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 5장 남이 모르는 모습도 있다 (2)
공야경은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하얀빛에 눈은 잠시 시력을 상실했고 귀는 청력을 상실했다· 감당하기 힘든 충격에 잠시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것이다· 하지만 공야경은 당황하지 않고 공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마비되었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시력이 돌아왔다· 순간 공야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무원과 현현소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안색은 그토록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문득 현현소가 입을 열었다·
“정말 지겹구나 북천문· 우리가 만든 망령이 끝까지 발목을 붙잡다니· 너는····”
갑자기 현현소의 전신 모공에서 피 분수가 피어올랐다· 마치 압착기로 쥐어짠 듯 그의 몸에 있던 피가 안개로 화해 모조리 빠져나왔다·
현현소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전설의 일각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공야경이 눈만 끔뻑거렸다·
“하늘이··· 무너졌는가?”
그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푸르렀다· 멀쩡한 하늘이 무너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선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이제까지 믿어왔던 신념과 고정된 세계관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휴!”
진무원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추산을 상대하느라 상당한 공력을 소모한 현현소였다·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승부가 갈리는 절대고수 간의 대결에서 공력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마지막 순간 현현소는 공력이 달려서 초식의 흐름이 미세하게 끊겼다· 진무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갔다·
만일 현현소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렇게 결판이 쉽게 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무원은 이초식인 북천벽(北天壁)과 오초식인 섬광혈(閃光血)의 초식을 섞어 공격했다· 그래서 현현소가 압축기에 눌린 것처럼 온몸의 피를 분출하며 목숨을 잃은 것이다·
진무원이 공야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야경은 이제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상대는 아홉 하늘 중 일인인 마령제 현현소를 쓰러뜨린 자였다· 자신의 무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현현소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는 자명했다·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서거나 도주하지 않았다·
무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이 불과 일각 전이다· 이제와 비겁자가 되긴 싫었다·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라 할지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진무원이 그를 향해 다가와 물었다·
“왜 합공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자존심이 있는 무인이니까·”
공야경의 대답에 진무원이 수긍했다·
때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목숨을 거는 이들이 있었다·
무인의 자존심·
이제는 의미가 많이 퇴색된 옛 시대의 기치였다· 지금 무인의 자존심을 들먹이면 많은 이들이 생존이 우선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밀야에서도 꽤나 높은 직위에 있는 것 같은데 왜 배신한 겁니까?”
“나에겐 선택권이 없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공야경이 고졸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해탈한 듯 보이는 그의 미소에 진무원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듯 공야경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단 느낌이 들었다·
진무원은 이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상대의 선택이 뜻밖이긴 했지만 그가 자신의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공야경이 진무원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나 공야경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자네에게 도전하겠네· 내 도전을 받아주겠는가?”
“북천문의 진무원입니다· 공대협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진무원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공야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설랑검을 들어 진무원을 겨눴다·
공력은 충분했다· 진무원이 현현소와 싸우는 동안 운기를 하며 회복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무원은 현현소와의 싸움으로 공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조금 전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챠핫!”
공야경이 먼저 움직였다·
설랑검이 늑대의 이빨을 드러냈다· 진무원의 단봉이 허공을 그었다·
까앙!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공야경은 연이어 절초를 펼쳐 냈다· 그의 신형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좌우로 이동하면서 연신 설랑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야생의 늑대를 연상시켰다·
따다다당!
연신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봉과 설랑검이 부딪치길 수십 차례· 그때마다 두 사람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공야경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초식을 혼신의 힘을 다해 토해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즐거웠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신명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평생 수련을 하며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완벽하게 검법을 펼쳤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설랑검과 혼연일체가 된 듯한 기분· 그는 모든 공력을 설랑검에 담았다·
크허헝!
마치 설원의 늑대가 포효하는 것 같은 검명이 천지간에 울려 퍼졌다· 전신의 공력이 쭉 빠져나가 설랑검에 집중됐다·
설랑파천(雪狼破天) 그 마지막 초식이 진무원을 향해 펼쳐졌다· 진무원도 그를 향해 단봉을 쭉 뻗었다·
멸천마영검 제 육초식 무영계(無影界)가 펼쳐진 것이다·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지워져갔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공야경은 그림자가 없는 세상에 갇혔다·
쩌어엉!
다음 순간 파괴가 찾아왔다· 강력한 후폭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커헉!”
공야경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그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이 칼로 도려낸 듯 깔끔하게 사라졌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설랑검 역시 파괴되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공야경의 눈동자에서 급속히 생기가 빠져나갔다·
“이 이건 무슨 무공인가?”
“멸천마영검입니다·”
“고맙네· 내 마지막 순··· 간을 초라하지 않게 만들어줘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공야경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유독 푸르렀다· 창공을 망막 가득 담고 그는 숨을 거뒀다·
공야경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진무원의 눈가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현현소를 죽인 것은 다행이지만 공야경을 죽인 것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
“휴!”
진무원이 고개를 흔들어 애써 상념을 지웠다·
두 사람이나 되는 절대고수를 상대하면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깨지기 직전의 유리그릇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진무원은 만영결을 운용하며 내부의 들끓는 기혈을 다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진무원은 급히 운공을 중지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뜻밖의 인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지 진 소협?”
피 칠갑이 된 모습으로 눈을 크게 치뜬 여자는 바로 남수련이었다· 그녀가 역용이 풀린 진무원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남 소저가 어떻게?”
진무원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예상보다 빠르게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남수련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했다· 흑암대의 무인들은 지치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그들을 하나둘씩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포위망이 느슨해졌고 단천운이 보이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까지 달려왔다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정말 진 소협인가요?”
“그렇습니다·”
“죽지 않았나요? 아니 그보다 단 소협이 진 소협이라니····”
남수련이 혼란스러운지 머리를 흔들었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정이 있어 역용했습니다·”
“왜?”
“상대해야 할 적들이 강대하니까요·”
“그럼····”
그제야 남수련이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천하에서 알아주는 기재답게 그녀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간의 사정을 끼워 맞춰 금세 앞뒤 상황을 유추해 냈다·
“죽음을 위장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단천운이라는 인물로 재탄생했구요?”
“맞습니다·”
“운중천을 상대하기 위해? 아니 적들이라고 했으니 운중천과 밀야 양쪽인가요?”
“그렇습니다·”
“미쳤군요!”
남수련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무원은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남수련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운중천의 아홉 하늘 중 이제 겨우 두 명을 쓰러뜨렸을 뿐이다· 창룡검제 비사원은 담수천에 의해 강제로 은퇴했고 풍운번주 능군휘도 반은퇴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네 명을 제외하고도 아직 다섯 명이나 남았다· 무엇보다 모용율천에게는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한 상태다· 진무원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진무원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천성에서 북천문이 태동하고 있었다· 아직은 여물지 못한 과일처럼 불완전했지만 조만간 완숙하게 익을 것이다· 그때까지 운중천과 밀야의 전력을 최대한 약화시켜야 했다·
남수련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빛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삼 년 전에도 그의 눈빛은 고집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그녀는 진무원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무원은 그런 남수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던 남수련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분간은 더 단천운으로 살렵니다·”
“미쳤군요·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하구요?”
남수련이 만추산과 현현소 등의 시신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 하지만 진무원은 담담히 말했다·
“그들은 양패구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알려질 겁니다·”
진무원의 말속에 담긴 뜻을 못 알아들을 남수련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여전히 무모하군요·”
하지만 불가능한 계획만은 아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자신이 진무원의 행적만 증언하면 말이다·
남수련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심적으로는 진무원의 편을 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부담감이 너무 컸다· 자신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사문인 무산파의 명운까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가 갈등할 때였다·
“굳이 남 소저가 증언을 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십시오· 제가 다 감당할 테니까·”
“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진무원이 그녀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남수련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어요·”
그녀의 탄식 어린 음성이 허공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