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 2장 괴물은 혼자 탄생하지 않는다 (2)
가경의는 찻잔을 들었다·
은침차라고 불리는 고급 차였다· 오직 동정호에서만 나기엔 이런 척박한 북방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그런 귀물이었다·
가경의 앞에는 검은 피풍의를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떤가?”
“좋군요· 은침차가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맛보니 상상 이상이군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자네를 위해 특별히 구해 왔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은 바로 흑익신창 우문천이었다·
우문천은 부현에 하루를 머문 후 바로 밀야의 진영으로 넘어왔다· 가경의는 그런 우문천을 극진히 대접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근심이 많은 모양일세·”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군사가 흔들리면 밀야도 흔들리네· 부디 보중하시게·”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 근심을 끼쳐 드렸군요·”
“아닐세·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내가 능력만 좀 더 있었어도 자네가 이리 노심초사하지 않았을 텐데·”
“신창께서는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제게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자네도 그렇다네· 그러니 자책할 필요 없다네·”
“혹시 마영좌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순간 우문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정말인가? 천명 그 친구의 소식이 끊긴 것이·”
“사실입니다·”
“으음!”
우문천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청풍마영 남천명은 그의 오랜 친우였다· 같은 사대마장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와는 유달리 마음이 잘 맞았다· 덕분에 술잔도 많이 기울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같은 사대마장이었지만 파산마부 만추산은 성격이 열화와 같아서 그와는 맞지 않았고 백야마녀 소금향은 여자라서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오직 남천명만이 그의 지기라 불릴 만했다· 그런 남천명이 사천성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어떻게 된 건가?”
“사천성에 새로운 세력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척이나 강하고 은밀합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당금 천하의 정세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아미와 당문 청성이 확고히 자리를 잡은 사천성에 새로운 세력이 발붙일 틈이 어찌 있단 말인가?”
우문천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천성의 폐쇄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문천이었다· 아미 당문 청성이 자리를 잡은 사천무림은 중원의 그 어떤 지역보다 폐쇄적이었고 텃새가 심했다· 그 때문에 신흥 문파가 사천성에 자리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세 문파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문파가 태동했거나 혹은 세 문파의 연합이 출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당장 전력을 파견해서 그들의 실체를 밝혀야 하지 않는가? 자칫 그들이 배후를 치면 우린 앞뒤로 대적을 맞이하게 되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는가?”
“실은····”
가경의는 진무원과의 만남을 담담히 풀어놨다·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우문천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단천운이라니·”
“그를 아십니까?”
“실은 부현에 잠깐 들렀을 때 그자를 만났네· 단순히 후기지수 중 제법 강한 아이라고 생각했네만·”
“어쩌면 마영좌의 죽음에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가경의의 말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우문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때 제거했어야 했는데·’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다고 생각했던 진무원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가 친우인 남진명의 죽음과 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다·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때문에 살기를 가라앉히느라 애를 써야 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를 제거해야지 않겠는가? 명만 내리게· 나 홀로 부현에 들어가 그의 목을 따 오겠네·”
“신창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하나····”
“운중천이 먼저입니다· 사천성에서 태동하고 있는 제삼세력은 그다음입니다·”
가경의는 의지는 확고했다· 그의 의지는 곧 밀야의 의지였다· 우문천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의 뜻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정말 그가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 보는가?”
“전 그렇게 봅니다·”
“자네의 생각이 맞겠지· 이제까지 자네의 결정이 틀린 적은 없었으니· 하나 한 가지만 약조해 주게·”
“말씀하십시오·”
“운중천과의 전쟁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주게·”
“물론입니다·”
“그럼 됐네·”
우문천의 대답에 가경의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우문천이 남천명의 복수를 고집했으면 그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참 야주께서는?”
“조만간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그럼?”
“대공을 이루기 직전이라 합니다·”
“오오!”
우문천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흥분된 마음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대공을 이루는 대로 바로 이곳으로 달려오실 겁니다·”
“다행이군· 아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은 부야주의 배신이 야주의 대성을 도와준 셈이니·”
부야주 장무경의 배신은 밀야 내부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야주였다·
당시 야주는 밀야의 총화가 집약된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나 장무경의 배신으로 인해 극심한 내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사대마장과 육마존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내상을 치료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처음엔 운신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내상은 심각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운공을 했다· 육신을 움직일 수 없기에 더욱 운공과 심상의 수련에 몰두했고 어느 순간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너무 커서 한 번에 소화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야주는 깨달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이제는 그 결실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다·
그야말로 밀야의 모든 이가 원하는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밀야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야주를 뵐 날이 기다려지는군·”
“머지않았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야주가 합류하기 전까지 저들에게 타격을 최대한 줘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는가? 군사를 전적으로 믿고 있으니 명령만 내리게· 내 군사의 수족이 되어 명을 따를 터이니·”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른 사대마장들도 합류를 할 겁니다· 그때까지 신창께서 고생해 주셔야겠습니다·”
“물론일세·”
우문천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군사 급보입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가경의의 안색이 굳었다· 그가 급히 말했다·
“급보? 들어와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밀야의 정보를 담당하는 진무당(眞武堂) 소속의 무인이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신이 들려 있었다·
중년인이 들고 있던 서신을 급히 가경의에게 바쳤다· 서신을 펼쳐 읽어 내리는 가경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우문천이 물었다·
“서 장로님의 전언입니다·”
“서곽? 부현에 있는 서곽 말인가?”
“그렇습니다· 누군가 은밀히 그에게 접근을 해 이런 서신을 전했다는군요·”
“그럼 서곽의 정체가 탄로 났단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
가경의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문천에게 서신을 건넸다· 우문천이 급히 서신을 읽었다·
“두 마리 새가 날아오를지니· 어둠의 령은 이목을 끌고 암전(暗箭)은 밤의 주인을 노릴 것이다· 이게 무슨?”
서신 안에는 의미 모를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우문천은 내용을 해독할 수가 없었다·
가경의가 물었다·
“혹시 서 장로님이 외부에 노출될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일이··· 아 그 친구의 국숫집에서 단천운을 만났네·”
“그럼 이 서신은 그가 보내는 전언이겠군요·”
가경의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우문천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언? 그가 우리에게 전언을 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가 정말 제삼세력과 연관이 있다면 우리와 운중천이 최대한 오래 싸우는 것을 원할 겁니다· 만일 야주께서 암습을 당해 죽는다면 밀야가 가장 먼저 멸문을 당할 것이고 그다음은 제삼세력 차례일 테니까요·”
“하지만····”
“두 마리 새가 날아오른다? 하나는 어둠의 령이고 다른 하나는 암전· 즉 몰래 쏘아진 화살· 어둠의 령? 마령제를 말함인가? 그렇다면 암전은?”
가경의의 두뇌가 무섭게 돌아갔다· 우문천은 입을 다물고 그런 가경의를 지켜보았다· 이럴 때는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낫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가경의가 결론을 도출해 냈다·
“두 마리 새는 야주를 암살하기 위한 양동작전을 의미한다· 마령제는 이목을 끄는 미끼· 그렇다면 암전은 진정한 암살자를 뜻하는 건가?”
“그럼 이 전언이 야주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뜻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문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천운의 전언을 믿을 수 있겠는가?”
“확실히 믿을 수는 없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겁니다·”
“음!”
“정말 이 전언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이를 이용해 운중천에 한 방 먹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
“제가 단천운의 입장이라면····”
☆ ☆ ☆
진무원은 자신의 거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본의 아니게 감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외부에 나설 때마다 감시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때 밖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진무원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비의 손에는 음식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시비가 진무원이 탁자에 가져온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숙수가 전하길 오늘은 사람이 없는 개울가에서 잡은 송어가 좋다네요·”
순간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식으면 맛이 없으니 얼른 드시라고 하네요· 그럼 저는····”
시비가 고개를 조아린 후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진무원이 젓가락을 들어 송어를 헤집었다· 그러자 뱃속에 숨겨진 조그만 쪽지가 보였다·
‘사람이 없는 개울’은 은류(隱流)를 의미했다· 즉 이 쪽지는 은류의 수장인 청인이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진무원이 급히 쪽지를 읽었다·
“창고 쪽에서 소요· 어린 탕마군이 도주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이 추적 중·”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