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 7장 누군가는 영웅의 길을, 또 누군가는 패웅의 길을 걷는다 (3)
무진이 이끄는 공동파의 무인들이 부현으로 들어왔다· 뒤를 이어 무당파를 제외한 구대문파의 전력이 들어왔다· 거기에 오대세가와 중소 문파의 전력까지 들어오니 강호 전체를 압축해 놓은 듯했다·
부현 지부에 각 문파의 대표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거대한 회의장은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무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앞쪽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구대문파 중 한곳인 점창파의 무인 암연무검(黯然武劍) 경방혼이었다· 경방혼은 점창파의 장로로 부현에 머물고 있는 점창파의 제자들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경방혼을 비롯한 각 문파의 대표들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에 파견 온 무인의 수는 우리 점창파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미타불! 단순히 무인의 수만 많다고 점창파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소림이야말로 무림의 태두입니다· 따라서 소림이 전체를 이끌어야 합니다·”
“침묵만 지키던 소림이 이제 와서 전체를 이끌다니요? 무엇보다 소림은 살계를 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저희 진주언가가 이끄는 것이····”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중요한 자리를 맡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도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보상이 따르게 마련이다·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자가 많이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법· 각 문파의 대표들이 서로 선봉에 서겠다고 나서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무진은 그런 이들을 보며 강호에 환멸을 느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꼭 이쪽이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벌써 공을 두고 다투다니·’
일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과정은 건너뛴 채 달콤한 과실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들이 달콤한 과실을 먹기 위해선 수많은 제자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무진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해야 공동파의 제자들을 보호할지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각 문파 대표들의 다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누구 한 명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서로 비위가 상하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그들의 다툼은 서문화와 서문혜령이 들어오면서 끝났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 언제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여지를 안고 있었다·
서문화가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제아무리 자파를 대표해 이곳에 왔다고 하지만 배분이나 강호의 위치로 볼 때 서문화와 비견될 수는 없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소림의 청광이 귀제갈 선배를 뵙습니다·”
“점창파의 경방혼이 인사드립니다·”
방금 전까지 아귀다툼을 벌이던 대표들이 앞을 다퉈 서문화에게 인사를 해왔다· 상대는 아홉 하늘 중 한 명인 서문화이다· 그들의 극진한 인사는 매우 당연했다·
서문화는 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줬다· 각 문파의 대표라고 하지만 장문이나 가주도 아니고 그와는 많은 배분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사가 모두 끝나자 서문화가 입을 열었다·
“각 문파에서 이렇게 정예들을 보내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군·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하게 됐어·”
“무림의 정기를 지키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밀야를 말살하는 일이니 당연히 강호의 역량을 총집결해야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서문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문혜령을 향했다·
“오늘 회의는 내 대신 손녀가 진행할 것이네·”
“아니 그런···?”
“말도 안 됩니다!”
순간 장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이도 어린 서문혜령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말에 반감을 표출한 것이다· 속박을 싫어하는 강호인들이지만 기실 그들만큼 배분이나 강호상의 위치를 따지는 인물들도 드물었다·
서문혜령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아직까지 그녀가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기엔 연륜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서문화는 단호했다·
“내가 결정한 일일세· 불만이 있다면 나에게 이야기하게·”
“····”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장내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모두 알고 있을 걸세· 내 손녀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얼마나 비상한 두뇌를 소유했는지· 더군다나 부현에 오래 있었기에 그녀만큼 이곳과 밀야의 사정을 아는 이도 드물지·”
“····”
“그리고 창천무제가 전면에 나설 거네· 그 정도라면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보는데·”
담수천의 별호까지 나왔다· 중인들은 더 이상 반발할 수 없었다· 담수천은 아홉 하늘 중 일인인 창룡검제 비사원을 쓰러뜨린 자· 이곳에 있는 이들을 이끌 충분한 자격과 무력을 갖춘 존재였다· 더군다나 서문화가 그를 비호하고 있다· 누구도 반발할 수 없었다·
서문화가 서문혜령을 보며 은밀히 미소 지었다·
‘자 판을 벌여줬으니 마음껏 능력을 발휘해 보려무나·’
서문화가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 ☆ ☆
운중천 부현 지부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이뤄졌다· 이제까지 방만하게 운영되다시피 하던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수많은 인원이 자리를 이동했다·
이제까지 후방을 지원하는 임무만 맡던 현무대에도 변화의 바람은 찾아왔다· 서문혜령은 현무대를 전방에 배치했다·
몇몇 기재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부현에 파견 나온 자파의 고수들을 통해 현무대를 후방으로 돌려줄 것을 건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무대에 속한 무인 중 상당수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출신이었다· 현무대를 전방으로 돌리는 것은 그들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분명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누구 한 명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현무대에는 수많은 인원이 투입됐다· 그들 중 상당수는 최근에 들어온 명문대파의 제자들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인사이동과 조직 개편이 있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서문혜령은 전면에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수많은 인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새로이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그녀의 등 뒤에 서문화와 담수천이라는 거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십 할 이상 발휘하고 있었다·
“흠!”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 때문이다·
허름한 모옥 두 채와 조그만 연무장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높다란 담장· 이제까지 그가 있던 현무대의 숙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진무원도 본의 아니게 조직 개편의 대상자가 되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는 현무대의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운중천의 인사 담당자로부터 소속이 변했다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명령받았다·
자리를 옮기는 것 따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곳에 진무원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인가?”
진무원은 혼자서 이곳을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조직에서 인원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무원은 편하게 생각하고 연무장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바람이 차가웠다· 절정을 향해 치닫던 더위도 이제 한풀 꺾인 듯했다·
진무원은 눈을 감았다·
이젠 굳이 운공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림자 내공이 절로 움직였다· 만영결을 운용하면서 진무원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심검(心劍)·’
진무원은 적엽 진인을 상대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양신까지 동원한 적엽 진인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진무원이 상대한 이 중 최강의 적이었다· 만일 심검을 펼치지 않았다면 죽은 것은 적엽 진인이 아닌 진무원 자신이었을 것이다·
진무원은 그와의 싸움을 복기했다· 격돌하는 그 순간부터 심검을 펼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기서부터····’
적엽 진인이 달려온다·
폐부를 꿰뚫어 보는 사나운 눈빛 폭풍 같은 기세 그리고 심장을 노리는 차가운 검편·
진무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분명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몸이 반응하고 있다· 그만큼 적엽 진인의 살기와 무력은 진짜였다·
문제는 능군휘와 비사원을 제외하더라도 아홉 하늘 중 아직 여섯이 건재하다는 것이다· 적엽 진인이 그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강자였다고는 하지만 나머지 무인들과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종이 한 장 정도·
하나라면 모르지만 둘 이상이 연합하면 제아무리 진무원이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모용율천이 문제였다·
그의 무위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다른 아홉 하늘을 모조리 꺾은 것으로 보아 그의 무위가 월등히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그의 무공은 어떤 종류일까? 검? 도? 그도 아니면 권공?’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아홉 하늘 중 한 명이라는 자리에 올랐으면 무공이라도 알려졌어야 할 텐데 모든 것이 흑의 장막에 가려진 듯했다·
그 어떤 정보도 없다는 것이 진무원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역시 직접 부딪쳐서 싸우는 수밖에 없나?’
어차피 그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맨바닥에서 일어나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싸워왔기에 크게 두렵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혼자였을 때의 일이다·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북천문 그리고 그 터전에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모두가 진무원처럼 검 하나에 목숨을 건 무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 의지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았고 지금도 늘어가는 추세이다·
진무원에겐 그들의 삶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가 무너지면 그와 북천문에 기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진다· 그렇기에 부담감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적엽 진인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그와 같은 수준에 오른 고수에게 육체적인 수련은 실력의 퇴보를 막아주는 수단일 뿐 오히려 이런 심상의 수련이 더 효율적이다·
그의 머릿속에 적엽 진인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번에는 방금 전처럼 싸움을 복기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머릿속 심상의 세계엔 진무원과 적엽 진인이 검을 마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격돌했다·
콰르르!
머릿속 세계에 뇌성벽력이 울려 퍼졌다· 그 속에서 진무원과 적엽 진인은 수없이 격돌했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구축되고 일련의 행위가 수없이 반복됐다· 단순히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설화·’
그날 그는 분명히 심검을 펼쳐냈다·
그 단서가 바로 설화였다·
설화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검신은 산산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설화는 살아 있었다·
진무원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검을 떠올렸다· 검이라기보다는 아직은 길쭉한 쇠몽둥이에 더 가까웠지만 적엽 진인과의 싸움 이후 검의 형태를 조금씩 갖춰가고 있었다·
우웅!
검이 운다·
진무원에겐 설화의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가자 설화야·’
그가 설화와 함께 적엽 진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싸움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는 순간이다·
“어이 이봐!”
갑작스러운 소음이 그의 세계를 흔들었다· 더불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나운 기세를 흘리며 덤벼들던 적엽 진인도 설화도·
진무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눈을 뜨자 낯선 이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두 명과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다·
그중 진무원에게 말을 건 남자는 머리에 새하얀 문사건을 질끈 동여맨 탈속한 풍모의 청년이었다· 관옥을 깎아놓은 듯 수려한 이목구비에 유달리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약간은 치켜 올라간 입매가 남자를 오만하게 보이게 했다·
오만해 보이는 청년의 곁에 있는 남자는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민 젊은 중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아홉 개의 계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로 미뤄보아 젊은 중이 소림사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시선은 정작 그들이 아닌 뒤쪽에 있는 여인들에게 향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품을 풍기는 여인들 중 왼쪽에 있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 무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 봉목은 맑고 깨끗하며 붉은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어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다·
그녀는 진무원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수련·’
칠소천의 일원이자 명문 무산파의 장문제자인 무산신녀(巫山神女) 남수련이 분명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지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봐!”
그때 다시 오만해 보이는 청년이 진무원을 불렀다· 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말 들리지 않아?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고 묻잖아!”
그제야 진무원의 시신이 청년을 향했다·
“지금 나한테 말하는 것이오?”
“여기에 당신 말고 또 누가 있나?”
청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반대로 진무원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