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 8장 때로는 개미구멍 하나에 벽이 무너지기도 한다 (3)–>
가경의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만추산의 장례를 치르고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느라 며칠을 꼬박 새웠더니 정신이 다 혼미했다·
만추산의 죽음은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밀야의 사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많은 무인이 의욕을 잃어버렸다·
“반전의 계기가 필요한데····”
문제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경의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밀야의 군사직에 오른 후 이렇게 무기력하기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무공 일 초 반 식도 익히지 못했지만 자신의 두뇌라면 충분히 세상을 경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욱 많았다·
가경의가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들겼다·
“군사님 저 궁상화입니다· 보고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궁상화는 천무대(天武隊)의 대주였다· 결코 이 야심한 시각에 직접 보고를 하러 올 신분이 아니었다·
가경의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인가요?”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누군가요 이 야심한 시각에····”
“그게····”
궁상화가 말을 더듬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가경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모시고 들어오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궁상화와 천무대의 무인들이 두 명의 여인을 포위한 채 들어왔다·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경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당신은?”
그녀는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밀야의 무인들이 그녀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단숨에 능지처참을 하려 할 정도로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여인이 가경의에게 고개를 숙였다·
“밀야의 군사인 가경의 대협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서문세가의 서문혜령이라고 해요·”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가경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서문혜령의 등장은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서문 소저가 저희에게 먼저 접근해 왔습니다·”
대답을 한 이는 궁상화였다·
서문혜령이 감천 외곽에 포진해 있는 밀야 무인들에게 접근해 온 것이 불과 이각 전이다· 채화영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자신의 신분을 밝힌 서문혜령 때문에 비상이 걸렸고 결국 궁상화가 천무대를 이끌고 진실 확인에 나섰다·
확인 결과 서문혜령은 진짜였다· 서문혜령은 궁상화에게 가경의를 은밀히 만나러 왔음을 알렸다·
가경의의 눈매가 좁아졌다·
“서문 소저가 찾아오다니 뜻밖이군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서문 소저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찾아왔다? 목숨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래요·”
“흠!”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예요·”
가경의가 서문혜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서문혜령은 그런 가경의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가경의는 서문혜령의 눈에 어린 분노를 엿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문혜령은 광기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그가 파악한 서문혜령은 절대 흥분을 하지 않는 냉철한 모사꾼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 정도의 광기를 머금었다는 것은 그만큼 큰 정신적인 충격을 입었음을 의미했다·
가경의가 미소를 머금었다· 경쟁자의 추락은 그에게는 비상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 같은데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고마워요· 그 전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물려줬으면 좋겠는데요·”
“흠! 그건 곤란할 것 같군요· 보다시피 제가 무공을 익히지 않아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설마 제가 두려우신 건 아니겠죠?”
“두렵습니다· 서문 소저는 칠소천의 일원이라 불릴 정도의 무공을 익혔으니까요·”
“저는 목숨을 걸고 왔어요· 어차피 협상에 실패하면 제 목숨은 여러분 거예요· 그래도 제가 두렵단 말인가요?”
“목숨은 하나뿐이니까요·”
“원하신다면 산공독이라도 복용하겠어요·”
서문혜령이 가경의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담긴 독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 각오라면····”
가경의가 궁상화를 바라보았다· 수하들과 함께 나가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군사····”
“괜찮을 겁니다· 밖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궁상화가 마지못해 수하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서문혜령이 채화영에게 말했다·
“언니도 나가서 대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채화영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 역시 내키지는 않았지만 천무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나가고 단둘만 남게 되자 가경의가 물었다·
“그래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셔서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 제안을 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공통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았으면 해요·”
“공통의 적?”
가경의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러자 서문혜령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 우리 공통의 적이에요·”
“진무원? 그자는 오래전에 죽었는데····”
“살아 있어요·”
“그건 의외이구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자를 죽이기 위해 당신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는데·”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단천운이라면요? 그리고 살천랑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요?”
“음!”
가경의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단천운과 협약을 맺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진무원이었다고?’
순간 전신에 소름이 다 올라왔다·
“그게 진짜입니까?”
“물론이에요·”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가 내 할아버지를 죽였어요·”
“서문화가··· 죽었단 말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가경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직 밀야에서는 부현 지부에서 일어난 변고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내가 모략과 암계를 즐겨 사용하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을 가지고 계략을 꾸밀 만큼 냉혹한 년은 아니에요·”
“으음!”
“만추산 대협의 시신은 잘 받으셨나요?”
예상치 못한 서문혜령의 말에 가경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 받았소·”
“만 대협의 죽음이 오롯이 저희의 탓이라고 생각하나요?”
“····”
“야주를 암살하려던 저희의 작전은 오직 소수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가경의 대협께서는 미리 대비를 하고 만추산 대협을 배치했지요· 전 진무원이 그 사실을 당신에게 은밀히 알려줬다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가경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짐작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런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해서 생각하는 바가 그대로 드러났다·
‘단천운이 진무원이었다고? 게다가 살천랑까지···· 그야말로 천하를 완전히 농락했구나·’
문득 사천성으로 파견 보냈던 청풍마영 남천명이 생각났다· 사대마장의 일인인 그는 신비롭게 실종되었고 결국은 돌아오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실종 역시 진무원이 직접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가경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의 행적을 당신에게 알려주고 그 결과 만 대협이 현현소 대협에게 죽었어요· 그리고 현현소 대협은 다시 진무원에게 죽었어요· 완벽한 차도살인지계로 밀야와 운중천을 동시에 농락한 거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진무원의 정체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공통의 적을 상대하자고·”
“공통의 적이라···· 글쎄요· 지금의 나로서는 굳이 그를 상대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운중천이라는 생사대적을 눈앞에 두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요·”
“운중천은 당분간 밀야를 향해 그 어떤 도발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제 이름을 걸고 장담하겠어요·”
“음! 그 정도만으로는 부족한데·”
“가 대협과 제가 직접 연결되는 비선을 만드는 건 어때요? 우리가 비록 적이긴 하지만 늘 적대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흐음!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다는 말이오?”
“잘 알고 계시네요·”
가경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하지만 설마 서문혜령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가경의는 면밀히 득실을 따졌다· 그리고 서문혜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가경의의 마음을 움직인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진무원 그 자체였다·
‘그는 분명 사천성에 제이의 북천문을 만들고 힘을 키우고 있다·’
진무원의 무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상징성과 교활한 두뇌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는 이제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운중천과 밀야를 오가면서 양측을 상잔하게 만들었다· 그런 독심과 비상한 두뇌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싹을 자르려면 지금이 제격이었다· 이 이상 그를 방치하면 어떤 위험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운중천보다 그가 더 큰 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일이다·
가경의의 입가에 서문혜령과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참 구미가 당기는군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가 대협·”
“그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그들의 밀담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좋지 않군!”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부현 전체가 살의를 머금은 듯 그를 바싹 조여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현을 아직까지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챠핫!”
쉬악!
날카로운 음성과 파공음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진무원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젖혔다· 순간 붉은 기운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붉은 기운이 격중한 담벼락이 산산이 무너졌다· 잠시만 반응이 늦었어도 진무원의 머리가 저렇게 부서졌을 것이다·
진무원의 눈이 붉은 기운이 날아온 방향을 향했다· 그곳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진무원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심원의 척마대·”
“진··· 무원· 잘도 속였겠다·”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남자는 바로 심원의였다· 그가 척마대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심원의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 때문에 칠소천이 저평가를 받았고 심원의 자신도 큰 피해를 입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가 단천운으로 분해 자신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더군다나 진무원은 자신이 하늘같이 생각하는 서문화를 죽였다·
“네놈을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진무원·”
“심원의·”
“오늘 저 자리가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
심원의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척마대가 어느새 진무원을 에워쌌다· 그들의 몸에서는 찐득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만일을 대비해 진무원의 퇴로까지 완벽하게 점했다·
저들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문제는 저들과 싸우는 동안 새로운 전력이 이곳으로 달려올 거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진무원이 단봉을 꽉 쥐었다·
단봉을 따라 붉은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직도 더 많은 피를 묻혀야 할 것 같았다·
“죽여랏! 놈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
심원의의 외침과 함께 척마대가 진무원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부현의 새벽하늘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