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 3장 새로운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온다 (2)
진무원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운중천은 그런 진무원을 잡기 위해 수많은 무인들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진무원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운중천의 무인들은 허탈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을 놓친 운중천은 수하들의 입단속에 들어갔다· 최대한 진무원의 생존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천라지망을 펼치는 데 동원된 무인들의 수만 수천 명이 넘었다· 그들의 입을 모두 단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입을 통해 진무원의 생존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삼 년 전 죽었다고 알려진 진무원이 살아 있다·
그의 손에 마령제 현현소와 귀제갈 서문화가 목숨을 잃었다·
소문의 시작은 미풍에 불과했지만 금방 거대한 폭풍이 되어 중원 전역을 휩쓸었다·
죽었다고 알려진 그에게 아홉 하늘의 둘 아니 살천랑이라는 이명(異名)으로 적엽진인까지 죽였다는 소문은 중원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강호는 큰 충격에 빠졌다· 어찌나 충격이 큰지 밀야와 운중천의 휴전이 더 길어졌을 정도였다·
소문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중원 전역을 휩쓸었다· 이제까지 밀야와 운중천의 전쟁에만 쏠려 있던 시선이 진무원의 행방을 찾는 데 집중됐다· 하지만 어디서도 진무원을 보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진무원의 재등장으로 곤란해진 곳은 바로 운중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천문의 멸문이 운중천의 오해와 공작 때문이란 것이 알려진 상황에서 진무원의 재등장은 꺼져 가던 분란의 불씨를 재점화시켰다·
더군다나 운중천에서 진무원을 죽이기 위해 천라지망을 펼쳤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그들에 대한 비난은 극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밀야와의 전쟁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끝이 없는 전쟁이 지쳐 있었고 전쟁을 승리로 끝내지 못하는 운중천에 많은 실망을 한 상태였다·
심신이 피폐해져 있던 많은 무인들이 그런 운중천에 실망을 하여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많은 이들이 빠져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운중천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상황은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탈하는 자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결국 운중천의 전력 중 무려 이 할이나 되는 무인들이 빠져나갔다· 밀야와의 전쟁을 한참 수행하고 있던 운중천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타격이었다·
물론 운중천의 주축이 되는 구대문파나 명문대파들은 여전히 든든히 중심을 잡고 있었지만 많은 무인의 이탈은 운중천 내의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은 운중천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아홉 하늘 중 셋이 진무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전설이 그것도 셋이나 진무원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 어떤 사태보다 심각했다· 거기에 창룡검제 비사원마저 담수천에게 강제로 은퇴를 당하면서 그들의 명성이 크게 깎였다·
이제 사람들은 아홉 하늘을 예전처럼 절대 넘볼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사람이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설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그 위치가 격하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아홉 하늘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남은 다섯 명을 오무존(五武尊)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홍옥마수(紅玉魔手) 심무외·
불수불언(不手不言) 담적심·
무적수사(無敵修士) 모용율천·
소림사의 불영신승(佛影神僧)·
풍운번주(風雲旛主) 능군휘·
이들 중 풍운번주 능군휘의 행방이 묘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무존의 일원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오무존이 기존의 강호를 대표한다면 북검 진무원과 창천무제 담수천은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선두주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일검(一劍) 일제(一帝)라 불렀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무력으로 아홉 하늘 중 네 명을 쓰러뜨린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일검일제가 오무존보다 훨씬 더 윗길의 무인이라 떠들었다·
그렇게 강호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운 무인들의 태동은 기존의 질서를 크게 흔들었다· 이제까지 강호를 공고히 지배하고 있던 질서와 규율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운중천은 밀야와의 전쟁을 이어나가는 데 상당한 부담감을 안게 되었다· 내적으로는 전력의 이 할이 이탈했고 외적으로는 진무원이라는 거대한 위협이 등장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운중천과 밀야의 격돌은 눈에 띄게 줄었다·
밀야 역시 전력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계속된 전쟁으로 사대마장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대마장의 죽음은 여타 무인들을 잃은 것에 비할 바가 없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각각의 사정으로 전쟁은 그렇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정비를 끝내는 순간 전쟁은 다시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전력의 이 할이 빠져나갔지만 운중천에는 여전히 많은 무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빠져나간 여파 때문인지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는 것인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무인들이 운중천 곳곳에서 보였다· 주요 조직들을 장악한 살벌한 분위기의 무인들은 바로 무적세가에서 파견 나온 이들이었다·
무적세가의 무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른 속도로 운중천의 요직들을 장악했다· 그 때문에 운중천의 많은 무인들이 한직으로 밀려났지만 누구 한 명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그만큼 무적세가 무인들의 위세는 엄청났다·
운중천의 정문에 수백여 명의 무인이 도열해 있었다· 그 중심에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서른여섯 명의 검수들을 대동한 채 서 있었다·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명검을 연상시키는 남자의 이름은 모용현이었다· 무적수사 모용율천의 손자이자 무적세가의 소가주가 바로 그였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검객들은 무적삼십육검수(無敵三十六劍秀) 무적세가에서 키워낸 절정의 검객들이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와 사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공할 존재감에 운중천의 무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모용현을 비롯한 무적세가의 무인들이 운중천을 장악한 이후 일어난 일이었다·
모용현의 입가엔 한 줄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미소 하나 손짓 하나에도 엄청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절대자의 교육을 받아온 모용현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조부 모용율천에게 벌모세수를 받았다· 삼 개월이 되기도 전에 소림사에서 보내온 대라환단을 복용해 내공이 일 갑자를 넘어섰다·
그 후로도 각종 영약을 밥처럼 먹어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내공을 열 살이 되기 전에 이뤘다· 걸음마를 시작하고부터는 무적세가의 수많은 절기들을 익혔다·
여타 문파의 제자들 같으면 무공을 익히는 데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일대제자 이대제자 등의 등급에 따라 익히는 무공의 종류가 달라지고 익힌 바 수준에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갈 무공이 결정되었으니까·
하지만 모용현에겐 그런 걱정이 필요 없었다· 고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무적세가의 역사 수백 년 그동안 수많은 무공절기들이 수집되거나 창안되었다·
오랜 역사는 곧 무공의 검증을 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익혀보고 가장 부작용이 없이 빠른 속도로 다음 단계로 건너뛸 수 있는 무공들의 조합이 만들어졌다·
모용현은 그렇게 확실히 검증된 방법을 통해 무공을 익혔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무적세가 내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닌 이가 조언을 하거나 가르쳐 줬다· 바로 조부인 모용율천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재능 또한 범상치 않았다· 무공의 기재들만 나온다는 무적세가 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자랑했다·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천재가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선생을 만났으니 그 성취가 상상을 초월했다· 열다섯 나이에 이미 절정의 경지를 돌파하고 열여덟에 초절정의 벽을 넘었으니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성취였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실제 그의 나이는 서른 중반· 가공할 내공 덕에 육신이 언제부턴가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난 것이다·
모용현은 이십 대 초반부터 세상에 나와 무명을 날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음지에서 세상을 지배한다는 가문의 방침과 조부의 명령 때문에 애써 존재감을 죽이고 살아왔다·
그 때문에 그는 늘 세상 밖으로 나와 무명을 날리고 싶은 갈망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갖고 있으면 무얼 하는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데·
하지만 가문의 방침을 어길 수 없기에 지난 세월 꾹꾹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올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그가 느끼는 해방감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군마대를 처치한 후 그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 자신감은 그의 온몸을 통해 표출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발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그래! 이 세상은 나 모용현을 위해 존재한다· 이제부터는 이 모용현의 시대가 될 것이다·’
모용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운중천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모용현의 낯빛이 굳었다· 마차 안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존재감 때문이다· 그 순간 도열해 있던 무인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소림사에서 나온 마차다·”
마차에는 그 어떤 표식도 없었지만 그는 마차가 소림에서 나왔다고 확신했다· 마차를 모는 이가 바로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민 승려였기 때문이다· 마차를 모는 승려의 머리에는 여섯 개의 계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마에 찍힌 계인은 소림사의 승려를 의미했다· 다른 절에서도 계인을 찍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 바로 소림사였다· 특히 운중천에 마차를 자유롭게 타고 들어올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은 곳은 소림사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림에서 나온 마차라고 짐작한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던 마차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용현의 앞에 멈춰 섰다·
마차 안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모용현이 포권을 취했다·
“무적세가의 모용현입니다· 소림사에서 나오셨습니까?”
“아미타불! 소림에서 나온 설천입니다·”
마부석에 앉은 승려가 반장을 하며 대답했다· 그에 모용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럼 마차 안에는?”
순간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한 노승이 얼굴을 드러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눈썹과 수염까지 온통 하얬다· 축 처진 주름살 아래 마치 어린아이 같은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수많은 승려가 존재했지만 이렇게 명확한 특징을 가진 승려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모용현이 노승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무적세가의 모용현이 소림의 신승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못 본 사이 헌앙한 장부가 되었구나·”
“부끄럽습니다 신승!”
누구보다 오만한 모용현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노승에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불영신승(佛影神僧) 소림이 배출한 최강의 무인이자 아홉 하늘의 반열에 올라 있는 그였다· 비록 지금은 오무존으로 격하되었지만 그의 위엄과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대단했다·
삼 년 전 운중천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 세속에서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그 후로 불영신승은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소림사에서만 은거했다· 그런 그가 운중천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 자체가 일대 사건이었다·
“조부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우리 이야기는 차후 한가할 때 하자꾸나·”
“머무시는 동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불영신승이 불호를 외며 마차의 문을 닫았다· 그러자 모용현과 무적삼십육수가 길 한쪽으로 물러섰다· 길이 열리자 설천이 마차를 몰아 운중천으로 들어갔다·
모용현은 불영신승을 태운 마차가 운중천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때 또다시 입구 쪽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모용현의 시선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운중천을 향해 다가오는 말 한 필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흑마의 위에는 붉은 전포를 입은 매부리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등장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노인의 몸에서는 그야말로 사위를 압도하는 가공할 존재감과 기도가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혼자서 운중천의 정문에 도열해 있는 수많은 무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모용현이 앞으로 나아갔다·
“무적세가의 모용현이 사사천의 천주 심무외 대협을 뵙습니다· 운중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이구나· 오랜만에 봐서 못 알아볼 뻔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래! 운중천에 왔을 때 잠깐 보았으니 한 삼 년만이지 싶구나·”
“맞습니다 숙부님·”
“그새 헌앙한 대장부가 되었구나·”
심무외가 미소를 지었다·
사적으로는 심무외를 숙부라고 부르는 모용현이었다· 심무외 역시 모용현을 친조카처럼 깊이 생각했다·
모용현이 고개를 숙였다·
“원의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숙부님·”
“그래! 고맙구나·”
순간 심무외의 눈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 부현에서 심원의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은 그를 분노케 했다·
“제가 복수를 하겠습니다 숙부님·”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하나 자식의 복수는 부모가 해야 하는 법· 북검의 목은 내가 친히 딸 것이니 너는 개입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숙부님·”
“내 먼저 들어가마·”
“예!”
심무외가 모용현을 지나쳐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얼마 후 입구에는 또 다른 절대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수불언(不手不言) 담적심·
불귀곡의 주인이자 오무존의 일원인 그마저 운중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들어간 직후 운중천은 거대한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풍운번주 능군휘를 제외한 오무존이 운중천에 모였다·
초겨울 어느 날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