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 3장 새로운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온다 (1)
조운경의 무위는 실로 가공했다·
그의 십자혈마공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가 손을 내저을 때마다 핏빛 폭풍이 몰아쳤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폭풍 앞에서 진무원의 몸은 위태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한설은 전혀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반드시 진무원이 이길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소금향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은한설은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도 그랬지만 은혼심결 자체가 인간의 감정을 메마르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한설은 그런 은혼심결의 저주와 구속을 벗어나 인간의 감정을 되찾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따스한 정감이 어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였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저 아이가 아니라 나였던가?’
소금향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어린 시절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소금향이었다· 그 오랜 세월을 오직 밀야를 위해서 살아왔다· 밀야만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면 나머지 것은 어떻게 되든 좋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뿐인 제자에게 마병 월광륜을 주어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이제까지 자신이 행한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소금향이었지만 은한설에 관한 일만큼은 뼈가 저릴 만큼 후회가 됐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회였다·
은한설의 눈에 깃든 정감 어린 눈빛 뒤에는 단호한 신념과 맹목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진무원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아이는 절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소금향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진무원에게 당한 상처보다 은한설에게 예전처럼 대할 수 없는 현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가슴을 억누르며 진무원을 바라보는 은한설에게 다가갔다·
은한설이 그런 소금향을 발견하고 경계의 빛을 띄웠다·
“사부님·”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너를 헤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소금향이 미소를 지었다·
이전까지의 그녀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미소였다· 은한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의 자신만큼이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소금향이었다· 그녀가 둘러친 감정의 벽은 설산의 빙벽만큼이나 두꺼워서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소금향의 모습에서는 그런 빙벽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진무원에게 입은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소금향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넌 이제 나의 제자가 아니다·”
“사부님?”
“너를 파문하겠다· 너는 이제 밀야와 그 어떤 연관도 없다· 나하고의 끈도 끊어진 셈이니 굳이 나와의 관계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은한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금향은 그런 은한설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는 너의 삶을 살거라 한설·”
“····”
“진무원과 함께 어떤 삶을 살아가도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거라·”
“사부님·”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전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무인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때가 되면 전장에서 만나게 되면····”
소금향이 잠시 말을 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그녀의 망막 가득 들어왔다·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커다란 새도·
소금향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제대로 싸워보자꾸나· 그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사부님·”
은한설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깊이 잠겨 있었다·
그녀를 위해 소금향이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것이 소금향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은한설은 소금향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아홉 번을 했다·
처음 소금향의 제자로 들어갈 때 했던 배사지례였다· 이제는 그녀와의 연을 끊기 위해 그렇게 아홉 번의 절을 했다·
마지막 절을 마친 은한설이 고개를 들어 소금향을 바라봤다·
“그래도 사부는 제 마음속에 영원한 사부님이십니다·”
“그런 마음마저 끊어버리거라· 너와 나는 이제 적이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만 가야겠구나·”
소금향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소금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한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사부님·’
소금향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은한설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사부는 수하들과 함께 전장을 떠났다·
쾅!
그 순간 굉음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은한설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진무원과 조운경이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마신처럼 핏빛 강기를 일으키며 공격하는 조운경· 그의 핏빛 강기가 덮칠 때마다 진무원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은한설은 그런 진무원의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무원을 믿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녀석!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기만 할 작정이냐?”
조운경의 노성이 전장에 메아리쳤다·
이제까지 진무원은 그의 공격을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위태롭게 신형을 휘청일지언정 조운경의 공격을 다 흘려 버리고 있었다·
조운경과의 싸움을 통해 진무원은 십자혈마공의 허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단순히 조운경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조운경에게 십자혈마공을 주고 성취하게 만든 모용율천과의 싸움이었다·
진무원은 조운경을 통해 모용율천의 무력을 가늠하려 했다· 하지만 인성이 마비된 조운경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노옴!”
조운경의 노성과 함께 십자 형태의 강기가 진무원을 향해 날아왔다· 세상이 십자 모양으로 쪼개지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형님!’
진무원은 이제 길고 긴 악연을 끝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과거의 악연을 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진무원은 이를 악물며 십자강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쉬악!
그의 검결지가 허공을 갈랐다·
조운경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진무원의 손에서 칠흑빛 검을 봤다· 칠흑 같은 검신에서 요요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조운경은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환상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가악!
순간 십자강기가 베어져 나갔다· 조운경이 보는 세상도·
“무슨?”
조운경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잠시 동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그가 눈만 꿈뻑거렸다·
주르륵!
그의 입가와 허리에 동시에 피가 흘러내렸다· 조운경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허리를 가르며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실선을 비집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하!”
조운경이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쿵!
순간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조운경은 웃었다· 그 모습이 더 공포스러워 보였다·
진무원의 심검은 십자강기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양단해 버렸다· 허리 아래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운경은 죽음을 예감했다·
“크큭! 이 무슨 개 같은 경우가····”
“형님·”
“아비를 배반하면서까지 모용율천의 개가 되었는데 그 최후가 겨우 이런 거라니·”
조운경이 이를 악물었다·
진무원은 그런 조운경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허리 아래가 잘려 나갔는데도 조운경은 끈질기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십자혈마공의 가공할 내공이 생명의 끈을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진무원은 알고 있었다·
조운경이 진무원을 올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라· 계속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니까·”
“알겠습니다·”
“흐흐! 대단하구나· 그 밑바닥에서 이리 악착같이 기어오르다니· 너라면 자격이 충분하다·”
“자격?”
“모용율천을 상대할 자격이·”
“형님!”
“하지만 절대로 우습게 보지 마라· 모용율천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무섭고 교활하니까·”
“알겠습니다·”
“크흐흐! 인생사란 정말 덧없구나· 정말 덧없어····”
조운경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진무원은 조운경의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운경이 숨을 거두는 순간 비틀거렸다·
“무원·”
은한설이 재빨리 그런 진무원을 부축했다·
“한설·”
진무원이 은한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심검을 펼치다 보니 다시 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무원 고생했어· 이제 쉬어도 돼·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래! 부탁할게·”
“믿어도 좋아·”
“믿어!”
진무원의 미소가 짙어졌다·
은한설은 그가 세상에서 온전히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진무원은 눈을 감았다·
은한설이 그런 진무원을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남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고 상처투성이였지만 은한설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남자였다·
그때 이제까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곽문정이 다가왔다·
“누나 제가 형을 업을게요·”
“그래!”
은한설의 허락에 곽문정이 진무원을 들쳐 업었다·
곽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한 형이라니까·”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진무원은 늘 그랬다·
언제나 모든 돌파구를 찾아냈고 항상 앞장서서 헤쳐 나갔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곽문정이 진무원을 업은 채 은한설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나를 따라와·”
은한설이 앞장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격전이 벌어진 곳에서 이십여 리 정도 떨어진 조그만 개울가였다· 곽문정은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선우야·”
개울가의 바위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고 있는 소년은 하진월의 제자인 한선우가 분명했다·
한선우가 곽문정을 발견하고 두 손을 흔들었다·
“형!”
“네가 어떻게?”
“선자님을 따라왔어요·”
“그래?”
곽문정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한선우의 곁에는 커다란 황소 황아가 수레를 맨 채 서 있었다·
“문주님을 어서 수레에 누이세요·”
“응!”
곽문정은 진무원을 수레에 뉘였다· 그러자 한선우가 급히 말을 이었다·
“선자님이 문주님을 구하러 가신 동안 탈출로를 찾아놨어요· 어서 서둘러요·”
“알았어·”
곽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문혜령을 바라봤다·
“누나 어서 가죠·”
하지만 서문혜령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개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엔 온통 검은색 일색의 무인이 서 있었다· 사령이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서문혜령이었다·
“사령····”
“소주·”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령의 소주가 아니야·”
“····”
“안녕·”
서문혜령이 몸을 돌렸다·
사령은 그런 서문혜령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감정이 없던 사령의 눈에 만감의 빛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진무원은 단순한 독불장군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주위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당장 한선우만 하더라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가지 정황증거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퇴로를 확보하는 그의 심기에는 사령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이 움직였어도 그보다 완벽한 퇴로는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북천문은 이미 완벽하게 부활한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이제까지는 운중천과 밀야의 이파전이었다· 하지만 사령은 거기에 북천문을 더해 삼파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강렬한 예감이었다·
“북천문··· 북쪽의 위대한 하늘이 다시 문을 열었는가?”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