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 5장 남이 모르는 모습도 있다 (3)
우태천을 비롯한 기재들은 아직도 흑암대의 마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삼백 명이 넘던 흑암대는 이제 겨우 칠십여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흑암대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독종들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에 그들이 더욱 광분해 날뛰었다·
“헉헉!”
우태천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흑암대의 피가 대부분이었지만 그가 흘린 피도 적잖았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이제는 정신이 다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상황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콰직!
그 순간 흑암대의 마인의 주먹이 어깨에 작렬했다· 최대한 몸을 비틀어 충격을 분산시켰지만 어깨가 탈골되어 덜렁거렸다·
“크헉!”
우태천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단지 어깨가 탈골되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격에 내장이 진탕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소요공자라는 별호로 강호를 종횡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치열한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우태천이었다·
그가 알고 경험한 강호는 이렇게 치열하지 않았다· 또래의 무인들은 그의 이름만 대도 알아서 스스로를 낮췄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기 바빴다·
가끔 비무를 하더라도 그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었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순간의 실수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살벌한 전투가 벌써 반 시진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생소한 경험이 그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헉헉! 제기랄!”
너무 힘들고 아파서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누워 잠들고만 싶은 유혹이 슬금슬금 찾아왔다· 그렇게 그가 지쳐 갈 때 설공이 흑암대 마인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에게 다가왔다·
“아미타불! 우 소협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설공!”
“모두 무사하군요·”
남수련도 흑암대의 포위를 뚫고 그들에 합류했다·
전투가 시작된 후 각자 고립된 채 싸웠던 그들이 처음으로 모인 것이다·
우태천이 물었다·
“단천운과 남 소저는?”
“모르겠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벌써 죽었을지도····”
설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손에 죽은 흑암대 마인의 수가 몇 명인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살계를 열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지만 막상 많은 이들의 피를 손에 묻히자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살계를 연다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지 그도 처음 알았다· 그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연소소도 검에 이렇게 많은 이들의 피를 묻힌 것은 처음이었다· 흑암대의 마인들은 생명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연소소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가진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다 같이 지치고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세 명이 뭉치니 투지가 살아나고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리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악에 받친 흑암대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그들의 독기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기재들의 목숨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제길!”
우태천과 설공 등의 얼굴에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밀야의 야주를 암살하기는커녕 이름 모를 황야에서 개죽음을 당하게 생겼다· 그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크헉!”
흑암대 진용이 갑자기 크게 흔들리며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터졌다·
우태천 등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응원군인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기분이었다·
그들은 보았다· 뒤쪽에서 흑암대를 무너뜨리며 파죽지세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무인을· 진무원과 남수련이었다·
“아!”
연소소가 탄성을 내뱉었다·
남수련의 무위야 익히 알고 있는 바였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장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진무원의 무위는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휙휙!
장봉이 낭창낭창 휠 때마다 서너 명의 흑암대 무인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강철보다 단단한 육체를 가진 흑암대 무인들이었다· 항마력을 가진 설공이 그나마 조금 수월하게 상대했을 뿐 연소소나 우태천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진무원은 장봉 하나로 그들을 너무 쉽게 상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식을 벗어난 무위였다·
‘특별한 내공이라도 익힌 것인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일단은 접어두기로 했다· 이곳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무사합니까?”
마침내 진무원과 남수련이 흑암대의 무인을 뚫고 합류했다· 싸움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다섯 명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등을 맞대고 원진을 만들었다·
“흥! 어디 갔다 이제 온 거냐?”
우태천이 코웃음을 치며 냉대했다· 하지만 반가운 빛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진무원을 미워하는 마음이야 여전했지만 그의 무력만큼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슈슈슈!
진무원의 봉이 어지러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봉법은 매우 현란했다· 기재들의 눈으로도 어떤 것이 허초이고 어떤 것이 실초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콰지끈!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흑암대의 마인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는 버둥거리면서 일어나려 했다· 육체의 고통 따윈 그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이 정도의 상처라면 육체를 움직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끄아아!”
그러나 고통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절로 비명이 토할 만큼 엄청난 극통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몸 안으로 침투한 그림자 내공이 그의 마기를 가닥가닥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수련이 검을 휘둘렀다· 심장이 찔린 마인은 그대로 절명했다·
진무원이 일 차로 제압하면 나머지 마무리는 다른 기재들이 하는 방향으로 싸움은 흘러갔다· 그렇게 거의 반 시진이 지났을 때 흑암대의 무인 중 살아남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지에 죽음이 내려앉았다·
살아남은 자는 다섯 그중에 온전한 정신으로 서 있는 자는 진무원 한 명뿐이었다· 남수련과 설공 연소소 우태천은 바닥에 엎어져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남수련과 연소소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았다는 안도감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이유 모를 분노와 허탈함이 복합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그들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웨엑!”
설공이 토악질을 했다·
막상 살계를 열고 수많은 마인들을 죽일 때는 몰랐지만 다 끝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큰 악업을 행한 것인지 깨달았다·
“우욱! 아 아미타불!”
피가 범벅이 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인지 혹은 살계를 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엉엉!”
연소소는 아예 통곡을 했다· 남수련이 그녀를 위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태천의 얼굴 역시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양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이 탈진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진무원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린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다른 기재들에 비해 월등이 좋아 보였다· 결국 그 때문에 생존한 셈이다·
그가 자신보다 강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나는 놈을 영원히 넘지 못한단 말인가?’
그 사실이 우태천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진무원의 눈빛은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손에 죽을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진무원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벌써부터 약해져서는 안 됐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이보다 더 험하고 거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진무원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너는 북천문의 문주다· 수많은 사람이 너를 믿고 따르고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운공을 계속했다·
그때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급히 운공을 멈추며 외쳤다·
“정체불명의 무리 출현 모두 경계하십시오·”
그의 말에 기재들이 분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새로 출현한 이들이 적이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무원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사이 새로 나타난 무인들이 가까워졌다·
“아!”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연소소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탄성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바로 운중천의 무인들이었다· 연소소 등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무리를 이끌고 온 무인의 이름은 윤광휘· 서문화의 명을 받는 자였다·
설공이 물었다·
“당신들이 여길 어떻게?”
“서문화 대협의 명으로 뒤를 따라왔습니다· 만일을 대비하고 비상시 여러분들의 퇴로를 열기 위해서·”
“역시 귀제갈이시군요· 이런 상황을 대비하다니·”
“저희가 늦은 것 같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았습니다·”
“현현소 대협이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파산마부와 대결을 벌이는 것까지는 봤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저희도 워낙 경황이 없어서····”
설공이 말끝을 흐렸다·
윤광휘가 이해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전장을 확인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의 시신이 무려 삼백여 구다· 그런 이들과 혈전을 치렀으니 제정신일 리 없었다·
그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흩어져 현현소 대협을 찾아라·”
“존명!”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에 나섰다·
진무원은 심유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현현소와 만추산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닥에 난 족적만 보고 따라가면 되니까· 하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문득 남수련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두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이쪽입니다· 흔적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수색에 나선 무인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윤광휘가 기재들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시지요·”
“그럽시다·”
기재들은 흔쾌히 윤광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원래 있던 곳에서 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 야트막한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현소와 만추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아!”
“이럴 수가!”
만추산과 현현소의 모습을 확인한 무인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만추산과 현현소가 동귀어진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멀찍이 공야경의 시신이 보였지만 누구 한 명 신경 쓰지 않았다·
“설마··· 동귀어진하신 건가?”
윤광휘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현현소 대협이 이리 가시다니·”
“하긴 파산마부 만추산을 상대하셨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군·”
만추산은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불세출의 무인이었다· 그런 무인을 상대로 동귀어진했다고 하니 이해가 갔다·
진무원은 침묵을 지켰다·
두 사람이 동귀어진한 것처럼 꾸민 이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흔적을 조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누구도 두 사람이 동귀어진한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현현소의 죽음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아홉 하늘 중 또 하나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공황을 가장 먼저 빠져나온 이는 바로 윤광휘였다· 그가 넋을 잃고 서 있는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뭐하느냐 어서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해 부현으로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부하들이 정신을 차리고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윤광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기랄! 이렇게 일이 어그러지다니·”
모든 계획이 뒤틀렸다· 야주를 죽이는 것은커녕 현현소가 죽었으니 손해 막심이었다· 사대마장 중 한 명인 만추산과 동귀어진했다는 사실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부하들이 마침내 세 사람의 시신을 수레에 모두 실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독한 정적이 그들 한가운데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