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3장 젊은 용들은 새로운 하늘을 꿈꾼다 (2)
화천각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전호대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둘러서 외곽을 경계했다· 그들의 기세가 어찌나 삼엄한지 근처로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이다·
“씨펄! 도대체 안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여?”
장패산이 화천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어차피 그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가 알아서 좋을 이야기였다면 애당초 저리 첨예하게 경비를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패산이 돌아보자 열심히 서책을 읽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혈파도법(血波刀法)· 서책의 표지엔 검은 먹물로 선명하게 그리 쓰여 있었다·
장패산이 소리쳤다·
“중원에 돌아가기 전까지 한 자도 틀림없이 모조리 외워야 한다! 외우지 못하는 놈은 중원으로 데려가지 않을 줄 알아라!”
“조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머리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모조리 외울 테니·”
장패산의 심복 노지광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치며 호언장담했다·
“흐흐! 네놈들은 복 받은 줄 알아· 조장 잘 만나서 이런 상승의 무공도 익히게 되고·”
“암요· 모두 조장 덕분이죠· 견마지로를 다할 테니 부디 중원에 돌아가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견마지로? 으하하! 그래 네놈들은 나에게 견마지로를 다해야 한다· 그게 출세의 지름길이니까·”
장패산이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혈파도법은 심원의가 외당의 무인들에게 익히라며 선심 쓰듯 내린 무공이다· 심원의 입장에서는 하등 대단할 것도 없는 무공에 불과했지만 외당의 무인들에게는 상승지경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소중한 무공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장패산은 혈파도법과 별개로 또 다른 무공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조원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흐흐! 광천도법(廣天刀法)은 나 혼자 익혀야지· 이렇게 강한 무공을 졸개들한테까지 나눠 줄 수야 없지·’
장패산은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남들보다 강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혈파도법은 잘 모르겠지만 따로 받은 광천도법은 확실한 상승의 무리를 품고 있었다·
장패산은 심원의에게 충성을 맹세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 아낌없이 베풀진대 나중에 공이라도 세우면 또 얼마나 큰 선물을 내려줄 것인가?
상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한쪽 벽에 기대고 서 있는 소무상을 바라본 순간 딱 사라졌다·
모두가 혈파도법을 암기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오직 그 혼자만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언제부턴가 소무상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리 다루기 편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령을 내리는 데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소무상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것이 이상하게 명령을 내리는 것조차 껄끄러웠다·
겉으로 변한 게 없는데 이상하게 소무상의 눈빛만 보면 심신이 위축되며 오금이 저려서 영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소무상은 엽월과의 싸움 이후 대대적인 무공의 상승을 이뤘다· 막고 있던 벽을 깨면서 상승의 경지로 들어선 것이다·
상승의 경지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기도를 갈무리하는 것이 서툰 소무상이었다· 자연 눈빛이나 몸짓을 통해 자연스럽게 위엄이 드러났다·
소무상보다 무공이 강한 자에게는 별 소용이 없겠지만 그보다 하수는 심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패산 역시 그러했다·
장패산은 소무상의 무공이 상승지경에 들어섰다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께름칙한 마음에 그를 멀리하게 됐다·
청운검법으로 상승지경에 들어서면서 소무상은 혈파도법을 익힐 필요가 없게 됐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지만 속이 좁은 장패산에겐 그것이 마치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무상은 조원들이 혈파도법을 암기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 이런 기회가 찾아왔다면····’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가정이란 하릴없는 자들의 사치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호호! 다들 열심히 하네·”
그때 듣기 좋은 소녀의 교소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이제 십오륙 세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심수아?’
귀여운 얼굴에 애교 가득한 표정의 소녀는 바로 심원의의 동생인 심수아였다·
현재 북천문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심수아일 것이다· 심원의 서문혜령 담수천 등이 화천각 안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도 그녀는 북천문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그녀를 따라다니는 호위무사였다·
“아이고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장패산이 두 손을 비비며 반가이 심수아를 맞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기세였다·
그 모습에 심수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겐 꽤 익숙한 풍경이다· 그녀를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장패산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냥 갑갑해서 나와 봤어·”
“아이고 저런····”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쳇!”
심수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정말 미치도록 귀여워서 장패산은 하마터면 손을 뻗어 만질 뻔했다·
‘헉! 이게 무슨?’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장패산이 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심수아가 그런 장패산의 모습을 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아 심심하다·”
심수아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만영탑으로 향했다·
“저곳에나 놀러 가볼까?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심수아의 말에 장패산이 기겁했다·
“아이고 아가씨· 그러지 마십시오·”
“왜?”
“거기는 아가씨처럼 귀한 분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놈은 강호 공적의 자식입니다· 괜히 아가씨 눈만 버립니다·”
장패산이 침을 튀며 극구 만류했다·
“그래?”
“오물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정 심심하시다면 이 몸이 아가씨를 모시고 바깥 구경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이딴 곳에 구경할 게 뭐 있다고?”
“거야 그렇지만····”
“됐어·”
심수아가 장패산의 말을 그대로 끊더니 그대로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싹퉁머리 없는 계집 같으니라구·’
장패산은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심수아를 따라갔다·
“어디를 가십니까 아가씨?”
“흥! 내가 어디를 가든 무슨 상관이야!”
“아가씨!”
장패산이 멍하니 멀어져 가는 심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호위무사와 함께 사라지자 그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저 계집의 변덕이 저리 죽 끓듯 하니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겠구나·”
방금 전까지는 구름 위를 날고 있었는데 지금은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찜찜하기만 했다·
연무장을 나온 심수아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돌았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연무장 밖을 걸어가는 진무원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천문에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진무원을 따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진무원이 워낙에 밖으로 나오지 않은 탓도 있지만 심원의 등이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천방지축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 때문에 툭하면 사고를 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오죽하면 그녀의 아버지인 사사천주 심무외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까?
“저기요·”
심수아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들며 진무원을 향해 달려왔다·
“응?”
진무원이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심수아를 바라보았다·
“저기 시간 있어요?”
“····”
“그냥 이야기나 하자구요· 다들 일에 바빠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거든요·”
진무원의 대답 여부와 상관없이 심수아가 옆에 섰다· 그 모습에 그녀의 호위무사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심수아에게 얼마나 또 시달리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바쁜데·”
“뭐가 그렇게 바쁜데요?”
“그냥 이것저것·”
“하! 우리 오빠도 그렇고 도대체 남자들은 뭐가 그렇게 바쁜 건가요? 나 같은 미인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심수아가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그녀는 마치 종달새 같았다·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구김살 하나 없었다·
‘평생 누군가의 눈치 따위는 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진무원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누가 심무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심수아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진무원은 하루하루 넘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매일이 전투 같았고 잠들기 전에는 과연 내일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당연히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도 여러 번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입 밖으로 낸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계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심수아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녀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피곤이 몰려왔다· 심수아와의 만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오빠처럼 권모술수에 능하지 않은 것 같군·’
문득 그의 시선이 화천각을 향했다·
창문을 반쯤 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심원의와 담수천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