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 3장 혼돈의 시대, 모두가 진흙탕에 발을 딛고 있다 (3)
진무원이 현현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진무원의 질문에 현현소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눈치가 제법이구나· 그의 이름은 공야경이라고 한다·”
“공야경?”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 말을 끝으로 현현소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진무원은 조용히 물러났다· 현현소가 더 이상 알려주지 않을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지? 눈치가 제법이라니?’
우태천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지만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깟 안내자의 이름이 무에 중요하기에 저 지랄이란 말이냐? 정말 할 일도 없구나·’
그의 볼이 씰룩거렸다·
안내자가 안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이 특별하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서는 공야경의 이름이 금세 지워졌다· 대신 어떻게 하면 현현소와 친분을 더 다져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저····”
우태천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현현소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현현소는 그런 우태천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아미타불!”
설공이 그런 우태천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알아가면 갈수록 감탄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 우태천은 후자의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공이 우태천을 멀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강호란 절대 평등하지 않다· 제아무리 출중한 재능과 감각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된 문파에서 체계적인 수련을 받지 못하면 일정 선 이상을 넘을 수 없었다·
결국 명문 정파에서 제대로 된 무인을 대부분 배출했고 그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가 시일이 지난 후 강호의 정상권에 자리를 잡게 마련이었다·
우태천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비록 상황 판단이나 폭급한 성정 때문에 좋은 소리를 듣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가 가진 재능이나 배경은 훗날 강호의 최정상에 서게 만들 것이다·
제아무리 소림이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 설공 역시 그와 같은 노선을 취하게 될 것이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태천 같은 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최소한 그가 강호라는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말이다·
설공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그간 우태천 때문에 은연중 진무원을 멀리했다· 하지만 우태천이 저렇게 추태를 보이는 이상 진무원과도 어느 정도 가까이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알려진 것은 공작문의 후예라는 것과 척마대를 구했을 정도로 강한 무인· 봉을 주 무기로 사용하지만 기타 잡스러운 무공에도 능통하다·’
그래서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는 공작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무척 오래전에 명맥이 끊겼다는 것뿐이고 진무원이 마지막 제자라는 것뿐이다·
‘명맥을 잇지 못해 멸문할 정도로 힘없는 문파가 이 정도의 무인을 배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정도의 문파라면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냥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여러모로 찝찔한 점이 많은 진무원이었다· 하지만 대업을 앞두고 언제까지나 거리를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설공이 진무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미타불! 단 소협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죠·”
진무원은 흔쾌히 응했다·
“저와 비슷한 나이신데 단 소협을 보면 백전노장 같습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냥 잡다한 경험이 많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쌓고 싶군요· 소림에서 나갈 일이 없으니 제 견문이 좁습니다·”
“설공 스님 정도 되시면 원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사부님이 제한을 두셔서요·”
“불영신승께서 제한을 두셨습니까?”
“예! 그 때문에 세상에 나오는 것도 늦었습니다· 사실은 이곳에 오는 것도 그리 탐탁지 않아 하셨지요·”
“어째서입니까?”
“글쎄요! 이유는 저도 모르지만 사부님께서는 소림이 세속에 관여하시는 일을 마땅치 않아 하십니다·”
“뜻밖이군요· 그래도 아홉 하늘의 일인이신데 세상사에 거리를 두시다니·”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 여쭤본 적이 있었지만 그냥 웃기만 하실 뿐 대답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공의 대답에 진무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세상사에 거리를 둔다고? 그런 자가 십삼 년 전에는 그리 독하게 북천문의 멸문을 주장했던가?’
그는 아직도 그날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홉 하늘 중 선두에서 북천문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광기 어린 모습을· 그는 아버지 진관호가 자결한 것을 보고도 직접 맥을 잡아 죽음을 확인할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그런 일련의 모습은 진무원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는 불영신승의 모습에서 부처가 아닌 아수라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세상사에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진무원이 보기엔 지독한 괴리가 있었다·
그때 설공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잠시 다른 생각 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진 시주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군요· 공작문을 나와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순간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설공 여우 같은 자구나·’
많은 이들이 신분을 조작할 때 범하는 우가 바로 조작한 신분의 삶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파탄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청인이 마련해 준 신분은 완벽했다·
단천운이라는 존재가 공작문을 나와 강호행을 하면서 겪었던 사건과 행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일말의 허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진무원은 단천운이 되어 그의 행보를 담담히 말했다· 설공은 그런 진무원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흑마채라면 녹림십팔채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자들인데 그들이 활동을 중지한 이유가 단 소협 때문이었군요· 그들과 격돌해서 오히려 해산을 시키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흑마채는 복건성에서 활동하던 녹림의 산채로 무림 방파도 무시 못 할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복건성에서 온갖 패악을 부리던 그들이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런 흑마채의 행적을 두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무성한 소문만 흘러 다니다가 금세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진짜 단천운은 흑마채와 충돌했고 그때 입은 상처로 인해 오지에서 죽었다· 단천운 때문에 흑마채는 꽤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해산할 정도는 아니었다·
흑마채를 해산시킨 이들은 바로 흑월이었다· 정보를 이용하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지 않자 흑월이 응징을 한 것이다· 그래서 단천운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것이고 그의 신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단 소협을 보니 강호의 정의가 왜 살아 있는지 알 것 같군요· 저도 그와 같은 협객행을 하고 싶습니다·”
설공은 진무원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둬들였다·
비록 산문에 갇혀 있었지만 그 역시 흑마채에 들어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진무원이 말한 내용은 완전히 일치했다· 도저히 의심할 건더기가 없었다·
설공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 후론 대화하기가 한결 편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연소소와 남수련도 끼어들었다·
젊은 사람들 간의 대화다 보니 간간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우태천은 끝까지 겉돌기만 할 뿐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공야경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말을 타고 이동할 겁니다· 위험한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 다들 대화를 잠시 멈춰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진무원 등은 순순히 공야경의 말을 따랐다·
공야경은 위험지역을 철저히 회피했다· 간혹 밀야의 다른 무인들을 만나더라도 암구호를 말해 의심을 피했다·
말은 감천 북쪽에 있는 허름한 농가의 마구간에 준비되어 있었다· 농부가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농가엔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림을 뒤흔드는 전쟁에 놀라 도망쳤거나 살해되었을 거라 짐작되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수없이 보아온 광경이었다· 밀야가 감천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수많은 이가 삶의 터전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집을 잃고 쫓겨났으며 또 어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밀야에 들어갔다· 밀야는 그런 백성들을 받아들여 무공을 전수했다· 물론 엄격한 조사와 확실한 구속 방법을 마련한 후였다·
그렇게 밀야는 감천에서 세를 늘려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길거리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이 밀야와 연관 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백성들의 삶은 파괴되었고 그들의 터전은 전쟁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일행은 감천을 벗어나자마자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황량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형적인 북방의 풍경이었다·
“북쪽이 이렇게 황량한 곳이었나?”
“그러게 말이에요·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죠? 전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아요·”
우태천과 연소소가 척박한 풍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언제 이런 살벌한 풍경을 본 적이 있을까? 그들은 결코 이런 풍경이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진무원의 눈에는 그리움의 빛이 떠올랐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던 풍경이 바로 이랬다· 이곳보다 더 척박하고 험했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아침이면 강렬한 태양이 떠오르고 밤이 되면 별들의 바다가 숨 막히게 펼쳐진다· 강인한 생명력이 없으면 한 달을 살아남기도 힘든 곳이 바로 북방이었다·
진무원은 북방의 강인함을 사랑했다· 지금 당장은 저 멀리 사천성에 터전을 잡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북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에겐 북방이 고향이었고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난세를 끝내야 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진흙탕 전쟁이 삼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암계와 귀계가 난무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길가에 나뒹구는 시신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워낙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다 보니 시신을 수습하는 일마저 포기한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이 지옥 같은 난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사이 수많은 이가 죽어나갈 것이다·
‘반드시 끝내야 한다·’
진무원이 현현소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런 혼란한 시대를 만든 이 중 한 명이 바로 현현소였다· 그의 눈에는 과연 이런 시대가 어떻게 비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진무원의 시선을 느꼈는지 현현소가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눈동자 안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현현소의 눈빛을 마주한 진무원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현현소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웃음의 의미가 비웃음이라는 것을 모를 진무원이 아니었다·
현현소는 애송이 무인이 자신을 투쟁의 상대로 여기고 있다 생각했다· 이제껏 수많은 애송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도전해 왔지만 누구도 그의 아성을 무너뜨린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진무원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그때였다· 진무원의 전방위 감각에 갑자기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백 명 이상의 무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사실을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진무원이 아닌 단천운이었다· 단천운이 현현소보다 빨리 적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현현소가 갑자기 살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놀란 말이 투레질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현소를 향했다·
“왜 그러십니까?”
“적이다·”
“적?”
공야경과 기재들의 표정이 굳었다·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바로 공야경이었다· 그가 급히 말에서 내려 바닥에 귀를 가져갔다·
“최소 이백에서 삼백 정도입니다· 대부분이 뛰어난 고수들입니다· 아무래도 밀야의 정예 같습니다·”
“추측되는 조직이 있는가?”
공야경이 고개를 저었다·
현현소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아무래도 정보가 노출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서 정보가 노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조용히 목표물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큿!”
현현소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살심이 동했을 때 나타나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그가 기재들에게 말했다·
“전투 준비를 하도록· 보다시피 우리 행적이 노출된 것 같다·”
“정말 적들이 오고 있습니까?”
“흥!”
우태천의 질문에 현현소가 코웃음을 쳤다· 대답해 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가경의가 움직였구나·’
그의 전언이 가경의에게 전달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들의 대응이 말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느껴지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다·
밀야에서도 최정예 조직이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은밀한 살기가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끈끈하면서도 정련된 살기는 진무원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으음!”
“이건?”
뒤늦게 적들의 살기를 느낀 기재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지를 뒤덮은 증오 어린 살기는 그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갈의를 입은 삼백 명의 무인·
창 도 검 봉 들고 있는 무기는 다양했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살의로 가득 찬 눈이 그것이었다·
수많은 이들을 죽여보고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살의 어린 눈빛을 무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산처럼 거대한 남자가 있었다· 어른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도끼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남자· 그를 보는 순간 현현소의 낯빛이 굳었다·
“만추산·”
“흐흐!”
거친 살기와 음소를 동시에 흘리는 거한은 바로 사대마장의 일인인 파산마부 만추산이었다·
밀야의 재앙과 무림의 살아 있는 신화가 조우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