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 4장 머리로 싸우는 자들도 있다 (3)
진무원과 서문혜령은 말없이 걸었다· 그 뒤를 채화영이 따르고 있다·
기묘하게 무거운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감돌고 있다· 진무원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문득 서문혜령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맞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진무원은 서문혜령의 가공할 정보력에 놀랐다·
그가 서문화와 만난 것은 우연이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서문혜령이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부의 행적마저 감시하고 있던 것인가?’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아무리 비정강호라지만 친혈육끼리도 믿지 못하고 감시하는 서문혜령의 행태에는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조부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래도 듣고 싶군요· 제아무리 사소한 거라 할지라도·”
서문혜령이 진무원을 올려다봤다· 진무원은 그녀의 집요한 눈빛 속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제 한번 찾아오라더군요·”
“그래서 뭐라 대답하셨나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만?”
“그게 다인가요?”
“다입니다·”
서문혜령이 멈춰 섰다· 진무원도 덩달아 멈춰 섰다·
그녀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진무원은 그런 서문혜령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문혜령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죄송해요 단 소협· 손님을 앞에 두고 제가 혼자 생각하고 있었군요·”
“아닙니다·”
“단 소협은 꿈이 뭔가요?”
“꿈이라····”
“제가 보기에 단 소협은 꿈이 아주 클 거 같아요·”
“그런가요?”
“아마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척마대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을 때 절대 거부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까도 보셨다시피 척마대와는 그다지 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거절했을 뿐입니다·”
진무원의 설명에도 서문혜령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전 알아요· 단 소협 같은 분은 결코 남의 밑에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척마대는 단 소협과 같은 분을 채우기엔 그릇이 작았을 거예요·”
“····”
진무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서문혜령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진무원을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서문혜령처럼 스스로가 매우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한번 선입견을 가지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단 소협도 알겠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어요·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많은 것이 바뀔 거예요· 저는 단 소협이 그런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길 바라요·”
“충고 감사합니다·”
“단 소협은 똑똑한 분이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아들으셨을 거예요·”
“····”
“단 소협은 새로운 하늘이 될 자격을 갖췄어요· 저 서문혜령이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요·”
서문혜령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섬뜩하게 비쳐졌다· 서문혜령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진무원은 말없이 멀어지는 서문혜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채화영이 서문혜령을 따르면서 간간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채화영의 눈에는 진무원에 대한 짙은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채화영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그를 믿을 수 있겠어요?”
“그는 자신만의 기준과 사고관이 확고해 타인과 융합이 어려운 부류예요· 설령 내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런 제안을····”
“일단 할아버지에게서 떨어뜨려 놓아야 하니까요· 언니도 알 거예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그분이 단 소협을 손에 넣으면 그를 이용해 어떤 귀계를 부릴지 아무도 몰라요·”
“음!”
“할아버지는 분명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예요· 하지만 확실한 반대급부를 얻고자 할 거예요·”
“어떤?”
“수천에 대한 견제나 통제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런?”
“할아버지 성격상 직접 나설 일은 드물어요· 대신 누군가를 내세우겠죠· 정황상 단 소협이 그 대상일 확률이 높아요·
서문혜령의 단호한 대답에 채화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구나·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채화영은 내친김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꼭 그렇게 태상가주님을 견제해야 하나요? 차라리 그냥 시간이 흘러 그분이 모든 것을 놓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언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네?”
“나는 할아버지를 배척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이것 또한 나에 대한 도전이에요· 할아버지를 넘지 못하면 절대 모용율천을 넘어설 수 없어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가 바로 모용율천이라는 사실을· 삼 년 전 관대승과 인연을 맺을 때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 서문화조차도 모용율천의 수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가 느낀 절망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할아버지인 서문화가 넘어서야 할 존재가 된 것이·
서문화를 넘어서야 담수천도 모용율천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런 절박한 명제가 그녀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쉽게 말하면 할아버지는 모용율천의 책사예요· 나는 수천의 책사이구요· 수천이 하늘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할아버지를 극복해야 해요·”
“····”
채화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문혜령이 서문화를 배척하는 이면에 이런 이유가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나는 할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거대한 벽이에요·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단 소협이 할아버지의 사람이 되는 것을 순순히 두고 볼 수 없어요·”
“그럼 단 소협을 받아들이려는 건가요? 아직 믿을 수도 없는데·”
“시험을 통과한다면요·”
“시험이라면?”
채화영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서문혜령이 미소를 지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미소를·
“현무대·”
“네? 그게 무슨?”
“그는 현무대와 함께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알겠죠· 그가 어느 편인지 어떤 사람인지·”
부현의 북쪽에 위치한 감천(甘泉)은 밀야가 장악한 지역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이후 밀야는 대부분의 전력을 감천으로 물렸다·
이길 수 있던 전쟁을 패했다· 그 때문에 후유증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밀야 무인들이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의사신 사우명은 밀야 무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한번 기울어진 분위기를 다시 되돌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밀야의 진용으로 한 대의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의 등장에 사우명과 천무대의 무인들이 직접 마중을 나갔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조화로운 이목구비의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혼탁한 눈동자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둔해 보였다·
사우명이 급히 남자에게 다가왔다·
“군사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오랜만입니다·”
조용히 미소를 짓는 남자는 바로 가경의였다·
밀야의 군사인 그가 드디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등장은 사우명은 물론이고 천무대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이제까지 가경의가 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전장에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일대 사건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최악이란 뜻이기도 했다·
“군사 여기까지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무대주 궁상화가 가경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기획한 작전이 성공했다면 가경의가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아닙니다· 사실 진즉에 왔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 죄송할 뿐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세 사람이 거처로 들어왔다·
꽤 큰 전각에는 가경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중원 지도 위에는 현재 섬서성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지도를 바라보는 가경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지도에 나타났듯이 섬서성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작전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마대와 초한경이 몰살을 당할 줄이야·’
사대마장을 이용해 운중천의 정예를 끌어내고 모용율천을 노렸다· 그것만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졌고 오히려 운중천의 사기만 고양시키고 말았다·
최악의 결과였다·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바로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직접 움직인 것이다·
사우명이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군사·”
“아닙니다· 저쪽 진영에도 귀제갈이 합류했다고 하니 좋은 승부가 될 겁니다·”
“귀제갈이 합류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저들도 이번 전쟁을 길게 가져갈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조만간 운중천의 총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음!”
사우명과 궁상화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만큼 엄청난 위기감이 엄습한 것이다·
“허면 저들의 전력이 부현에 집중된단 말씀입니까?”
“현재까지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럼?”
“이제는 우리도 이곳에 전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적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내보낸 사대마장에게도 이곳에 합류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아!”
사우명이 탄성을 터뜨렸다·
사대마장의 합류는 그들에게 없던 힘도 생기게 만들었다· 적에겐 공포의 대명사이지만 밀야 측에는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바로 사대마장이다·
반면 궁상화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사대마장의 합류는 그만큼 이곳과 밀야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뜻이다·
가경의가 중원 지도를 보며 말했다·
“진검승부는 지금부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밀야의 운명이 갈릴 겁니다·”
“음!”
“모두 아시다시피 야주께서 전장에 합류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혼탁하기만 하던 가경의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런 가경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순히 천재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이가 바로 가경의였다· 그 덕에 만신창이가 된 밀야를 수습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희는 군사의 명령만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가경의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가경의의 모습이 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말씀만 하십시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라 해도 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저번 전쟁의 흐름뿐입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건····”
궁상화가 나서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척마대를 끌어내서 고립시킨 것 암살대를 이용해 주요 인물들을 암살한 것 그리고 진무원과 담수천의 등장까지 가감 없이 정확히 설명했다·
가경의의 머릿속에 전장이 펼쳐졌다· 그는 마치 그 모든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머리로 구현해 냈다·
그 속에서 밀야와 운중천의 병력이 싸우고 천무대와 척마대가 격돌했다· 밀야에 유리하던 전황은 진무원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불리하게 돌아갔고 담수천이 종지부를 찍었다·
모두가 담수천에게 환호했다· 그는 능히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남자였다· 하지만 가경의의 시선은 담수천이 아닌 진무원을 향해 있었다·
담수천이란 존재는 능히 그럴 만한 능력과 명성을 갖고 있다· 바꿔 말하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란 뜻이다·
반대로 진무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진무원과 같은 자가 개입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자군· 이 모든 사태의 돌발 변수가·’
가경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