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 3장 혼돈의 시대, 모두가 진흙탕에 발을 딛고 있다 (2)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잠이 들 시간 부현 지부는 오히려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횃불 따윈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무인들에게 이 정도의 어둠 따윈 어떤 장애도 될 수 없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거대한 연무장에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지대한 긴장감이 장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 커다란 단상이 있었다· 그 위에 홀로 서 있는 젊은 무인· 단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지만 그의 존재감은 천지를 덮은 어둠만큼이나 무겁게 주위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창천무제(蒼天武帝) 담수천이었다·
오직 천지간에 그 혼자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담수천은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진 가운데 담수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감천에 자리를 잡은 밀야를 공격합니다·”
“····”
담수천의 선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후부터 서문혜령에 의해 각 조직의 수뇌부가 모조리 소집되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조만간 대공세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그들의 짐작은 사실이 되었다·
“선두는 나 담수천이 설 겁니다· 나는 절대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위험도 회피하지 않을 겁니다·”
“····”
“겁이 나는 분들은 지금이라도 빠지십시오· 누구도 잡지 않을 겁니다·”
“····”
담수천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명 뒤로 빠지지 않았다·
담수천의 음성엔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백배하고 투지가 들끓어 올랐다·
‘창천무제와 함께라면····’
‘저 남자와 같이 싸우고 싶다·’
연무장 전체가 기이한 열기에 휩싸였다· 그 근원에 담수천이 있었다· 그런 담수천을 바라보며 서문혜령이 눈을 빛냈다·
‘그래! 이거다· 무공만 따지면 아직 수천이 천하제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저 밑바닥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는 힘은 수천이 천하제일이다· 수천이야말로 천하제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근자에 등장한 살천랑이나 단천운이 무공은 강할지 모르지만 수천과 같은 존재감이나 장악력은 없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적엽진인을 죽이면서 세상에 큰 충격을 던져 준 살천랑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무공은 강할지 모르지만 강호의 그 누구도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일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단천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기에 처한 척마대를 구함으로써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후 행보를 보면 너무나 평이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서문혜령이 내린 결론은 결국 하나로 귀결됐다·
담수천· 오직 그만이 지금의 난세를 끝낼 자격이 있었고 모용율천에게 도전할 자격이 있었다·
눈앞의 광경을 보며 그녀의 확신은 더욱 공고해졌다·
수천 명이 담수천 일개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열광하고 투지를 불태웠다· 천하의 그 누구도 이런 광경을 연출할 수는 없었다· 오직 담수천이기에 가능한 광경이었다·
잠시 오연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담수천이 마침내 사자후를 터뜨렸다·
“전군 출진한다·”
“우와아아!”
순간 군웅들의 입에서 이제까지 겨우 억누르고 참았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환호는 뇌성이 되어 천지를 흔들었다·
잠자고 있던 새들이 깨어나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고 밤이 요동쳤다· 그리고 수천 명의 무인이 부현 지부를 나섰다· 그 선두에 담수천이 있었다·
부현 지부를 나선 무인들은 다시 세 갈래로 갈라졌다·
담수천이 이끄는 중군과 좌우 날개· 각 날개는 구대문파에서 파견 나온 장로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담수천이 이끄는 중군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진용을 짜고 인원을 배치한 이는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언뜻 복잡하게 보이는 진용이지만 그 의도는 의외로 간단했다·
담수천의 무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진영· 그러니까 오직 담수천을 돋보이게 만드는 진용인 셈이다·
담수천의 뒤를 심원의가 이끄는 척마대가 따르고 있다· 그 뒤를 부현 지부의 정예와 현무대의 무인들이 든든하게 받치는 진용· 자잘한 반항 따윈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이번엔 서문혜령도 출진했다· 직접 전장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서문혜령이 세상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서문세가의 책사들이 포진했다· 중군과 날개에도 서문세가의 책사들이 파견됐다·
‘이번 전쟁에 실패는 있을 수 없다· 이 서문혜령이 지휘하는 이상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현무대를 적진에 밀어 넣어 쭉정이를 걸러냈다·
그녀는 승리를 확신한 듯 미소를 지었다·
담수천이 이끄는 중군은 거침없이 밀야의 진영이 자리를 잡은 감천을 향해 내달렸다·
서문혜령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책사 붉은색 깃발을 들어 올렸다·
순간 중군에서 일부 무리가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중군보다 빨리 내달렸다· 적의 척후를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현무대를 투입해 척후의 배치를 알아냈기에 그들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습격이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밀야의 척후들이 뒤늦게 습격을 눈치채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너무 늦었다·
“컥!”
운중천의 무인들은 가차 없이 그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리고 죽음이 난무했다· 그렇게 피 보라가 몰아쳤다·
수많은 척후들을 제거했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에 의해 운중천의 기습 사실이 알려졌다· 감천에 있는 밀야의 진영에서도 급히 병력이 출진했다·
그 중심에 가경의가 있었다· 그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
그 역시 천재라는 부류였다·
진무원에게 야주의 습격을 경고받은 이후 항상 운중천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밀야의 야주를 암살하는 일이었다· 분명 시선을 돌리기 위한 대규모 도발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가경의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은 시기였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문혜령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짧은 시간 동안 준비를 갖추고 도발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초반의 피해가 예상보다 커졌다· 하지만 기선이 제압당했다고 해서 싸움이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가경의가 천무대주 궁상화를 바라보았다·
“이미 말한 대로 움직여 주셔야겠습니다 궁 대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사·”
궁상화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은 채 출병했다·
가경의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역시 병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천무대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천무대가 움직이고 이어서 밀야의 각 조직들이 움직였다·
“승부다 서문혜령·”
가경의가 적진 한복판을 노려보았다·
수많은 무인들이 철옹성을 쌓은 그곳 어딘가에 서문혜령이 있을 것이다· 이번 전쟁은 그녀와 자신의 두뇌 싸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전신의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검은 피풍의를 입은 노인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냉정을 유지하게·”
“신창 어르신·”
노인은 바로 흑익신창 우문천이었다·
우문천은 전장을 주시할 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그가 나설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이쪽이 비장의 패를 감추고 있는 만큼 운중천 역시 비장의 패들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저들의 패를 보며 이쪽 역시 대응해야 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전쟁의 향방이 갈릴지 모르겠군·”
겉으론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투지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가 가경의를 돌아보았다·
“야주는 위험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가경의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거대한 함성과 살의가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꽤나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도 가공할 살기에 피부가 다 저릿저릿했다·
‘시작했군·’
진무원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전쟁이 재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진득하면서도 가공할 살기는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발산이 가능했다·
다른 기재들도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하고 표정이 굳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렇게 전개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천하의 운명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절로 답답해졌다·
그들은 현재 서문화가 알려준 거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곳 역시 삼엄한 경계가 세워져 있을 테지만 전쟁이 재개되면서 대부분의 전력이 빠져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덕분에 진무원과 기재들은 별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감천 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거점에는 마령제 현현소와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현현소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그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위압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령제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재들은 그런 현현소를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원하고 오르고자 하는 정상에 선 자의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반드시····’
그들의 가슴속에 비슷한 열망이 생겨났다·
그렇게 모두가 현현소를 바라보고 있을 때 진무원은 그의 곁에 있는 중년인에 집중했다·
‘저자가 안내자인가?’
서문화는 안내자가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야주에게 자신들을 안내할 거라고 말했을 뿐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평범함 속에 숨겨진 비범함을 보았다·
언뜻 마른 듯 보였지만 그건 불필요한 근육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가지를 모두 쳐내고 속도에 치중한 것인가?’
무기라고는 허리에 찬 뾰족한 쇠꼬챙이뿐이다· 쇠꼬챙이 표면에 새겨져 있는 미세한 홈이 보였다· 회오리를 그리며 파인 홈은 쇠꼬챙이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빠른 속도에 가장 적합한 형태· 역시 이자는 쾌검을 익혔군·’
단순히 쇠꼬챙이만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다· 그의 체형과 손의 모양 그리고 근육의 발달 정도까지 파악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 역시 경계해야 할 자·’
하지만 진무원은 절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재들은 현현소에게만 정신이 팔려 안내자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길잡이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안내자가 현현소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미리 준비한 무복을 건네줬다·
“다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으시고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지금 이걸 입으라는 것인가?”
우태천이 인상을 썼다·
볼품없는 청의 무복이었다· 싸구려 재질로 만든 듯 무복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항상 질 좋은 비단옷만 입는 우태천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싸구려 무복을 입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해봤다·
“밀야의 후방 지원대들이 주로 입는 옷입니다· 일단 이 옷만 입어도 의심의 시선을 한결 피해 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슨 잔말이 그리 많지?”
순간 현현소의 싸늘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살기 어린 시선에 우태천의 입술이 조개처럼 굳게 닫혔다·
현현소가 먼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청의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태천은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아미타불!”
설공이 옷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수련과 연소소가 얼굴을 붉히며 근처의 수풀로 들어갔다·
진무원도 설공을 따라 재빨리 청의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태천도 옷을 갈아입었다· 뒤이어 남수련과 연소소가 나왔다·
현현소가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되었으면 출발하지·”
“예!”
“안내하도록·”
“저만 따라오십시오·”
기재들과 안내자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진무원은 맨 뒤에서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내자는 주위의 지형에 무척이나 익숙한 듯했다· 그는 경계가 서 있는 곳을 귀신같이 피해 감천으로 들어갔다·
운중천의 대공세 때문에 감천은 지금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청의 무복을 입은 진무원 일행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는 마치 진짜 밀야의 무인처럼 자연스럽게 일행들을 이끌었다·
진무원은 안내자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가 안내자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밀야의 무인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밀야의 무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