혔다는 것은 자신과 동등한 무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등유명이 누군가를 자신의 앞에 앉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참! 예전에는 북벽이 버티고 있더니 이젠 아들이 대를 이어 밀야의 앞을 가로막으려고 하는군· 아주 지긋지긋한 인연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각오는 되어 있나?”
“어떤 것 같습니까?”
잠시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무원은 등유명의 눈 속에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머금은 거대 폭풍을 보았고 등유명은 진무원의 눈에 담긴 고요한 바다를 보았다·
“큿!”
등유명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