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 3장 새로운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온다 (3)
운중천 가장 깊은 곳에 화운각(華雲閣)이라는 정자가 있다·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연못 한가운데 만들어진 화운각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했다·
밖은 초겨울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이곳 화운각 주위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가득 피어 있었다· 그만큼 운중천에서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관리하는 곳이었다·
화운각에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하연 수염의 승려 붉은 전포를 입은 매부리코의 노인 마지막으로 칠 척의 거구에 엄청난 패기를 흘리는 장년인까지· 하나같이 가공할 존재감을 풍기는 이들은 바로 운중천에 입성한 오무존 중 세 명이었다·
불영신승 심무외 그리고 담적심·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들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아미타불!”
불영신승이 눈을 내리깐 채 손에 든 염주를 연신 굴렸다· 담적심은 그런 불영신승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봤다·
침묵을 제일 먼저 깬 이는 바로 심무외였다·
“이렇게 모인 것이 삼 년 만인가? 길지 않은 시간인데 많은 것이 변했군·”
“그새 네 명 아니 다섯 명이 빠졌으니·”
대답을 하는 담적심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아홉 하늘이 회동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중 네 명이 죽거나 은퇴했고 한 명은 행방조차 알지 못한다· 전설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회동이었다·
“초라하군· 하늘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야·”
“아미타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소이다·”
“당연한 결과?”
“행한 만큼 받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 그동안 우리는 누린 것이 너무 많았소·”
“그러니까 인과응보란 말인가? 개떡 같은 소리만 하는군 땡중· 다른 사람은 몰라도 땡중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나?”
담적심의 신랄한 음성이 불영신승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영신승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의 머릿속엔 오직 번뇌만이 가득했다·
불영신승이 계인을 받을 때까지의 소림사는 세속의 일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속가제자를 통한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본산만큼은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불영신승이 소림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세속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소림사에서는 불영신승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소림을 등에 업은 불영신승은 세속의 일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젊은 시절의 불영신승은 누구보다 패기가 만만했고 야망도 커서 승려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의 불영신승은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야 가랴’라는 심정으로 악을 처단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그에겐 패도승(覇道僧)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호가 붙었었다·
패도승이라는 별호로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악을 처단함으로써 소림의 명예를 드높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 모용율천을 만났다·
젊은 시절의 모용율천은 누구보다 패기가 만만했다· 그는 불영신승을 자극했다· 결국 불영신승은 모용율천의 도발에 넘어가 승부를 겨뤘다·
결과는 그의 무참한 패배였다· 소림사의 수많은 절학을 대성해 천하에 당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패배는 큰 충격을 다가왔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당시 불영신승이 모용율천에게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이 그랬다·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기에 불영신승은 모용율천과 손을 잡았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인생 최악의 결정이 되어버렸다·
그 후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모용율천과 함께했다· 운중천이 세를 확장할 때도 북천문을 해체할 때도 그는 함께했다· 그때는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힘이 있는 자가 역사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지몽매한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삼 년 전 그날까지는 말이다·
모용율천을 제외하고 그가 가장 위협을 느꼈던 존재가 바로 진무원의 아비인 진관호였다·
북벽 진관호는 그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행동력· 그리고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선 절대 물러서지 않는 무모함까지·
그런 진관호의 모습이 불영신승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냉철한 이성과 달리 그의 두뇌는 마치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뜨거워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용율천의 의견에 동조했다· 북천문에 대한 지원을 끊고 밀야와 내통했다는 증거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진관호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문도 없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자신만의 정의감에 취해 세상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별거 아닌 조그만 깨달음· 불영신승은 그로 인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상황을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심마(心魔) 그것은 분명 심마였다·’
불문의 무공과 심법을 익힌 불영신승이 심마에 빠진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불문의 무공은 세상의 그 어떤 무공보다 마음의 공부를 단단히 하기에·
불영신승은 오랜 참오 끝에 그 이유를 알아냈다·
‘모용율천은 처음 만난 그 순간 나에게 심마의 씨앗을 던져 주었다·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숨겨진 나의 욕망을 파악하고 살살 어루만졌지·’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섭도록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단지 몇 마디 말로 불영신승과 같은 고승의 머릿속에 잠재한 욕망을 끌어내어 자신과 동조하게 만들었다· 보통의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불영신승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그의 심기는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심마를 깨고 나온 불영신승은 또다시 번뇌에 휩싸였다· 모용율천이 만든 지옥 같은 세상에 자신 또한 발을 담갔다· 아니 그에 일조해서 더욱 지옥처럼 변모시켰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죽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지만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옥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면 수습도 해야 했다·
불영신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담적심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고개를 드니 담적심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눈빛에 불영신승의 가슴까지 덩달아 서늘해질 정도였다·
“아미타불! 아무 것도 아니오·”
“그러고 보니 눈빛이 변한 것 같군· 예전에는 꽤나 혼탁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미타불!”
“흠!”
담적심의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처음으로 떠올랐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인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변했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소·”
“축하한다 땡중·”
“무얼 말이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물어보는 악취미도 있군·”
담적심이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불영신승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미망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화운각의 다리를 통해 누군가 걸어왔다·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다리를 향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모용율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그가 세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불영신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전신의 혈액이 평소보다 몇 배나 빨리 혈관 속을 치달았다· 세상이 온통 붉게 보이는 것 같았다·
모용율천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심마에서 깨어났어도 자신은 결코 그를 벗어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아미타불!”
“모두 오랜만이군·”
모용율천이 빙그레 웃으며 비어 있는 상석에 앉았다· 무적세가 내에서 입는 용포를 벗어던지고 푸른색 전포를 걸친 그의 모습은 무척이 청수해 보였다·
겉모습만 보고서는 누구도 그가 당금 강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사실을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세 명의 절대무인들은 그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담적심이나 심무외 모두 예전에 모용율천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결과는 그들의 참패였다· 그 후 와신상담하면 몇 번이나 재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후 그들은 모용율천에게 도전하는 것을 멈추고 그와 뜻을 함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마음속에 잠재한 투쟁심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모용율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은 하지 않았나 모르겠군·”
“강호에 큰 변화가 일고 있는데 그 정도의 수고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소·”
대답을 한 이는 심무외였다·
순간 모용율천의 눈이 반달형으로 휘어졌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그런 순간이 도래한 모양이야· 불행히도!”
모용율천의 말속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용율천의 시선이 심무외를 향했다·
“아들이 죽었다고 들었네·”
“크윽!”
“전도가 유망하던 청년이었는데 안타깝군· 척마대와 대주를 잃은 것은 운중천에도 큰 손해일세· 애도를 표하네·”
“흰소리는 그만하시오· 겨우 그런 소리를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
“물론일세·”
심무외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모용율천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는 담적심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그 때문이오?”
“그?”
“북검 말이오·”
“물론 ‘그’도 포함되지· 하지만 그것은 겨우 일부분에 불과하다네· 우린 조금 더 포괄적인 상황을 의논해야 할 필요가 있네·”
“포괄적인 상황?”
“그렇다네· 이를테면 당금 강호의 판을 새로이 짜는 일 말일세·”
“으음!”
담적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짐작은 했지만 막상 모용율천의 입을 통해 대답을 들으니 느껴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아직 밀야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소· 그런데 벌써 새롭게 판을 짠단 말이오? 무리요·”
“알고 있네·”
“그런데 왜?”
“밀야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 하면 늦기 때문이지·”
“음!”
“북벽의 후예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네· 그의 명성은 이미 이곳에 모인 우리를 능가하고 있지· 다들 알고 있을 거네· 강호에서의 명성은 곧 힘이라는 것을·”
명성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모여 힘이 된다· 그렇게 문파는 탄생하고 성장해 간다· 한 지역에 자리를 잡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는 확장 일로를 걷게 마련이다·
“분명 그 역시 어느 곳에선가 자신만의 문파를 키우고 있을 걸세·”
“그럼?”
“그래! 북천문· 제이의 북천문이 어느 곳에선가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을 거야·”
모용율천의 발언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담적심과 심무외가 숨을 죽였다· 불영신승은 눈을 감고 연신 ‘아미타불’만 외웠다·
“문제는 그만이 아닐세·”
“또 무슨 문제가 있소?”
“담수천·”
“수천?”
이번에는 담적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 아이도 요주의 인물일세· 창룡검제 비사원을 그 아이가 은퇴시켰다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걸세· 무엇보다 그 아이가 재밌는 제안을 해왔네·”
“무슨?”
“읽어보겠나?”
모용율천이 품속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담적심에게 건네주었다· 무심코 서신을 읽던 담적심의 표정이 변했다· 그만큼 서신에 적힌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정말 재밌는 제안이 아닌가?”
“····”
“아들 하나는 정말 잘 키웠네· 호부에 견자 없다더니· 맹룡을 키워냈어· 정말 부러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이제는 맹룡에게 날개를 달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모용율천의 말에 담적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창천무제 담수천은 그의 셋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자식이라곤 해도 그와는 사이가 무척이나 요원했다·
담수천은 첫째 둘째 아들과 달리 후처의 자식이었다· 담적심은 담수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후계자가 될 첫째 둘째에게만 온 신경을 썼다· 그사이 담수천은 밖으로 나돌았다·
지금 그의 명성 무력은 오롯이 그 혼자서 이뤄낸 것이다· 거기에 담적심이 개입할 여지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자식이면서도 어렵기 그지없는 존재가 되었다·
모용율천의 시선이 이번에는 불영신승을 향했다·
“그간 소림사도 너무 오래 쉬지 않았는가?”
“무슨?”
“듣기엔 새로이 뽑힌 백팔나한들이 무척이나 쓸 만하다던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당금 강호의 판을 새로이 짜야 한다고·”
“그런?”
“벌써 장강의 뒤 물결에 밀리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모용율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불영신승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모용율천의 속삭임이 그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심마의 불씨를 다시 태우고 있었다·
“분명 제이의 북천문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을 걸세· 우리는 그 씨를 말려야 하네·”
“하나 밀야와 전쟁 중이지 않습니까? 운중천에서도 따로 전력을 빼돌릴 만큼 넉넉지가 않습니다·”
“후후!”
모용율천이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불영신승 심무외 담적심이 긴장을 했다· 그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모용율천의 말이 이어졌다·
“단순히 운중천의 전력만 따지자면 그렇겠지? 하나 운중천이 우리의 진짜 전력은 아니지 않은가?”
“그 말은····”
“각각 숨겨놓은 전력 조금씩만 내놓으시게· 본 가에서도 북천문이 확인되는 대로 천독전(天毒殿)을 내놓을 테니·”
순간 모두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불영신승이 물었다·
“아미타불! 천하를 피로 물들일 작정이시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은가?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거니까·”
모용율천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