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 1장 군림하는 자, 타인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다 (2)
“으으!”
피투성이가 된 무인이 황아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무인의 가슴은 움푹 함몰되어 있었고 팔 다리는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회생하기 힘든 치명상이었다·
은한설과 무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인의 눈에서는 이미 초점이 사라졌다· 흐려지는 동공과 함께 그의 생명의 불 역시 꺼지고 있었다·
은한설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최소한 자신만큼은 그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무인이 은한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은한설을 잡기라도 하듯이 허우적거리던 손이 이내 툭 떨어졌다·
“휴!”
은한설의 입술을 비집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죽음이 가까운 무림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그녀일지라도 타인의 죽음을 보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한선우는 아예 고개를 돌려 무인을 외면했다· 아직 어린 한선우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하지만 하진월의 제자가 된 이상 필연적으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획과 말 한마디 때문에 죽게 될지도 몰랐다·
무림에서 군사의 운명이란 그렇게 가혹하며 무서운 것이었다· 은한설은 이번 기회에 한선우가 그런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길 바랐다·
“분명 이곳으로 들어갔는데·”
그 순간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거친 마의를 입은 장한이 모습이 드러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였다· 장한의 뒤에는 수하로 보이는 남자 다섯 명이 따르고 있었다·
장한이 황아의 발치에 쓰러진 남자의 시신을 보고 눈을 빛냈다·
“흐흐! 놈 여기서 뒈져 있었군·”
시신을 잠시 바라보던 장한의 시선이 곧 황아를 지나 은한설에게 옮겨갔다·
“호!”
장한의 눈이 빛났다·
비록 방립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굴곡진 몸매만으로도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흐흐! 이게 웬 떡이냐?”
장한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자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알고 보니 이놈이 복을 몰고 왔구나· 죽어서도 이런 미인의 곁으로 인도하다니·”
“흐흐! 이게 다 형님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표국을 털었는데 이런 어여쁜 계집이 나타나다니·”
장한의 뒤에 있던 뱁새눈의 사내가 두 손바닥을 비비며 아부를 했다· 그도 은한설을 보고 입을 떡 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장한이 은한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계집아 어서 방립을 벗고 이 어르신의 품에 안겨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안겨주마· 흐흐!”
“어서 달구지에 내리지 못하겠느냐? 탁탑천마(擢塔天魔)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장한과 뱁새눈의 사내 말에 은한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탁탑천마?”
무척이나 광오한 별호다·
당금 강호에 마도를 표방하는 수많은 무인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천마라는 별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밀야에도 감히 천마라는 별호를 사용하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이런 이름 모를 관도에서 천마라는 별호를 사용하는 무인을 만났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매우 형편없었다· 물론 은한설의 기준에서였다·
은한설이 한선우를 바라봤다· 들어본 적 있냐는 눈빛이었다· 당연히 한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도적들 같네요· 이 근처에 자리 잡은 녹림도가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아마 최근에 유입된 것 같아요·”
“도적들?”
“녹림에 제대로 된 산채가 자리를 잡으면 필연적으로 소문이 나니까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마 군문의 탈영병이나 여느 문파의 낙오된 자들이 모여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한선우의 말에 탁탑천마라 불린 장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선우가 정확히 그의 정체를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장한의 이름은 소원광· 본래는 운중천 외당의 제칠당주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운중천을 무단 탈퇴하여 도적이 되었다·
한때 운중천에 몸을 담았기에 그는 누구보다 강호의 동향에 해박했다·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곳엔 흔한 무관이나 방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잡은 녹림도도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관도를 이용하는 표국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고 선점하기만 하면 무조건 약탈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입지 조건이었다·
소원광은 덩치가 큰 표국이나 강해 보이는 자들은 철저히 피했다· 그의 목표는 규모가 작은 표국이나 서너 명씩 몰려다니는 영세 상인들이었다·
소원광은 그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약탈을 했고 모든 이를 죽여 철저히 증거를 인멸했다· 그렇게 그의 손에 죽은 이들의 수만 거의 오십여 명이 넘어갔다·
오늘도 그는 이곳을 지나는 조그만 상단을 약탈했다· 물론 증인은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원광이 한선우와 은한설을 노려봤다· 순식간에 자신의 정체를 추리해 내는 한선우에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설마 운중천에서 보낸 추격자들이냐?”
“운중천 출신인가 보군요· 요즘 심심치 않게 운중천의 무인들이 도적으로 돌변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사실인 것 같네요·”
한선우의 말에 은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소원광의 정체를 추측해 내는 그의 말에 감탄을 했다·
‘역시 군사가 택한 아이답구나·’
괜히 북천문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감히 이것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소원광의 화가 폭발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눈에는 오직 은한설만이 들어왔다· 어서 빨리 은한설을 제압해 그녀와 뒹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욕념에 눈이 먼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사악!
은한설이 가볍게 손을 흔드는 순간 소원광의 몸이 멈칫했다· 그런 소원광의 모습에 부하들이 흠칫했다·
“대장 왜?”
그 순간 그들은 보았다· 소원광이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크헉!”
소원광의 처절한 비명성이 관도에 울려 퍼졌다· 은한설의 내가중수법에 내부의 장기가 모조리 터져 버린 것이다·
“대장? 제길! 튀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부하들이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은한설은 그들이 도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무형의 경기가 일어나 해일처럼 그들을 덮쳤다·
“우와악!”
“크악!”
해일에 휩쓸린 개미처럼 부하들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나무와 바위에 부딪친 후에야 그들의 몸이 멈춰 섰다·
“아!”
그 광경을 지켜본 한선우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여섯 명의 남자가 목숨을 잃었다· 비록 그들이 도적이라 할지라도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은한설은 그런 한선우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한 것 같아?”
“솔직히 모두 죽일 필요까지는····”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그들은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약탈했을 거야· 그럼 더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
“음!”
“저들이 단순한 도적들이었다면 나도 굳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저들은 이미 운중천에서 피 맛을 알아버렸어· 더군다나 무공까지 강하고 판세를 보는 눈이 있으니 곧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을 거야· 그러면 그 후환이 끝이 없었을 거야·”
“그렇군요·”
그제야 한선우는 은한설의 행동을 납득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은한설도 한선우가 완전히 이해하길 바라지 않았다·
‘무림의 은원은 끝이 없는 법· 끊을 수 있을 때 끊어둬야지 안 그러면 훗날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돌아올지 알 수 없지·’
한때 마녀라 불렸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했던 은한설이었다· 결국 그녀가 깨달은 것은 은원은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면 최소한으로 여파를 줄이는 것이 차선이었다·
은한설은 도적들에게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해 근처에 안장한 후 길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도적들의 시신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진무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외부와 접촉할 일이 없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내의 공기가 변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한쪽에서 우태천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패배의 굴욕감을 떨쳐 버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노려보기만 할 뿐 아직까지 진무원에게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우태천은 아직까지는 정면으로 부딪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기회가 올 것이다· 내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가·’
참고 또 참는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진무원을 보면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진무원을 노려보며 설욕할 기회만 노렸다·
그와 반대로 연소소는 진무원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강한 남자는 어디서나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진무원은 잠룡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그랬다·
아직까진 진흙투성이 연못에 머물고 있지만 밀야의 야주를 제거하면 그 명성이 천하를 울릴 것이다·
그녀의 아비가 막주로 있는 용린살막은 오직 강한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그녀의 아비 역시 전대의 막주를 쓰러뜨리고 지금의 자리를 쟁취했다·
그런 광경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기에 그녀 역시 언젠가는 막주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문제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었다· 타인은 믿을 수 없었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을 만한 배우자를 얻는 것이다·
연소소는 진무원을 자신의 배우자 후보 중 한 명으로 올렸다· 물론 진무원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결코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아직 지켜볼 기회는 많으니까·’
그녀는 임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칠소천 중 세 명이 함께하고 소림의 기재인 설공도 동행한다· 무엇보다 이들을 이끄는 이는 무려 아홉 하늘 중 하나인 현현소였다· 이 구성으로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연소소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제야 진무원이 고개를 들었다· 감시자는 밖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감시자였다· 서로가 서로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사소한 행동을 하더라도 서문화의 귀에 전해질 것이다·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진무원은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은 야주가 죽어서는 안 된다· 그가 죽으면 밀야는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 것이고 경쟁자가 없는 운중천은 흔들리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들의 전쟁을 끝내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야주가 살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운중천의 전력을 소진시켜야 했다·
‘서문화는 분명 야주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현현소와 같은 거물을 불러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야주의 무력은 미지수· 현현소가 강하다고 하지만 그 혼자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여우 같은 서문화가 그런 사실을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해놔야만 안심을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현현소가 움직이면 필연적으로 밀야의 경계망에 포착될 것이다· 그는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만천하에 존재를 알렸다·
진무원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군· 왜? 미끼 그렇군· 그는 미끼군· 밀야의 이목을 집중시킬 미끼· 그렇다는 것은 야주를 암살하려는 자는 따로 있다는 이야기·’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서문화가 굳이 왜 자신과 기재들을 현현소에게 붙였는지도· 저들의 시선을 최대한 분산시키려는 것이다·
‘진짜 암살자는 따로 있군·’
문제는 누가 진짜 암살자냐 하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진무원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리로 추리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진무원이 몸을 일으켰다·
이 이상 머리를 써봐야 나올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직접 움직여야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태천이 다가왔다·
“어디 가려는 것인가?”
“외출 좀 하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기에?”
우태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진무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우태천이었다· 자연 그의 말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무슨 문제가 됩니까?”
“밀야의 야주를 암살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았다· 자연 보안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외출을 자제해야지·”
“지금 내가 비밀을 유출할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흥!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우태천이 콧방귀를 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질시에 눈이 먼 우태천에겐 잘잘못을 가릴 이성이 없었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니 공방에 가서 봉을 손질하려고 합니다· 내친김에 몇 가지 준비도 더 하구요· 그런 것을 일일이 우 소협에게 허락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우태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무원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꺼림칙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흥!”
결국 우태천은 콧방귀를 다시 한 번 끼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진무원은 그런 우태천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우태천의 볼이 씰룩거렸다·
“건방진 자식!”
“아미타불! 이제 같은 길을 가야 할 동료입니다· 우 소협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흥! 저자 편을 드는 것이오?”
“누구 편을 들겠다는 게 아니잖습니까?”
“놈은 이미 망한 문파의 후인 누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 잘 생각해 보시오·”
우태천의 노골적인 발언에 설공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태천의 성격이나 옹졸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칠소천이라는 위명과 그의 배경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미타불!”
결국 설공은 애꿎은 염불만 외며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