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 2장 싫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3)
부르르!
소금향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고 있었다·
은백색 수강을 흩뿌리던 그녀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서 있었다· 그 끝에 두개의 손가락이 존재했다·
“너··· 는?”
애써 태연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나오고 있었다· 손가락의 주인은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가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진무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 이제 그만 물러서거라·”
“네!”
곽문정이 이를 꽉 물며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으로 진무원을 지켰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금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독기 어린 시선을 진무원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단순히 주변을 한번 돌아보는 것만으로 어떤 상황인지 쉽게 짐작이 됐다· 그만큼 정황은 단순했다·
‘가경의와 서문혜령이 연합한 것인가?’
정황은 단순하지만 상황은 복잡해졌다· 밀야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가경의와 운중천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서문혜령의 연합이 향후 정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쉽게 짐작하기 힘들었다·
혼돈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 자리에서 살아남았을 때 이야기였다·
“네놈! 감히····”
소금향의 살기 어린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단순히 생사대적을 노려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눈빛엔 마치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아이의 상실감이 담겨 있었다· 그 원인 은한설이라는 것을 모를 진무원이 아니었다·
“가경의가 보냈습니까?”
“그 입 닥쳐라·”
“그는 최악의 선택을 했군요·”
“입 닥치라 했다·”
“한순간의 이익을 위해 밀야가 가진 정당성을 훼손했으니 그 여파가 적잖을 겁니다·”
“그 입····”
소금향의 손에 다시금 은빛 기류가 휘돌았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은혼반선수로 진무원을 공격했다·
“닥치라고 했다·”
퍼엉!
폭음이 터져 나오며 진무원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려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편안해보였다· 은혼반선수의 파괴력을 대부분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그의 몸 상태는 완전치 않았다·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움직일 만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 정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두 손가락을 모아 소금향을 겨눴다· 쇄병지와 비슷해 보였지만 그것은 검결지였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소금향이 코웃음을 쳤다·
간혹 고수들이 하수들을 상대로 검결지를 펼쳐 제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무공이 압도적인 차이가 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자신과 같은 절대의 고수를 상대로는 그 어떤 위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챠앗!”
그녀가 은혼심결상의 무공을 연이어 펼쳤다·
은혼반선수에 이어 청마각(靑魔脚)이 폭풍처럼 진무원을 향해 몰아쳤다· 하지만 진무원은 차분히 그녀의 공격을 하나하나 해소했다·
그의 입가에 옅은 혈흔이 내비쳤다· 아직 온전치 않은 몸으로 소금향과 같은 절대고수를 상대하려니 심맥이 진탕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검결지를 흔들었다·
쉬쉭!
유성혼과 단천해의 초식이 연이어 펼쳐졌다· 맨손으로 멸천마영검을 펼치는 것이다·
카카캉!
맨손과 맨손이 부딪치는데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기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펼치는 한 수 한 수가 명검을 들고 있는 이상의 위력을 냈으니까· 그만큼 살벌한 대결이 이어졌다·
‘어린놈이 실로 무섭구나· 이번에는 반드시··· 죽인다·’
소금향은 예전에 진무원을 살려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그때 죽였더라면 이렇게 큰 후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펼쳤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은빛 기류가 진무원의 몸을 난도질할 듯 날아왔다·
진무원은 그런 은빛 기류를 검결지로 하나하나 해소했다· 몸은 무거웠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은 명쾌했다· 마치 개안한 듯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금향의 호흡· 그녀의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요동을 치는 은빛 기류· 소금향의 은혼기에도 호흡이 존재했다·
내뱉는 것을 호(呼) 들이키는 것을 흡(吸)이라 한다·
호와 흡을 반복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기를 받아들이고 생기를 유지한다·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고 내공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말이다·
소금향도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가 제아무리 절대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호흡을 끊을 수 있다면 아니 들이키는 숨만 끊을 수 있다면····’
담담하기만 하던 진무원의 눈빛이 변했다·
고요하던 눈빛 속에 갑자기 격랑이 몰아쳤다· 더불어 진무원의 움직임도 변했다·
쉬악!
그의 검결지가 소금향을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소금향의 호흡을 향했다· 순간 소금향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왠지 모르지만 숨을 쉬는 것이 답답해졌기 때문이다·
‘무슨?’
소금향의 눈가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다시 은혼심결상의 절초를 펼쳐 냈다·
“흡!”
순간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대하처럼 도도하게 흐르던 내공이 갑자기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무원의 멸천마영검이 파고들었다·
쉬쉬쉭!
검기의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폭우림이었다·
“크윽!”
소금향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아주 짧은 시간 내공이 본래의 흐름을 회복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찰나라고밖에 볼 수 없는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와 진무원 같은 고수들에게는 영원이라고 느낄 만큼 긴 시간이었다·
진무원의 폭우림은 그 틈을 노린 것이다· 호가 끊기면서 엉망이 된 극히 짧은 시간을 파고들었다· 자연 소금향의 몸놀림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번 밀리자 정신이 없었다· 진무원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폭우림에 이어 단천해의 초식이 허공을 갈랐다·
피핏!
“큿!”
소금향의 전신에 날카로운 상처가 하나둘씩 입을 벌렸다· 피가 치솟아 오르며 그녀의 옷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뜻밖의 상처에 소금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호를 주유하면서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예전에 혼마 태무강에게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상치 못한 기습 때문이었다·
그녀가 실전에서 이렇게 상처를 입은 적은 거의 없었다·
‘도대체····’
소금향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순간에도 진무원의 멸천마영검은 독사처럼 그녀의 전신을 파고들고 있었다· 격렬한 위기감이 해일처럼 거세게 전신을 때렸다·
실제로 진무원은 해일처럼 소금향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멸천마영검이 줄줄이 풀려나왔다·
유성혼과 폭우림이 결합해서 새로운 초식으로 바뀌었고 뒤를 이어 북천벽과 유성혼이 혼합된 초식이 풀려나왔다·
이전에도 펼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 또 달랐다·
막힘이 없었다·
무한한 자유가 느껴졌다· 마음먹은 대로 초식이 조합되었다·
진무원의 검결지를 통해 멸천마영검에 존재하지 않던 초식들이 줄줄이 풀려나왔다·
그것은 진무원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무한한 자유가 있는 그곳에서 진무원은 마음껏 멸천마영검을 조합해 펼쳤다·
“아!”
소금향이 눈을 크게 치떴다·
눈부신 검의 편린이 느껴졌다· 진무원의 손에는 그 어떤 무기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소금향의 눈에는 시퍼렇게 날이 벼려진 검이 보였다·
‘수중무검 심중유검(手中無劍 心中有劍)의 경지인가?’
손에는 검이 없지만 마음속에는 검이 존재한다·
마음만 먹으면 무형의 검을 펼칠 수 있으니 이를 심검(心劍) 혹은 무형검(無形劍)이라고 부른다· 검을 익힌 자라면 누구나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전설적인 경지다·
소금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녀는 애써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만일 정말 진무원이 심검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자신을 비롯한 천하의 수많은 무인들이 너무나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나이 기껏해야 이십 대 초중반· 무림이 시작된 이래 그 어떤 무인도 진무원의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금향은 진무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실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호흡이 가닥가닥 끊기며 초식을 펼치는 것이 점점 더 버거워졌다·
진무원은 단천해와 섬광혈을 조합했다·
순간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하늘이 두 쪽이 났다·
‘이건?’
소금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막을 수 없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공력이 흩어지며 소금향이 눈을 감았다·
스가악!
순간 섬뜩한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전신이 두 쪽 나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감각에 소금향이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금향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자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는 진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왜 나를 살려준 것이냐?”
“빚을 갚은 겁니다·”
“빚?”
“십삼 년 전 당신의 자비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진무원이 대답 대신 조운경과 힘겹게 사투를 벌리고 있는 은한설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소금향의 시선도 은한설을 향했다·
소금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은 자신이 버린 제자 때문에 목숨을 구한 형국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못내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이익!”
“가경의에게 전하십시오· 약속은 그쪽이 먼저 깼다고·”
“····”
“조만간 우리는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소금향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진무원도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소금향의 대답이 아닌 은한설의 안위였다·
진무원이 은한설과 조운경의 싸움에 몸을 날렸다·
“크윽! 무원·”
조운경의 핏빛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설마 진무원이 이리 빨리 깨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소금향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짧았다·
“형님!”
조운경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조운경의 몸에서 느껴지는 혈향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혈향이 각인되게 마련이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혈향 또한 짙어진다· 조운경에서 느껴지는 혈향은 최소 수백에서 수천 이상을 죽였음을 의미했다·
자신 역시 피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조운경에 비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조운경에게서 느껴지는 광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겨우 숨을 돌린 은한설이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무원 괜찮은 거야?”
“괜찮아· 고마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나를 위해 달려와 줘서·”
“당연한 일이야· 오히려 내가 고마워·”
“무슨?”
“사부님을 살려줘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줘서·”
진무원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은한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은한설도 희미하게 웃었다·
은한설이 뒤로 물러섰다· 이제부터는 진무원의 싸움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무원도 그런 은한설의 생각에 동의했다·
조운경과 얽힌 은원은 자신이 직접 풀어야 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싸움이었다·
조운경의 살기가 짙어졌다·
“용케도 살아났구나 무원·”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모양입니다·”
“차라리 그냥 뒈지는 게 나았을 텐데·”
“모용율천이 형님을 보냈습니까?”
“크큿! 다 알면서 묻는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구나· 차라리 잘됐구나· 남의 손을 빌리는 것보다 그냥 내손으로 죽이는 게 훨씬 더 확실하지·”
조운경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진무원도 웃었다·
서로 다른 의미의 미소가 겹쳤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