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 8장 바람이 불면 구름이 움직이게 마련이다 (4)
곽문정은 좌불안석이었다· 자라처럼 고개를 움츠린 채 진무원과 함소령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진무원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곽문정을 탓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진무원과 곽문정의 사이를 잘 알지 못하니 속아 넘어갔겠지만 함소령처럼 눈치가 빠르고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이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진무원의 얼굴 근육이 변화를 일으켰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함소령이 활짝 웃었다·
“역시 무원 오빠였군요·”
“오랜만이구나·”
진무원이 미소로 화답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곽문정이 공동파를 위해 내어준 안가였다· 다행히도 안가는 비어 있었다· 함지평이 공동파의 무인들과 외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전 진짜 무원 오빠가 죽은 줄 알았어요·”
“사정이 있어서 알리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렇게 오빠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전 만족해요·”
“많이 컸구나· 이젠 숙녀티가 풀풀 나· 문정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진무원의 칭찬에 함소령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곽문정이 그런 함소령을 보며 웃었다·
“함 대협은 어떠시냐?”
“덕분에 잘 지내고 계세요· 무공도 완전히 회복하셨구요·”
“다행이구나·”
“모두 오빠 덕분이에요·”
“내가 한 일이 무에 있느냐? 다 너와 함 대협이 한 일이지· 어쨌거나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구나·”
“헤헤! 아빠도 오빠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분명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세상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그렇더냐?”
“네! 하늘이 내린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면서요· 저도 반신반의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빠 말이 맞았네요·”
“고맙구나· 아무것도 아닌 나를 그렇게 믿어줘서·”
“오빠가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데요·”
함소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예뻤다· 이제는 소녀라기보다는 숙녀가 더 어울리는 함소령이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고 또한 많은 것이 변했다·
진무원은 함소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함소령은 똑똑한 아이였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도 그녀는 진무원이 왜 역용을 하고 이곳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함 대협에게 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알았어요·”
“각별히 조심하거라·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나를 찾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함소령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웃을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지옥도가 펼쳐질지 모르는데 이런 곳에 함소령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그러나 함소령 역시 무림에 적을 둔 무인이다·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안전한 곳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사선을 걷는 것은 무인의 숙명이었다·
진무원은 함소령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안가를 나왔다· 그의 곁으로 곽문정이 따라붙었다·
“형 화난 건 아니죠?”
“내가 왜 화를 내겠느냐? 괜찮다·”
“다행이다· 휴!”
그제야 곽문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
“헤헤!”
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길을 걸었다·
곽문정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함소령을 만난 것도 좋았지만 진무원과 함께 걷는 것도 즐거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낯선 인영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 소협·”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인물이 진무원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멋스럽게 기른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문사였다·
“누구십니까?”
“전 서문세가에서 온 서문중일이라 합니다· 태상가주님께서 단 소협을 찾으십니다·”
“서문 대협이?”
“저와 함께 가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서문중일의 말은 권고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진무원이 거절하리란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이다·
진무원도 서문화의 초대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곽문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알았다는 듯이 곽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알아서 빠져주는 것이다·
“금방 다녀오마·”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그래·”
진무원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곽문정은 진무원이 서문중일을 따라 멀어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서문중일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부현 지부가 아닌 외곽이었다· 진무원은 서문중일을 따르면서 유심히 살폈다·
외부로 발산하는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걸음걸이가 무척 안정적이다· 자신의 기세를 감출 정도로 무공을 익혔다는 뜻이다·
세상에 알려진 서문세가는 문사들의 가문이다· 많은 이들이 서문세가가 머리만 잘 쓰는 줄 알고 있다· 하지만 무림에 적을 둔 사람들이라면 서문세가가 얼마나 고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서문세가엔 수많은 무공이 존재했지만 그중 백미는 바로 뇌를 십 할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전뇌호천공이었다· 전뇌호천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력을 얻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전뇌호천공은 익히기가 극히 까다로울뿐더러 서문세가의 가주에게만 익힐 자격이 주어졌다· 예외라면 오직 서문혜령 한 명뿐이었다·
서문세가에는 전뇌호천공뿐 아니라 수많은 무공이 존재했다· 서문중일도 그중 하나를 익혔고 절정의 실력을 뽐냈다·
진무원은 그런 서문중일의 실력을 꿰뚫어 봤다· 솔직히 진무원에 비하면 서문중일의 무공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무공 실력만 따지자면 그보다 나은 자가 강호에 부지기수였다·
문제는 서문중일이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서문세가의 사람답게 뛰어난 두뇌를 자랑했다· 서문세가 내에서는 그리 중한 취급을 받지 못하더라도 강호 어느 문파에서나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천재인 것이다·
서문세가에는 서문중일과 같은 문무겸전의 인재가 넘쳐 났다· 서문세가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런 문무겸전의 인재를 끝없이 배출해 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출한 문무겸전의 인재들은 끝없이 강호의 동향을 파악해 서문세가와 운중천에 유리한 방향으로 강호의 정책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수법은 매우 교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무적세가보다 무서운 곳이 서문세가일지도····’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서문화가 모용율천의 책사를 자처한다면 서문혜령은 담수천의 책사를 자처하고 있었다· 현재는 모용율천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시일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어쨌거나 서문세가로서는 하등 손해 볼 일이 없었다· 모용율천의 시대가 계속되어도 좋았고 담수천의 새로운 시대가 열려도 상관없었다· 그 어느 쪽이 승리자가 되든 서문세가가 누리는 이인자로서의 영화는 지속될 테니까·
‘난세를 끝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은 바로 서문세가·’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하지만 진무원은 철저하게 속내를 감췄다·
서문중일을 따라 도착한 곳은 부현 북쪽에 있는 조그만 강가였다· 강가에는 허름한 정자가 있었고 정자 안에서는 서문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문화 앞에는 소박하게 차려진 주안상까지 있었다· 서문중일이 서문화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단 소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음! 넌 물러가 있거라·”
“예!”
서문중일이 조용히 물러가고 두 사람만 남았다·
“자리에 앉지·”
진무원은 서문화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서문화 정도의 인물이 주안상까지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 거기다가 주안상 위에 놓인 잔이 세 개다· 자신 말고도 초대한 인물이 한 명 더 있다는 뜻이다·
진무원이 자리에 앉자 서문화가 미소를 지었다·
“새로 옮긴 숙소는 지낼 만한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함께 지내게 된 아이들은 어떻던가?”
“괜찮더군요·”
“그런가? 다행이군·”
서문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칠소천 중 무려 세 명이나 함께 몰아넣었다· 괜찮을 리 만무했다· 담수천과 서문혜령의 존재감 때문에 퇴색된 감은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칠소천이다·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이자 개개인이 노강호에 뒤지지 않는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
강한 무력만큼이나 대쪽 같은 자존심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진무원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역시 서문화였군·’
처음부터 누군가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칠소천 중 세 명을 한자리에 몰아넣고 거기에 소림의 최고 기재라는 설공까지 집어넣었다· 진무원까지 하면 모두 다섯 명· 또 누가 추가될지 모르는 일이다·
서문혜령이 주도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규모가 컸다· 그래서 서문화가 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문화가 웃으며 진무원의 잔에 술을 따랐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일단 술부터 한잔하지·”
“그러지요·”
서문화의 말대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진무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하의 귀제갈을 상대하는 일이다· 조급할수록 불리해지는 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진무원은 느긋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오히려 서문화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역시 내 예상대로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친구답지 않게 침착하단 뜻이니 곡해하지 말게·”
“그런가요?”
“내 강호에 알려진 기재를 여럿 만났지만 자네보다 침착하거나 냉정한 이는 거의 보지 못했네· 대부분의 기재들은 무력은 뛰어나지만 젊은이답게 혈기가 왕성해 판단력이 떨어지지·”
서문화의 극찬이었지만 진무원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의 경험상 이렇게 상대를 치켜세워 줄 때는 그만큼 원하는 것이 크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화법에 넘어가 신세를 망친 젊은 무인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닐세· 나의 눈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니 자네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되네·”
“감사합니다·”
“자네는 충분히 큰 가치가 있는 사람일세· 자네라면 강호의 영웅이 되어 능히 공작문을 다시 훌륭하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네·”
“영웅?”
“그래 자네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가? 강호를 구한 영웅이·”
서문화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제가 어떻게···?”
“자네라면 충분하네· 거기다 칠소천 중 셋 그리고 소림사의 기재인 설공까지 더하면 충분하면 충분했지 절대로 모자라지는 않을 걸세·”
서문화의 화술은 교묘했다· 그는 진무원을 한껏 치켜세우며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할 수밖에 없게 유도하고 있었다· 진무원뿐만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라도 서문화에게 걸리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서문화의 화술에 넘어가 신세를 망치거나 죽은 무인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무원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강호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간단하네·”
“무슨?”
“밀야의 야주를 제거해 주게·”
“예?”
순간 진무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서문화가 이런 제안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문화는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밀야의 야주는 정체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비인인데·”
모용율천보다 더한 신비인이 바로 밀야의 야주였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도 알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자네의 말이 맞네· 하지만 우리는 매우 오랫동안 밀야의 야주를 추적해 왔네· 결국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지·”
야주의 정체와 행적을 알아냈다는 뜻이다·
진무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령 야주의 정체를 알아냈다 할지라도 저 혼자로는 무립니다·”
“자네 혼자가 아닐세·”
“칠소천 셋과 소림사의 설공이 더해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왜?”
“자네들이 직접 행하라는 것이 아닐세· 자네들은 그저 보조만 하면 된다네· 야주를 죽일 자는 따로 있다네·”
“그럼?”
진무원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를 죽이는 것은 내가 한다·”
누군가의 음성이 정자에 울려 퍼지며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활화산만큼이나 강렬한 존재감에 진무원이 고개를 돌렸다·
회색 피풍의를 걸친 깡마른 노인이었다·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무시무시한 눈빛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다· 그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주위의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한눈에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령제(魔靈帝) 현현소·’
서문화와 같은 아홉 하늘의 반열에 든 자· 지닌 바 무위가 추측 불가라는 절대의 무인이 바로 마령제 현현소였다·
현현소의 등장으로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야주의 목은 내가 따겠다· 너희들은 그저 시간만 벌어주면 된다·”
현현소의 광오한 목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졌다·
남은 술잔의 주인은 현현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