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 5장 들어오는 자는 많아도 실속이 있는 자는 드물다 (3)
아직도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하지만 담수천은 느낄 수 있었다· 바람 속에 담긴 미약한 온기를· 봄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담수천은 인근 산에 올라 부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흰 눈이 부현 전체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지만 전쟁의 상흔까지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다· 그 덕에 밀야와의 전쟁도 멈추고 알찬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담수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날이 추운데 무엇하러 올라왔소?”
“당신을 보러 왔어요·”
담수천이 뒤돌아보자 부쩍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서문혜령이 보였다·
“몸은 괜찮소?”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찬바람을 오래 쐬는 것은 좋지 않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수천·”
서문혜령이 담수천을 향해 다가왔다·
지난겨울 서문혜령은 혹독하게 앓았다· 조부를 잃은 슬픔과 함께 진무원에게 농락당했다는 패배감이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몰랐다· 만일 담수천의 살뜰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그녀의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더 깊어져 있었고 말수 또한 현격하게 줄었다· 그런 서문혜령의 모습에 담수천이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녀는 서문화를 잃은 상실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넘고 싶어 했던 조부였던 만큼 그를 잃은 슬픔은 너무나 깊었다·
서문혜령은 슬픔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밤낮을 잊고 일에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하지만 담수천은 서문혜령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부현 지부는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견고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드디어 운중천에서 회신이 왔어요·”
“그렇소?”
“결과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하오·”
“지금 말해줄까요?”
“아니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듣겠소·”
“그럼 회의장으로 가죠·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소·”
담수천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문혜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부현 지부로 돌아왔다·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부현 지부는 겨우내 수리를 해서 제 모습을 찾았다· 아직 바람이 차가운데도 불구하고 연무장에는 많은 무인들이 연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분분히 인사를 해왔다·
담수천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극진했다· 담수천이 부현 지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증거였다· 이제 부현 지부에 있는 사람들은 담수천을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서문혜령이 겨우내 한 일 중에는 사람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작업도 있었다· 그 결과 부현 지부는 북천문 못지않은 단일 조직으로 거듭났다·
대전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이가 담수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수천이 들어서자 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대전 안을 울렸다·
문주(門主) 일문의 수장을 말함이었다· 자신의 세력을 가지지 못한 자가 들을 말이 아니었다· 담수천은 그들이 부르는 호칭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작년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진무원에게 서문화와 척마대를 잃은 일이었다· 이제까지 담수천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해 온 전력 중 반이 날아간 셈이었다·
이 사건으로 담수천은 큰 타격을 받았다· 만일 곁에 서문혜령이 없었다면 그도 큰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서문혜령은 무서울 정도의 추진력으로 사태를 하나씩 수습해 나갔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쓸 만한 인재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인원을 선발하고 담수천에게 천거했다· 담수천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받아들인 무인들 중에는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이들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담수천의 강함과 인망에 끌려 기꺼이 수하가 되길 자처했다· 개중에는 운중천에 실망해서 담수천의 수하가 되길 원한 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이가 부현 지부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담수천을 중심으로 결속했다· 그 결과 담수천은 부현 지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복속시킬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무인들은 부현 지부라고 부르지 않고 창천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스스로를 창천문도라고 칭했다· 담수천의 별호인 창천무제에서 따온 것이다·
담수천의 오롯한 존재감에 이끌린 이들이 그의 힘이 되었다· 서문혜령은 그렇게 담수천에게 끌린 이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창천문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모두가 담수천과 서문혜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수천이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문주님·”
무인들이 대답과 함께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담수천까지 자리에 앉자 서문혜령이 모두 앞으로 나섰다·
“운중천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다·”
“으음!”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지난겨울 담수천이 부현 지부에 창천문을 개파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만류했다· 운중천이 자신들의 지부를 선뜻 내줄 이유도 없을뿐더러 전력을 깎아먹는 짓을 허락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운중천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운중천이 자신들의 지부를 창천문에 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안 좋은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안색은 어두웠다· 반대로 담수천의 표정은 담담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의 주목 속에 마침내 서문혜령이 입을 열었다·
“운중천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뭐라구요?”
“정말입니까?”
서문혜령의 말에 장내가 순식간에 시장 통처럼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서문혜령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진짜예요· 운중천에서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이곳 부현 지부를 창천문이라는 독립 문파로 인정하겠다고 전해왔어요·”
“그럴 수가!”
“이제 이곳은 운중천의 부현 지부가 아니라 창천문입니다·”
서문혜령의 선언에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문주님 창천문의 출범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작 담수천은 별반 감흥이 없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사실 운중천에 창천문의 출범을 정식으로 허락받자고 주장한 사람은 서문혜령이었다· 그녀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운중천이 창천문의 출범을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북천문이었다·
사천성 면양에 북천문이 들어서면서 운중천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밀야와 북천문의 합공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운중천에서 북천문을 먼저 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대의명분이 약했다· 중원인들이 예전의 북천문이 운중천의 과오 때문에 멸문당한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모험을 하는 것은 위험했다·
둘째 이유는 바로 서문혜령이 진무원과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서문화가 진무원의 손에 목숨을 잃으면서 서문혜령과는 불공지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서문혜령과 담수천의 관계를 아는 운중천으로서는 이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마지막 이유는 바로 담수천이라는 걸출한 무인 때문이었다·
창천무제라는 별호를 얻었을 만큼 뛰어난 무공을 지닌 담수천이었다· 그가 오무존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는 지금 무작정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칫 그의 심기가 상해 적으로 돌아서거나 북천문의 편에 서면 진무원보다 더한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무엇보다 운중천에는 진무원에 비견될 대항마가 필요했다· 오무존처럼 나이가 들고 옛 시대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 아니라 참신한 얼굴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정치적인 요건이 반영되었지만 결론은 담수천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모두 걱정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운중천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안심하고 이제부터는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창천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체제가 정비되어야 합니다·”
“저····”
그때 중년의 무인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흥분으로 들뜬 표정이었지만 유독 그만 침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창천문이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윤 모는 기대보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을 우려하는 건가요?”
“이제 겨울이 끝나갑니다· 눈이 녹으면 저들의 대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겁니다· 저희가 창천문으로 출범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운중천의 도움 없이 밀야를 상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중년 무인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창천문의 출범을 허락받았다는 생각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밀야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최전선이었다· 창천문 홀로 밀야를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밀야는 결코 쉽게 준동하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요·”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믿어도 좋아요·”
서문혜령이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 ☆ ☆
“그러니까 부현 지부가 창천문이 되었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흠!”
궁상화의 보고에 가경의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리 언질을 주더니 결국은 허락을 받아내었나 보군· 정말 대단하구나· 운중천을 상대로 기어이 자신의 뜻을 이루다니·’
그는 서문혜령이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진무원의 손에 조부를 잃은 그녀는 독이 잔뜩 오른 독사 같았다·
그날 만든 인연의 끈은 지금까지 미약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서로가 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필요에 의해 연락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은 갖고 있었다·
궁상화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운중천과 별개의 문파로 독립한 지금이 절호의 기횝니다· 지금 공격하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겠죠·”
“그럼 허락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창천문은 당분간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궁상화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창천문이 온전히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저희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창천문은 분란의 씨앗입니다· 그들의 존재가 운중천 내부를 분열시킬 겁니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으음!”
그제야 궁상화도 가경의의 말을 이해해고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 역시 머리가 무척이나 뛰어나고 전술에 정통한 편이었지만 대국을 바라보는 폭 넓은 시야는 가경의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도 없으니 운중천의 다른 지부를 공격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필경 운중천 내부에서도 창천문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할 겁니다·”
“역시! 알겠습니다·”
궁상화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 가경의의 처소를 지키는 무인이 말했다·
“군사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누구더냐?”
“그게····”
무인이 설명하기 난감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를 안으로 들이거라·”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가경의가 명령을 내렸다·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육척 장신에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한 체형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싱글싱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의 등장에 가경의와 궁상화가 동시에 눈을 크게 치떴다·
“문휘!”
“하하!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이름은 궁문휘 밀야 제일의 기재이자 희망이라 불리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