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3장 젊은 용들은 새로운 하늘을 꿈꾼다 (3)
은한설은 눈을 감은 채 내공을 운용하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완벽해·’
내상은 완벽하게 나았고 혈도도 막히는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타동되어 있었다· 내공이 거칠 것 없이 전신의 혈도를 치달아 순식간에 일주천을 끝냈다·
지난 몇 달 동안 치료에 전념한 결과이다· 그때보다 오히려 내공은 더 증진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몸 상태가 완벽하다는 것은 이제 그녀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사부가 올 거야·’
사부가 오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게 진무원을 위해서도 좋았다· 사부가 있는 곳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기에·
은한설은 운공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북천문에 머물 날이 머지않았다· 그전에 북천문의 전경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래도 자신이 몇 달 동안이나 신세를 진 곳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은한설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문혜령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서문혜령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은 소저·”
“····”
은한설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문혜령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진 공자에게 가시는 건가요?”
“····”
은한설이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원래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제가 무례했나 보네요· 미안해요· 원래 한번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절대 참지 못해서····”
은한설의 대답에 서문혜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서문혜령의 모습에 은한설은 더 이상 퉁명스럽게 대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초대를 하려구요·”
“초대?”
“사흘 후 꼭 휘영전에 와주셨으면 해서요·”
“휘영전?”
“예! 꼭 진 공자와 함께 오세요· 진 공자에게도 직접 전하려고 했는데 요즘 통 밖으로 나오지 않으셔서요·”
“무슨 일인데?”
“오시면 알게 될 거에요·”
서문혜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은 소저나 진 공자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보장해요· 그러니까 꼭 와주세요· 부탁이에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은한설은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에 서문혜령이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 ☆ ☆
심원의가 데려온 하인들이 휘영전(輝瑛殿)을 보수했다·
휘영전은 북천문이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지어진 거대한 전각으로 주로 귀빈들이 왔을 때 연회를 열던 곳이다· 그만큼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곳이지만 지금은 기둥과 지붕만 남아 폐허나 다름없었다·
하인들은 휘영전 안의 잔해를 치운 후 그나마 멀쩡한 목재를 재활용해 임시로 외벽을 세웠다· 휘영전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하인들은 안에다 탁자와 의자를 들여놓은 후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인분의 음식이 차려지고 향긋한 냄새가 북천문 안에 퍼져 나갔다·
진무원은 만영탑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의 의사 따윈 아무 상관 없다는 뜻이군·’
비록 몰락했다고 하지만 북천문의 문주는 진무원이다· 당연히 북천문 안의 시설을 이용하려면 진무원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심원의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는 마치 진무원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나마 담수천이 뒤늦게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지 않았다면 진무원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을지도 몰랐다·
‘북천문의 조사들과 내 아버지가 지켜온 대지를 저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린하고 있다·’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벌써 그 옛날의 공포스럽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얼마나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지 잊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기억을 왜곡하고 그 뜻마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뜻있는 자들은 억압을 받고 야합을 한 배덕자들이 지배하는 세상· 그것이 현재 진무원이 살아가는 강호였다·
‘배덕자의 강호 그 안에서 무슨 꿈을 꾸는 것인가 담수천?’
진무원은 담수천의 눈에 담겨 있는 거대한 야망을 읽었다· 그 야망의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저 그런 산들바람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란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서문혜령이 은한설과 그를 초대한 날이다· 은한설도 그랬지만 진무원도 서문혜령의 초청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에게 소망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들 일행이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시오·”
진무원의 허락이 떨어지자 심원의의 하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진무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진 공자님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휘영전으로 들어오시랍니다·”
“금방 가겠소·”
“그럼····”
하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내키진 않았지만 가봐야 했다· 진무원은 개중 가장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휘영전으로 향했다·
휘영전으로 향하던 진무원이 만영벽 앞에서 멈춰 섰다· 백여 년 동안 굳건히 버텨온 만영벽은 수명이 다된 것처럼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역할을 다 끝내기라도 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진무원은 손을 뻗어 만영벽을 어루만졌다·
‘무너지는 널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날 용서하거라· 하지만 약속하마· 북천문의 명예를 되찾는 날 반드시 너를 다시 세우리라·’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진무원은 만영벽을 지나 휘영전 앞에 도착했다·
휘영전 밖에는 전호대의 무인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비장한 분위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전호대주 목운평이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혈우검이라는 별호답게 목운평은 살벌한 기세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진무원이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외당무인들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들은 모두 북천문 외곽에 배치했습니다·”
중원과 동떨어져 있는 북천문이다· 별다른 위협 요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굳이 외당무인들로 외곽 경계를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심원의가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음!”
진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휘영전 안으로 들어갔다·
휘영전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제단이 눈에 띄었다· 제단에는 커다란 향로를 중심으로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세 개의 의자에는 화려한 의복을 입은 심원의 서문혜령 담수천이 앉아 있었다· 심수아는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따로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진무원이 들어서자 담수천이 대표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시오 진 문주·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하오·”
“무슨 일입니까? 잔치라도 벌이려는 겁니까?”
“잔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요·”
담수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에 진무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의 넘치는 자신감이 왠지 거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은 소저까지 오면 차분히 말씀드릴 테니 일단 자리에 앉아 준비한 음식을 즐기시구려·”
담수천이 제단 옆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진무원이 자리에 앉자 서문혜령이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했고 심원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가?’
단순히 잔치를 벌이려고 향로까지 준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무원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휘영전 안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은한설이 목운평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이번에는 서문혜령이 은한설을 맞았다· 서문혜령은 미소를 지으며 은한설을 진무원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은한설이 옆자리에 앉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은한설의 머리에 자신이 만들어준 장신구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모인 것 같군· 이제 시작하지·”
심원의의 말에 담수천과 서문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수천이 진무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허락도 없이 휘영전을 보수하고 멋대로 초대한 점 사과하겠소· 하나 우리로서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 이 점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흠!”
진무원이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듯이 바라보자 서문혜령이 나섰다·
“오늘 저희는 두 분을 공증인으로 모셨어요·”
“공증인?”
“저희는 창룡회(蒼龍會)를 출범하려고 해요·”
“····”
“젊은 무인들의 순수 의사 결정 기구예요· 저희는 뜻있는 젊은 무인들을 모아서 운중천에 전달하려고 해요· 시작은 저희 세 명이 하지만 이미 많은 젊은 무인이 저희하고 뜻을 함께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하필 북천문에서 출범하려는 건가요?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진 단체라면 중원에서 성대하게 해도 좋을 텐데·”
“기존의 노강호들은 젊은 무인들이 무리를 짓는 것을 그리 좋지 않게 생각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이들이 중원에서 창룡회가 조직되는 것을 좋아할까요?”
“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요?”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담수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평소 북천문을 흠모해 왔소· 백 년 동안 밀야와 투쟁해 온 북천문의 역사는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그래서 꼭 이곳에서 시작하고 싶었소·”
“그 말은 곧 북천문의 유지를 잇고 싶다는 뜻입니까?”
진무원의 물음에 담수천이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얼버무리는 것 같기도 한 보는 이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그런 미소였다·
“오늘 우리는 하늘에 창룡들이 뜻을 함께함을 천명하려 하오· 부디 진 문주께서 천지신명 앞에서 우리가 뜻을 모으는 것을 지켜보고 공증을 서주시길 이 담 모가 정중히 요청하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진무원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창룡회가 출범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이 두 눈에 똑똑히 담아두겠습니다·”
“고맙소 진 문주·”
담수천이 씨익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가자 서문혜령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진무원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창룡회·’
왠지 입안의 모래처럼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진무원의 마음을 읽었는지 옆에서 은한설이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진무원과 은한설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진무원은 이성을 되찾았다·
‘북천문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고 이들에겐 그저 운중천의 눈을 피해 자신들의 뜻을 모을 공간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제야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모호하던 부분들이 선명히 보였다·
‘나와 한설이 공증을 선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떠들 수도 없는 일· 결국 그렇게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뜻이군·’
진무원은 심원의를 바라봤다·
담수천이 꾸몄다고 보기엔 너무나 세밀했다· 여성인 서문혜령과도 성향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심원의 하나뿐이다·
‘심원의 자신은 나서지 않고 담수천을 앞세울 셈인가?’
정황상 담수천이 창룡회의 회주를 맡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실력 그리고 가슴속에 품고 있는 야망의 크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진무원과 심원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무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심원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는 잠시 진무원을 바라보다가 제단 위로 올라가 미리 준비한 축문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의를 수호하고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모임을 창룡회라 정하고 뜻을 한데 모을 것을 맹세합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창룡들의 앞날에 큰 축복을 내려주시고 앞길을 밝혀주십시오·”
심원의가 축문을 읽는 내내 경건한 분위기가 휘영전을 지배했다·
심원의는 창룡회의 회주로 담수천을 지목하며 하늘을 향해 예를 올리게 했다·
담수천은 향에 불을 붙인 후 하늘에 절을 올리며 자신이 창룡회주가 되었음을 천명했다· 뒤이어 서문혜령이 절을 올렸다·
창룡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문득 진무원이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반대쪽에 앉아 있는 심수아가 진무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무원과 은한설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