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 6장 폭풍이 불기 전에도 바람은 불어온다 (1)
퍼버벅!
진무원의 앞을 가로막던 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단봉 두 자루가 교차로 허공을 가르고 그때마다 서너 명의 무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나갔다·
이 자리에 있는 무인 중 누구도 진무원을 막지 못했다·
진무원의 두 자루 단봉은 마치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 같았다· 그 살벌한 기세에 앞을 막아선 인의 장벽이 허물어졌다·
“후우!”
진무원이 그제야 호흡을 고르며 멈춰 섰다·
천무대에 둘러싸인 사내가 보였다· 진무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차분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는 젊은 사내·
그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무원은 그의 눈빛 속에서 당혹스러움을 엿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저자군·’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그가 오늘 이 모든 것을 주재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무원이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궁상화와 천무대의 무인들이 앞을 막았다·
“거기까지·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한다·”
궁상화의 차가운 목소리가 진무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천무대 전원이 무기를 꼬나 쥔 채 진무원을 노려봤다· 그중에는 진무원에게 낭패를 당한 묵원광과 율사희도 존재했다·
“또 너냐?”
그들이 이빨을 뿌득 갈며 진무원을 노려봤다· 그들은 진무원 때문에 심원의를 죽이지 못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겪은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진무원을 향해 달려들 기세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경의를 바라봤다· 가경의의 시선 역시 진무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가경의였다·
“당신은?”
“단천운·”
“당신이었군 단천운·”
가경의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재구성한 그림 속에 등장한 인물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유일한 존재가 바로 진무원이었다·
가경의를 바라보는 진무원의 표정 또한 묘하게 변했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느낌과 시선이다·
진무원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가경의군·”
“호오!”
가경의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랐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존재는 밀야 내에서도 극비에 속했다· 일반적인 무인은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데 설마 진무원이 자신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경의가 진무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군사 위험합니다·”
궁상화가 그의 앞을 막아서자 가경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말은 진무원을 향한 것이었다·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가 무엇을 믿고 이리 자신만만하게 나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가는?”
“당장 현무대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지요·”
“군사!”
대번에 궁상화의 입에서 불만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가경의가 손을 들자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진무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곳은 적진이다· 가경의를 죽이기 위해서는 천무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그사이 수많은 무인이 더 투입될 것이고 가경의는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경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멀리 보이는 백마병단의 무인에게 손짓했다·
백마병단의 무인이 이제까지 조종하던 연의 끈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허공을 맴돌던 연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잠시 후 숲 속의 소란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경의의 말대로 현무대에 대한 공격이 중지된 것이다·
진무원은 가경의가 약속을 지켰음을 알고 두 팔을 편히 내렸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제야 가경의가 미소를 지으며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궁상화와 천무대가 따라가려 했지만 가경의가 고개를 저었다· 궁상화 등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차하면 언제든 출수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가경의가 마침내 진무원의 앞에 섰다· 잠시 진무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가경의가 갑자기 포권을 취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밀야의 군사직을 맡고 있는 가경의입니다·”
“단천운· 공작문 소속입니다·”
“무림의 영웅을 이렇게 뵈어 영광입니다 단 소협·”
“나야말로·”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친구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그렇게 친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 속에는 뇌성벽력이 연신 내리치고 있었다· 서로를 탐색하고 의도를 읽고 기만하는 일련의 작업이 눈빛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문득 가경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강호는 살아 있는 괴물이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더니 정말인가 보군요· 당신 같은 예측 외의 존재를 내보내다니·”
“마찬가지입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리자 가경의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의 존재는 밀야에서도 극비· 일반 무인들은 나라는 존재조차 모르지요· 그리고 현재까지 내 이름이 노출될 만한 상황은 거의 없었구요· 있다면 사대마장이나 그와 비슷한 급의 무인들을 통해서 노출되었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가··· 잠깐····”
갑자기 가경의가 말을 끊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안색이 수십 번이나 변했다· 진무원은 그런 가경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가경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사천성과 연관이 있군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곳에서 사대마장 중 한 명인 청풍마영 남 대협의 소식이 끊겼거든요· 현재까지 내 이름이 노출될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습니다· 내 말이 틀렸나요?”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단순히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거기까지 파악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가경의는 그런 진무원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사천성의 어느 문파입니까? 당문? 그도 아니면 청성파?”
“····”
“그럼 아미파입니까? 아미파에서는 단 형과 같은 봉술의 고수를 배출할 수 없을 텐데·”
진무원은 묵묵히 가경의의 말을 들었다· 그새 가경의의 말투가 조금은 친근하게 변해 있었지만 진무원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가경의의 말속에 담긴 내용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무척이나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 하나만으로 추리를 해내는 가경의의 천재성에 놀라기도 했고 과연 그가 어디까지 파악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사천성의 전력에 대해 무척이나 세밀하게 조사했습니다· 당문 아미파 청성파가 장악하고 있는 사천성은 무척이나 거슬렸거든요·”
당연히 사천성에 간자를 집중적으로 파견해서 세 문파의 전력과 허실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강하고 안정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원의 여타 대문파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안전한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때문에 긴장감과 투쟁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가경의가 남천명과 염마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사천성에서 남천명과 염마대의 소식이 끊겼다· 가경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 후로 사천성으로 들어가는 경계가 강화되었고 보내는 간자 중 소식을 보내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제가 분석한 바로는 타성에 젖은 사천 무림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남 대협과 염마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남 대협과 염마대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정황상 전멸했을 확률이 크겠지요·”
가경의가 진무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사천성의 세 문파 중 어떤 문파가 있어 단 형을 키워낼 수 있을까요? 난 절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요?”
“지금 생각해 보니 사천성의 정보 중 내가 무심코 지나친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사천성으로 들어가는 물동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겁니다· 그때는 단지 백룡상단의 임시 총단이 들어서서 그런 거라 치부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많군요·”
진무원의 팔뚝 위로 소름이 올라왔다·
상대는 진짜였다· 하진월과 같은 부류였다· 단 한 마디 말로 열 가지 백가지 진실을 추측할 수 있는 그런 괴물 같은 존재·
진무원이 봉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 자리에서 가경의를 죽이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경의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쩌면 사천무림 뒤에 우리가 모르는 제삼의 세력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단 형은 그곳에서 나왔나요?”
“글쎄요·”
“공작문은 나도 알고 있어요· 공작문에는 단 형과 같은 수준의 고수를 배출할 무공과 여력이 없어요· 있었다면 멸문하지도 않았겠죠· 내 말이 틀렸나요?”
가경의가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봤다· 진무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딘가요 단 형을 배출할 정도의 문파가?”
진무원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피가 들끓고 있다· 이젠 그 어떤 경지의 무공을 봐도 놀라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공도 빈약한 문사가 세 치 혀로 그를 격동시키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직접 알아내 보시죠·”
“그럴 겁니다· 이번 부현에서의 일만 마무리되면 말입니다·”
“그렇게 빨리는 곤란합니다·”
진무원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뜻을 못 알아들을 가경의가 아니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흠!”
가경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편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궁상화와 천무대는 크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의 대화에 그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것을·
진무원은 가경의를 바라봤다·
타인이 보기엔 단순한 대화 같지만 그 속엔 잘 벼려진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자칫 한마디만 실수해도 상대의 혀 속에 숨겨진 칼날이 전신을 난도질해 올 것이다·
가경의는 놀라운 두뇌로 진실에 가깝게 접근했다· 그런 가경의에게 진무원은 견제수를 던졌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온전히 가경의의 몫이다·
진무원은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 올렸다· 가경의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역시 승부를 걸어야 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지배하고 있다·
궁상화와 천무대 역시 장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끼고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지만 진무원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가경의는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부현의 일을 조금 늦춰도 되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모두 지쳐서 휴식이 필요했거든요·”
“아주 탁월한 결정 같습니다·”
“하나 마냥 쉴 수는 없습니다· 등 뒤에 비수가 있는데 편히 쉴 수는 없으니까요·”
“그 비수는 당분간 날을 세울 일이 없을 겁니다· 최소한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어떤 형태로든 간에 결론이 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군요·”
그제야 가경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한껏 고조되어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변했다· 궁상화와 천무대가 끌어올린 내공을 서서히 풀었다·
진무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천문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했고 밀야는 전력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극적인 협상이 이뤄졌다·
아직까지 가경의는 사천성에 북천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진무원은 북천문의 내실을 키울 시간을 벌었다·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협상이었다·
문득 가경의가 입을 열었다·
“단 형은 앞으로도 계속 운중천의 진용에 있을 겁니까?”
“당장은·”
“그렇다면 계속 저희와 충돌하겠군요·”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도록 노력할 겁니다·”
“듣던 중 다행이군요· 역시 단 형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법을 알고 있군요·”
“내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일 뿐입니다· 당장은 중립을 유지하겠지만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지금 당장은 단 형이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가경의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제 운중천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뤄야 할 때다· 진무원이 속한 문파가 어느 곳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속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기분이다·
그가 굳이 남천명을 보내면서까지 사천무림을 와해시키려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가경의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이제까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 대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의 생각대롭니다·”
“으음!”
처음으로 가경의의 얼굴에 참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대마장 중 한 명인 남천명이 죽었다· 어쩌면 남천명을 죽인 자가 진무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그 어떤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공할 직관력은 눈앞에 존재하는 진무원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운중천보다 그가 더 위험한 존재일지도· 어쩌면 이 가경의가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여유롭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