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 2장 싫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2)
은한설의 무공은 은혼심결로 쌓은 은혼기가 바탕이 된다· 그 어떤 무공 어떤 초식을 펼치든 은혼기가 활용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소금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 은한설이 익힌 은혼심결은 그녀가 전수해 준 것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그녀들의 싸움은 마치 거울을 마주 보는 것처럼 판박이에 가까웠다·
소금향이 무형철산수(無形鐵散手)를 펼치면 은한설도 똑같은 무공을 펼쳤다·
콰직!
손바닥과 손바닥이 부딪치고 똑같은 기운을 발산한다·
은한설과 소금향의 몸이 동시에 흔들리고 똑같이 입가에 옅은 혈흔이 내비쳤다· 그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호각이었다· 또한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보니 쉽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벌써 이 정도까지 성장했다니·’
은한설과 손속을 교환하면 할수록 소금향의 놀라움은 커져만 갔다·
비록 똑같은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익혀온 햇수가 다르고 내공의 깊이가 다르다· 같은 무공을 익혔다면 당연히 사부가 제자를 압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하지만 은한설은 그런 이치를 부정이라도 하듯 소금향과 팽팽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무위였다·
지난 삼 년 동안 은거를 하면서 은한설은 무공에서 손을 놓았다· 은혼심결을 더 완벽하게 익히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지금의 무공을 더 완벽하게 다듬어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니 오히려 성취가 높아졌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허점과 운용의 묘에 눈을 떴고 더 높은 성취를 이루게 됐다·
비우니까 채워지더라·
은한설의 경우가 그랬다· 모든 것을 비우고 마음을 놓으니 더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을 가르친 사부와 대등한 무력을 소유하게 됐다·
같은 무공을 익혔고 성취 또한 비슷했다· 하지만 같은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의 모양이 각자 다르듯 그녀들의 무공 역시 원류는 같았지만 발전 형태는 상이하게 달랐다·
처음엔 은한설을 쉽게 생각했던 소금향의 얼굴엔 더 이상 여유로운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은한설을 생사대적으로 생각하고 싸움에 임했다·
쉬아악!
은한설이 은백색 수강을 펼쳐 냈다· 극성에 이른 은혼반선수(銀魂半仙手)였다· 그러자 소금향도 똑같은 은혼반선수를 펼쳐 냈다·
콰아앙!
같은 절기가 격돌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으음!”
은한설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역시 사부님이구나·’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금향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내공의 깊이였다· 아무리 은한설의 재능이 천재적일지라도 내공은 익혀온 햇수만큼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소금향은 은한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였다· 그녀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내공의 소유자였다· 애초부터 내력 싸움으로 가면 은한설이 소금향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은한설의 눈빛이 변했다·
소금향이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챘다·
“이제야 밑천을 꺼내려는 것이냐?”
은한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소금향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처음엔 분노가 가슴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제자의 성취가 기꺼웠다· 그리고 과연 제자가 숨겨놓은 수가 무엇인지 구경하고 싶었다·
후웅!
은한설의 몸 주변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어났다·
소금향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그런 은한설을 경계했다·
순간 은한설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치 실타래처럼 얇은 은백색 기류가 모공을 통해 발산되는 것이다·
“음!”
그런 은한설의 변화에 소금향이 침음성을 흘렸다·
은혼심결 어디에도 저런 변화가 나타난다는 구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변화가 바로 오롯이 은한설만의 독문 심득이라는 뜻·
“많이 컸구나· 자신만의 심득을 얻어 발전시키다니·”
소금향 얼굴에 진심으로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예전의 결정이 아쉬운 것이다· 그때 은한설을 사석으로 쓰지만 않았다면 지금 밀야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관계 또한 이렇게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기에 죽으나 사나 끝까지 가봐야 했다·
은한설이 그랬듯 소금향 역시 자신만의 독문 심득을 꺼내 들었다· 은한설에게도 전해주지 않은 오직 그녀만의 심득이었다·
유성은혼수(流星銀魂手)·
방금 전에 펼쳤던 은혼반선수의 위력을 극대화시킨 무공이었다· 그녀도 심득만 얻었지 아직 제대로 펼쳐 본 적은 없었다·
소금향이 은한설을 향해 유성은혼수를 펼쳤다·
“마음껏 펼쳐 보거라 한설·”
슈우우!
마치 유성처럼 은백색 빛이 은한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순간 은한설이 오히려 유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모공에서 발산된 얇디얇은 강기가 일제히 소금향을 향해 쏘아졌다·
은염사혼강(銀念砂魂罡)·
은혼심결에서 발전시킨 그녀만의 심득이었다·
콰콰콰콱!
“아!”
유성은혼수와 은염사혼강이 허공에서 격돌하는 순간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던 무인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엄청난 후폭풍에 근처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진평과 곽문정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누나·”
곽문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흐흐!”
갑자기 허공에 음소가 울려 퍼졌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곽문정이 고개를 드니 핏빛 기운으로 둘러싸인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핏빛 기운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은한설과 소금향이 있는 곳이었다·
“무슨? 위험하····”
곽문정이 움직이려는 순간 핏빛 기운이 은한설을 직격했다·
콰아앙!
“아악!”
핏빛 기운에 직격당한 은한설이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갔다·
“누나!”
곽문정이 급히 바닥에 쓰러진 은한설을 안아 들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은한설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누나 괜찮아요?”
“괘 괜찮아·”
은한설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일어났다·
온몸이 해체되는 듯한 충격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지만 약세를 보였다가는 두 번 다시 반격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흐흐!”
순간 은한설을 직격했던 핏빛 기운이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기괴한 모습에 소금향이 경계를 했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우리의 대결에 끼어들다니·”
“흐흐! 그건 미안하게 됐소·”
핏빛 기운이 사라지며 숨겨져 있던 실체가 드러났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에 소금향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보아하니 그쪽이 백야마녀 같은데 난 운중천의 조운경이라 하오·”
“조운경?”
“흐흐! 아마 무명소졸이라 마녀께서는 잘 모르실 거요· 운중천의 명을 받고 저 녀석을 죽이러 왔소·”
조운경이 손가락으로 진무원을 가리켰다·
순간 소금향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조운경의 건방진 태도도 신경을 거슬렸지만 그보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도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핏빛 광망과 입가에 어린 옅은 조소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한 광기와 세상을 향한 분노·
소금향도 마도 성향의 인물이었지만 조운경처럼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지는 않았다·
‘대체 운중천에는 저만한 괴물이 얼마나 더 숨겨져 있단 말인가?’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꺼림칙했다· 어쩌면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극단적인 광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너도 진무원을 죽이기 위해 파견된 운중천의 자객이란 말이구나·”
“그렇소! 서문혜령이 나를 보냈지· 흐흐! 세상에서 가장 처참히 저 자식을 죽여달라더군· 물론 나는 그렇게 할 작정이오·”
조운경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찐득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래 그의 존재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오죽했으면 서문화도 서문혜령에게 그의 존재를 비밀로 했을까· 그런데 서문혜령이 어떻게 알았는지 조운경을 찾아왔다·
서문혜령은 조운경에게 제안했다· 진무원을 죽이면 당신의 족쇄를 풀어주겠다고· 조운경은 기꺼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말 서문혜령이 자신의 족쇄를 풀어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진무원에게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진무원이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여도 죽일 수 있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은한설과 곽문정을 죽인다면 말이다·
“방해하지는 않을 거라 믿겠소· 그쪽 군사께서 동의한 일이니까·”
“흥!”
소금향이 코웃음을 쳤다·
기분 같아서는 조운경의 건방진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조운경의 말처럼 이미 가경의와 서문혜령이 이야기해 놓은 일이다· 개인의 판단으로 멋대로 일을 틀어버릴 수는 없었다·
조운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운중천과 밀야의 야합 정확히는 서문혜령과 가경의의 야합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알려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운경은 그런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흐흐! 그렇게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시작하는 거다· 지금이야 단순히 진흙탕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거대한 늪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뭐든지 맨 처음이 힘든 법이다· 처음엔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스럽지만 두 번 세 번 거듭되다 보면 감각이 무뎌져 종국에는 진흙이 전신에 묻어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
“흐흐!”
조운경이 키득거렸다· 그의 웃음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부르르!
그의 웃음에 담긴 광기에 내공이 약한 이들이 몸을 떨었다·
은한설과 곽문정이 이를 악물었다·
완벽히 포위됐다· 소금향에 조운경 그리고 수하들까지· 어디에도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조운경이 은한설과 곽문정을 향해 다가왔다·
“진무원을 넘겨라· 그럼 네년의 사부를 생각해서 목숨은 살려주지·”
“그럴 수 없다면?”
“죽음뿐이지· 보아하니 사부에게도 버림받은 것 같은데·”
조운경이 웃었다· 은한설이 그런 조운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무원은 내가 지켜·”
“흐응! 제법 강단은 있다 이거지?”
조운경이 문득 소금향을 바라봤다·
“그렇게 구경만 할 거요?”
“지금 나보고 합공을 하잔 말이냐?”
“설마?”
“그럼?”
“아무래도 예전 제자라서 손을 쓰기 껄끄러울 텐데 내가 이 계집을 맡지· 그사이 당신은 진무원의 숨통을 끊는 게 어떻겠소?”
“음!”
소금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손으로 제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껄끄러웠다· 차라리 조운경의 말대로 자신이 진무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나을 듯했다·
조운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그럼····”
팡!
순간 공기가 터져 나가며 조운경이 은한설을 향해 쇄도했다· 은한설이 조운경의 공세를 막으며 곽문정에게 소리쳤다·
“어떻게든 사부를 막아·”
그녀의 절규에 곽문정이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백야마녀였다·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 자신의 힘으로는 일 초식도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조운경이 은한설을 붙잡고 있는 사이 소금향이 진무원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소금향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 은백색의 기류가 맺혀 있었다· 은혼반선수를 펼치려는 것이다·
곽문정이 이를 악물며 청련의 손잡이를 더욱 힘주어 잡았다· 순간 소금향이 진무원을 향해 은혼반선수를 펼쳤다·
“이야아아!”
곽문정이 혼신의 힘을 다해 청련을 휘둘렀다·
쩌어엉!
은혼반선수와 청련이 격돌했다· 순간 곽문정은 전신을 커다란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쩌적!
청련의 표면으로 실금이 거미줄처럼 번져 가는가 싶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곽문정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소금향이 몸을 날려 그런 곽문정을 따라붙었다· 그의 손에서 다시 은백색의 기류가 토해져 나왔다·
‘끄 끝인가?’
곽문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까앙!
순간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