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 5장 싸우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오지 않는다 (2)
십조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처음보다는 가벼워진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굳은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감천 쪽으로 상당히 접근한 상태였다· 이제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고윤우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위험 지역이다· 언제 어디서 밀야 측 무인들과 만나게 될지 몰랐다· 운이 좋다면 감천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없겠지만 운이 나쁘면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적과 조우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고윤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일행이 걸음을 멈춰 섰다·
“단 소협!”
고윤우가 갑자기 진무원을 불렀다· 제일 뒤에 처져 있던 진무원이 고윤우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고윤우가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일단의 무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거친 분위기를 풍기는 열 명 정도의 무인이다· 현무대와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분위기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저들은?”
“밀야의 정찰조 같군· 역시 저들도 정찰조를 운용하고 있었어· 아니 당연한 건가?”
“음!”
진무원이 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밀야 측 무인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피로한 듯 인상을 쓰고 있지만 누구 한 명 방심하는 사람 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복장은 이동에 용이하게 최대한 가볍게 유지하고 있었고 검과 도 그리고 각종 암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정예들이군·’
현무대의 애송이들과 달리 그들은 이런 종류의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어떻게 하지?”
고윤우가 의견을 물어왔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다· 그곳에서라면 감천과 밀야의 상황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밀야 측 정찰조였다· 그들의 눈을 피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무대와 달리 그들은 정찰에 특화된 무인들이었다· 눈썰미가 예리할뿐더러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다· 그런 그들의 눈을 피해 지도에 표시된 지역까지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진무원이 십조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긴장된 얼굴로 정찰조를 바라보고 있을 뿐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목적에 따라 부현에 와서 운중천에 합류했지만 그들 중 진짜 치열한 전투를 경험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의욕은 충만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들인 것이다·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지면 이들 중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냥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어· 이유야 모르지만 위에서 정해준 임무야· 이대로 물러나면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고윤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던 이들이다· 공을 세워도 뺏기기 일쑤였고 명문 정파 제자들의 횡포에도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했다·
최소한 자신이 이끄는 동안만은 그들이 그런 수모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고윤우의 마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
“음!”
“자네가 도와주게·”
결국 진무원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하자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네·”
고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주위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그러졌다·
“이쪽으로·”
진무원이 걸음을 옮겼다· 고윤우와 십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진무원이 향하는 방위가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미 뱉은 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진무원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바꾸자 그들은 어느새 쉬고 있는 정찰조를 뒤로하고 움직이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고윤우와 십조의 무인들이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진무원의 뒤만 따랐을 뿐인데 마치 공간을 이동한 것처럼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진무원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전방위 감각으로 적이 배치된 곳을 파악하고 그들의 시선이 겹치지 않는 사각으로만 이동했다·
진무원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귀신이 조화를 부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도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을 이용해 적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감천 지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감천 외곽에는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거의 삼십여 장마다 경계 병력이 배치되어 있고 엄격한 검문검색이 이뤄지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의 경계망을 뚫고 감천으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고윤우는 재빨리 외곽의 경계 상태를 확인하고 일행에게 눈짓했다· 명령을 수행한 이상 이곳에 있는 것은 무의미했다·
십조 역시 고윤우의 뜻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이 이상 감천 지역에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가까이 갈수록 얻어내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는 그들이 더 잘 알았다· 어차피 공을 세워도 현무대주인 윤주천과 명문대파의 제자들에게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 고윤우가 쉴 것을 명령했다 그제야 십조의 무인들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이제야 살겠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그들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밀야가 포진하고 있는 감천에 무사히 다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역신위가 흘깃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경외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경천봉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은신과 잠입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하구나·’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역신위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도 이 모든 일이 진무원이 그들을 안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진무원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무사히 감천 지역을 들어갔다 왔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이건?’
정체되어 있던 공기가 급작스레 요동치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엔 짙은 살기가 배어 있다·
진무원이 손짓으로 고윤우를 불렀다·
“왜 그러는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공기가····”
진무원이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숲 속 곳곳에서 호응이라도 하듯 호각 소리와 사람들의 음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적이다!”
“운중천에서 간자를 파견했다!”
십조 무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도 귀가 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들켰구나·”
모두 열다섯 개 조가 들어왔다· 그들 중 하나가 종적을 들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하나가 드러남으로써 현무대 전체가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십조 무인들의 시선이 절로 고윤우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조장이다 보니 그에게 의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고윤우의 시선은 진무원을 향해 있었다·
‘이자는 호각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주변의 변화를 눈치챘다·’
낭인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감이 진무원에게 의지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감과 눈썰미를 믿었다·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최대한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다른 조들은?”
“그들을 생각하고 배려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공기에 짙은 살기가 배어 있다· 그만큼 강자들이 현무대를 사냥하기 위해 투입되었단 증거이다·
“그렇군· 알겠네· 자네가 앞장서 주게· 우리는 자네의 뒤를 따르겠네·”
고윤우는 두말하지 않고 진무원에게 부탁했다·
진무원이 십조 무인을 전부를 불러 모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무원이 그들에게 말했다·
“적이 현무대를 사냥하기 위해 정예를 투입한 것 같습니다·”
“으음!”
“일단 이곳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부터 제 말 명심하시고 잘 따라주길 부탁드립니다·”
진무원은 그들에게 반론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선두로 나섰다· 그 뒤를 고윤우와 역신위가 따랐다· 확실한 믿음의 표시였다· 그러자 불안한 얼굴의 십조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역시 지금 최선의 방법은 진무원을 따르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진무원은 거침이 없었다· 일단 종적이 드러난 이상 적이 추적해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들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전방위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그러자 주위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진무원은 가장 경계망이 느슨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거기까지는 침투할 때와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저들의 반응이었다·
갑자기 느슨해진 경계망이 강화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숲 속을 지배했다· 동시에 사각지대가 사라졌다· 적들의 경계망이 새로 구축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진무원은 방향을 바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적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사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진무원은 깨달았다·
‘단순히 경계가 강화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 기민하게 이곳의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절정의 무인들처럼 자신을 강력하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은은한 달무리처럼 그의 존재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진무원은 이런 종류의 존재감을 풍기는 자들을 알고 있었다·
‘서문혜령과 같은 부류·’
자신은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대국을 주재하는 자들·
진무원은 굉장히 머리가 좋은 존재가 나섰음을 눈치챘다·
‘나 혼자라면 문제없겠지만 이들까지 데리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조에 비해서 무공 수위도 현격히 낮을뿐더러 실전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애송이 무인들도 다수 있었다· 이 상태로 이들 모두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인근의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하진월과 오래 붙어 다녔기에 그는 누구보다 책사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병력을 움직일 때 그들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바로 천기와 지형이다· 낮과 밤 맑은 날 흐린 날 혹은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었다·
그다음이 바로 전쟁이 벌어질 곳의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바다냐 육지냐 산이냐 평야냐 마른 흙이냐 아니면 진창이냐에 따라 병력의 운용이 달라졌다·
지금은 환한 대낮 천기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을 주도하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지형적인 우위를 유지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무원은 그의 허점을 노려야 한다·
‘적의 세력이 가장 융성한 곳을 찾는다· 사로에서 생문(生門)을 찾아야 한다·’
결심을 굳힌 진무원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일부러 적들의 경계가 가장 삼엄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이거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왠지 경계가 더 삼엄해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당장 뒤를 따라온 십조 무인들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고윤우와 역신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무원에게 한 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묵묵히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아악!”
갑자기 비단 폭을 찢는 듯한 비명성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순간 고윤우를 비롯한 무인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운중천의 떨거지들이다·”
“모조리 죽여!”
살기에 가득 찬 음성과 구슬픈 비명성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근처 가까운 곳에서 운중천과 밀야의 무인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까가강!
무기가 부딪치는 쇳소리가 그들의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십조 무인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경원시하고 무시했지만 그래도 한배를 탄 동료였다·
“제기랄!”
그들이 욕설을 내뱉을 때였다·
“이곳에도 운중천의 떨거지가 있다!”
밀야 측 무인의 외침이 울려 퍼지더니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