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2장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3)
‘기해(氣海)를 바다로 삼고 신궐(神闕)을 줄기로 삼으리라· 하늘을 떠받드는 천주(天柱)여 백회(百會)를 우주로 통하게 하라· 내 마음이 움직이면 산도 바다도 움직이리라· 만상(萬狀)이 허상이지만 심상(心想)이 굳건하다면 그 또한 진상(眞狀)이 되리라·’
소무상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맑은 신광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괄목상대(刮目相對)가 따로 없었다·
소무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며칠 전의 소무상과 지금의 소무상은 또 달랐다·
진기가 막힘없이 몸 안을 휘돌고 있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만큼 소무상은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절실했다· 그런 그의 갈증과 융통무애(融通無碍)의 공력이 조화를 이루니 무서운 속도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소무상은 운공을 끝낸 후에도 한동안 그 여운을 즐겼다·
‘엽월·’
지금 이 상태라면 엽월과 자웅을 겨뤄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소무상은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공이 무섭게 발전했어도 그가 외당의 일개 무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반면 엽월은 심원의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 뒤에 두고 있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 언제고 내가 당한 수모를 되돌려 줄 날이 올 것이다·’
소무상이 북천문에 들어와서 느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인내심일 것이다·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게 마련이다· 참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면 결국 손해보고 다치는 것은 자신이다·
소무상은 진무원을 떠올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처한 상황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처참했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진무원이 절망스러워하거나 자신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처음엔 그것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의 초탈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단계 벽을 뛰어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강한 인내심의 발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정말 그일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심마에 빠져 있던 그 순간 그를 구원해 준 목소리의 주인이 진무원이 아닐까 하는·
딱히 물증이나 심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게 깨달음을 줄 만한 무인이라고 해봐야 심원의나 휘하의 무인들 정도였는데 그들이 소무상을 위해 친절을 베풀 리 만무했다·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는 담수천이 북천문에 들어온 것은 그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의 일이다·
결국 이런저런 가능성을 모두 제외하고 나니 남는 것은 진무원뿐이었다·
‘정말 그가 맞을까? 그가 나에게 깨달음을 줄 만큼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란 말인가?’
자신이 도출해 낸 결론에 고개를 젓는 소무상이다· 그만큼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그만큼 고강한 무공을 익혔다면 애초에 그렇게 고초를 겪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장패산에게 납치를 당하고 고문까지 당한 진무원이다· 그때 분명히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단 것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움에 소무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형님·”
원적심이 그가 있는 후원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조장이 모두 모이랍니다·”
“조장이?”
“저희에게 전해줄 게 있답니다·”
소무상이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심원의를 따르기로 결정한 후 장패산은 완전히 그의 충복이 되었다· 그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휘하의 조원들이었다· 부조장인 소무상은 그나마 나았지만 나머지 조원들은 심원의와 장패산의 변덕을 맞추느라 죽어나고 있었다·
“휴!”
소무상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담수천이 진무원과 은한설에게 강렬한 여운을 남긴 채 돌아갔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은한설은 담수천이 나간 후에도 한동안 들끓는 기파를 진정시키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다· 그만큼 담수천에게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담수천을 대면하자 그제야 사령이 했던 말이 이해됐다·
‘천하에 그런 남자가 있을 줄이야·’
그 강렬한 기도와 존재감은 천하의 은한설조차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자신과 동시대에 그와 같은 무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은한설의 투쟁심을 자극했다·
은한설은 자신의 무공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 중 하나를 익혔으며 그 성취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또래의 무인 중 자신을 능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담수천은 그런 그녀의 자부심과 오만함을 강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령이 그렇게 극찬한 이유가 있었구나·’
폭발하는 화산처럼 강렬한 기도와 인상이 화인이 되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았다·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문득 은한설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진무원은 상념에 잠긴 듯 찻잔을 든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무원도 자신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짐작됐다·
‘무원·’
그때였다· 진무원이 고개를 돌려 은한설을 마주 봤다· 진무원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은한설이 자신의 걱정이 기우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진무원은 그렇게 크게 충격 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은한설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이지?”
“····”
“또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 달려온 거지?”
“딱히··· 그런 건 아냐·”
“후후!”
갑자기 진무원이 은한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목갑이 들려 있다·
“뭐 뭐야?”
“열어봐·”
은한설이 조심스럽게 목갑을 열었다·
“이건?”
목갑 안을 본 은한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목갑 안에 한 떨기 꽃이 피어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꽃은 금방이라도 벌과 나비를 불러들일 듯 생동감이 넘쳤다·
머리에 꽂는 꽃모양의 장신구는 진무원이 담수천이 오기 전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다·
“나··· 한테 주는 거야?”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은한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촉촉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받는 선물이다· 장신구를 움켜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에 꽂아볼래?”
진무원의 말에 그녀가 머리에 장신구를 꽂았다· 그러자 진무원의 얼굴에 미소가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다·”
“뭐가?”
“잘 어울려· 예뻐·”
“진짜야?”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급히 만들다 보니 조악해도 좀 이해해 줘· 헤어지기 전에 무어라도 꼭 주고 싶었거든·”
진무원은 진심이다· 은한설에게서 헤어짐이 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큰 상실감을 느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은한설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크게 가슴에 자리 잡았음을· 헤어짐을 미룰 수 없다면 무어라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장신구였다·
현재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고 지난 며칠간의 고심과 그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작품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미처 몰랐다· 은한설이 이렇게 큰 자리를 차지할 줄은·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힘이 더 있었다면····’
솔직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힘만 더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붙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장 그 자신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은한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은한설이 장신구를 빼서 두 손에 꽉 쥐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다· 진무원은 그녀에게 선물을 준 첫 남자였다·
☆ ☆ ☆
거처로 돌아온 은한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는 진무원이 준 장신구가 들려 있었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꽃모양의 장신구에는 벌써 손때가 묻어 있었다·
“휴!”
결국 은한설은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그녀가 창문을 활짝 열자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몇 번 크게 숨을 들이쉬자 그나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은한설은 멍하니 진무원이 준 장신구를 바라보았다· 꽃잎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진무원이 이것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그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무··· 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은한설은 당혹해했다· 하지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였다·
스슥!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손에 공력을 모으는 그 순간 누군가 소리도 없이 그녀의 방에 나타났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검은 그림자를 확인한 순간 은한설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령 돌아왔구나·”
“소주!”
사령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자 은한설이 일으켜 세웠다·
“벌써 돌아오다니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닙니다·”
사령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주군께서 곧 이곳으로 오겠다는 전언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사부님이 직접?”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으음!”
문득 사령의 시선이 은한설이 들고 있는 장신구로 향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냐·”
“소주·”
“신경 쓸 거 없어·”
은한설이 장신구를 품에 넣었다· 그에 사령이 은한설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은한설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명심하십시오· 소주는 저희의 희망입니다· 사적인 감정을 가지시면 절대 안 되십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믿겠습니다·”
그제야 딱딱하기만 하던 사령의 음성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사령이 밖으로 나온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눌러쓴 피풍의 사이로 드러난 붉은 입술이 뒤틀렸다·
“좋지 않아·”
그는 본능적으로 은한설의 변화를 느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오던 사령이다· 은한설 본인보다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뿌득!
문득 사령의 입술을 비집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