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 2장 싫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1)
곽문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소금향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위압감만큼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려오고 전신에 소름이 올라왔다· 입은 바싹바싹 타고 머릿속에서는 연신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강호에 나온 이후 이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그 모든 것이 눈앞에 있는 여인 때문이란 것을 모를 곽문정이 아니었다· 그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그 순간 소금향이 한 걸음 나섰다· 그러자 그녀의 서릿발 같은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배를 돌려 강 건너편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강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데다가 사공도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체 누구기에?’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꽤나 익숙하단 사실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와 같은 기세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순간 한 가지 가정이 퍼뜩 떠올랐다·
“설마··· 백야마녀?”
“나를 알고 있느냐?”
“당신은 전대의 백야마녀군요·”
“너의 견식이 제법이구나·”
소금향의 대답에 곽문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말 상대가 백야마녀가 맞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다 당신이 왜?”
곽문정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였으니까· 자신의 무공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아직은 그녀의 상대는 아니었다·
‘여기까진가?’
곽문정은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아직도 등에 업힌 진무원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 한 자신에겐 소금향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절대 그녀를 당할 수 없어· 절대 이기지 못할 거야·’
온갖 비관적인 사고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다 문득 곽문정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놀랐다·
‘싸우기도 전에 포기하다니· 형이 알았다면 얼마나 창피해했을까?’
진무원은 항상 말했다·
상대보다 무공이 한 수 아래일 때보다 마음이 꺾였을 때가 진정으로 위험한 거라고·
어쩌면 그녀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요행을 기대해볼 만큼 그녀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싸워보기 전에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어· 한번 해보는 거야·’
곽문정은 조심스럽게 등에 짊어졌던 진무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곽문정의 모습에 소금향이 이채를 떠올렸다·
“호!”
곽문정이 청련을 들어 소금향을 겨눴다·
“후배 곽문정이 백야마녀께 정식으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후배의 도전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도전이라····”
소금향이 빙그레 웃었다·
“건방진! 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순간 소금향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발끈해 나섰다·
소금향은 밀야의 무인들에게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감히 밀야의 무인들도 그녀에게 도전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지고한 존재에게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도전을 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금향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이야기를 듣는구나· 도전이라··· 마지막으로 나에게 도전해 왔던 자는 이미 삼십 년 전에 죽었다· 그 후로 아무도 나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도전이라는 단어에는 그만한 무게와 짊어질 책임이 있다· 너는 그런 무게를 견딜 만한 각오가 되어 있느냐?”
“그런 것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아는 것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어떻게든 형을 지켜야 한다는 것·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말입니다·”
“너의 의기는 가상하다만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겁니까?”
“너에게 도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너의 무공 수준으로는 내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정 도전하고 싶다면 이 아이를 이기거라· 그러면 받아주지·”
소금향이 방금 전에 나선 무인을 가리켰다· 그러자 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몸에서는 무시 못 할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전평 밀야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재였다·
곽문정은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알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백야선자께서 운중천에 협조를 하는 겁니까? 밀야와 운중천은 불공지대천의 원수가 아니었습니까?”
“아이야 네 말이 맞다· 나도 작금의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란다· 하지만 군사가 결정한 이상 따라야 할 의무가 나에겐 있단다· 그러니까 그만 헛심 쓰고 비키거라· 나는 반드시 진무원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니까·”
소금향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애초부터 곽문정은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진무원 하나뿐이었다·
이십여 년을 소중히 키운 제자가 진무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스승인 자신을 배신했다· 그녀가 느낀 배신감과 절망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진무원에게 그 죄를 물으려 했다·
소금향이 기절해 있는 진무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곽문정이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전평의 공격이 훨씬 더 빨랐다·
“챠핫!”
전평이 곽문정을 향해 성명절기인 파랑칠절검(波浪七絶劍)을 펼쳤다· 파랑칠절검은 쾌검의 묘리를 담고 있는 상승의 절기였다·
전평의 검이 파도처럼 쉴 새 없이 곽문정을 몰아쳤다·
“크읏!”
곽문정은 전평의 검을 막아내면서도 소금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형을 지켜야 하는데····’
지금 진무원은 무방비 상태였다· 무공을 모르는 자라도 손쉽게 그의 목을 비틀 수 있을 정도였다· 하물며 소금향 정도의 고수라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곽문정은 진무원을 내려놓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소금향이 진무원을 내려다보았다·
북검이라는 위대한 별호로 천하를 위진시킨 무인이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밀야 최대의 숙적인 북천문의 당대 문주 그리고 자신의 제자를 빼앗아 간 강탈자가 말이다·
운중천과 손을 잡은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소금향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 은백색 기류가 휘돌았다· 은혼기였다·
“잘 가거라· 북천문의 망령이여·”
그녀가 그대로 진무원을 향해 은혼기를 운용한 손을 내리꽂았다·
“형!”
그 광경을 본 곽문정의 처절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콰앙!
굉음과 함께 일진광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순간 소금향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의 공격에도 진무원은 멀쩡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대신 굴곡진 몸매의 여인이 진무원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녀가 진무원 대신 소금향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너는?”
소금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무원을 막아선 여인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기질과 분위기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 기운과 기질 그리고 눈빛·
“한···설이냐?”
“사부님 오랜만이에요·”
담담히 대답하는 여인은 바로 은한설이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사제가 조우하는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먼저 입을 연 이는 소금향이었다·
“살아··· 있었더냐? 살아 있으면서 그간 왜 연락을 하지 않은 거냐?”
“아시잖아요· 그럴 수 없었다는 걸·”
“한설아·”
“월광륜·”
은한설의 입에서 월광륜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온 그 순간부터 소금향의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데 능숙한 그녀였지만 지금은 여과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휴! 알았느냐?”
“왜 그러셨나요? 왜 저의 마성을 폭발시키려 하신 건가요?”
“어쩔 수가 없었다· 밀야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게 저란 말인가요?”
“너에겐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소금향이 무척이나 간곡하게 말했지만 은한설의 표정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은한설의 모습에 소금향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기만 했던 그녀의 제자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자신만의 가치관이 생기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은한설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담담히 바라보는 은한설의 눈빛에서 소금향은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문득 소금향의 시선이 은한설의 뒤쪽에 있는 진무원에게 멈췄다· 순간 그녀의 눈에 노기가 치솟아 올랐다·
‘저자 때문이다· 진무원 저자 때문에 내 제자가 나를 배신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노기는 곧 살기로 바뀌었다·
은한설이 소금향의 살기를 감지했다· 역시나 예상은 했지만 그녀의 사부는 진무원을 살려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부님·”
“말하거라·”
“그냥 이대로 물러나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네가 저자를 두고 물러가거라· 그러면 내 두 번 다시 너를 찾지 않으마·”
“저 역시 그럴 수는 없어요· 그는····”
“그는?”
“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너?”
소금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미 예상을 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은한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겨우 사내 때문에 이 사부를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전 사부님을 배신한 적이 없어요· 사부님이 저를 버린 거지·”
“제자는 당연히 사부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설령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그것이 제자의 도리다·”
소금향의 목소리가 강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평소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노기를 발산하자 엄청난 기세로 사위를 짓눌렀다· 수하들조차 그녀의 기세에 놀라 몸을 움찔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낸 은한설의 표정은 여전히 편안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소금향이 침음성을 흘렸다· 겨우 삼 년이란 시간 동안 은한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진전을 이룬 것을 눈치챈 것이다·
‘어떻게?’
은한설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설이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운중천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텐데·’
현재 밀야에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절대고수였다· 사대마장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지금 당장이야 가경의의 신출귀몰한 귀계로 어찌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소금향이 입을 열었다·
“한설 밀야로 돌아 오거라· 너만 돌아오면 그 아이를 고이 보내주겠다·”
“정··· 말인가요?”
처음으로 은한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만큼 뜻밖의 제안이었고 마음이 흔들릴 만큼 솔깃했다·
자신만 밀야로 가면 진무원을 살릴 수 있다·
그런 생각에 갈등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느냐?”
“제가 밀야로 돌아가면 이 사람과 서로 칼을 겨눠야 하거든요· 그럴 수는 없어요·”
“겨우 사내 하나 때문에 사부와 밀야를 배신하겠다니· 내가 제자를 잘못 키웠구나·”
소금향의 목소리에 살기가 깃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 사부의 반응에 은한설이 잠시 눈을 감았다·
‘사부님·’
자신을 키워주고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다· 그런 하늘 같은 사부와 대립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진무원과 소금향·
이제껏 미뤄왔던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바로 진무원이었다· 삼 년 전 그 순간부터 그녀의 선택은 결정되어 있었다· 단지 이제까지 미뤄왔을 뿐이다·
그녀가 소금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사부님·”
“건방진!”
순간 소금향이 화를 참지 못하고 은한설을 향해 장력을 발산했다· 그녀의 장력에는 은혼기가 실려 있었다·
은한설도 이를 악물고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은백색의 반투명한 장막이 그녀의 앞에 생겨났다· 은혼기로 만들어낸 반탄강기였다·
쩌어엉!
은혼기와 은혼기가 부딪쳤다·
똑같은 무공을 익힌 사부와 제자가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