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 4장 머리로 싸우는 자들도 있다 (1)
전신이 찌릿했다· 뇌기가 혈관을 따라 전신을 휘도는 낯선 느낌에 서문화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디 하나 특출 난 구석이 없는 젊은 무인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길로 오랜만이었다·
‘언제였지 이런 기분이 들던 게?’
방금 전까지 명확하던 세계에 다시 안개가 드리워졌다·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자넨 누군가?”
자연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단천운입니다·”
“단천운?”
서문화의 눈빛이 깊어졌다·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경천봉 자네가 경천봉이군·”
“그러는 어르신은 귀제갈 서문화 대협이시군요·”
“나를 아는가?”
“강호에서 아홉 하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무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뛰고 있었다·
설마 이곳에서 서문화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만큼 그에게도 서문화와의 만남은 뜻밖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북천문이 멸문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서문화였다· 그는 강호의 민심을 악화시키고 여론을 조작해 북천문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만들었다·
북천문은 강호의 공적이 되었고 결국 서문화의 뜻대로 그의 아비 진관호는 자결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십 년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하지만 진무원의 기억 속에서는 어제의 일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가슴속에서는 용암과 같은 열기가 들끓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웃음으로 모든 것을 감춘다· 결국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것이 진무원이 체득한 강호의 법칙이었다· 그래서 진무원은 끝까지 웃을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정식으로 포권을 취했다·
“말학후배 단천운이 강호의 위대한 하늘을 뵙습니다·”
“반갑군· 최근 강호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무인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저야말로 이 자리에서 강호의 하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흐음!”
서문화가 묘한 눈빛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처음의 꺼림칙하던 감정은 많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천봉이라는 무명을 얻은 젊은 무인을 언제까지 경계의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위대한 아홉 하늘 중의 일인· 속내야 어찌 됐든 겉으로는 관대하면서도 공명정대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들어갈까 했습니다·”
“흠!”
서문화가 묘한 시선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추호의 위축됨도 없는 젊은 무인· 강렬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담수천도 그렇고 이 녀석도 나를 두고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시대가 변한 것인가? 자꾸만 이런 녀석들을 토해내다니·’
적엽 진인을 죽인 자 역시 젊은 무인이라 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뒤 물결에 밀리는 것이 정상이라지만 이것은 도가 지나쳤다·
마치 시대가 자신과 아홉 하늘을 배척하며 일부러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서문화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단순히 무공만 강해서는 하늘 위에 오를 수 없다· 가능성은 너희가 더 클지 모르지만 나에겐 오랫동안 강호를 암중에서 지배해 온 관록과 경험이 있다· 너희는 결국 내 이용물에 불과할 뿐이다·’
서문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잠깐 걷지 않겠는가?”
“그러지요·”
진무원은 서문화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강호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서문화이다·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함께 걷자고 제안해 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곳곳에서 은밀한 시선이 느껴졌다· 서문화를 암중에서 호위하는 자들의 눈빛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척했다·
두 사람은 지부를 벗어나 부현을 걸었다·
두 사람이 걷고 있지만 누구 한 명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거리엔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술에 취해 걷고 있었다·
문득 서문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요즘 젊은 무인들은 자제심이 없는 모양이군· 언제 밀야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술과 계집에 탐닉하다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내 눈엔 그런 자들은 보이지 않는군· 자고로 무인의 정신이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언제나 날카롭게 깨어나 있어야 한다네· 상승의 경지를 여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정신력과 노력뿐· 저렇게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자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제가 말입니까?”
“다른 이들이 모두 취해 있을 때 자네는 무기를 손질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준비성이야말로 야망을 가진 무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넨 더 높이 비상할 생각이 없는가?”
“강호를 살아가는 자치고 높이 날길 원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진무원의 대답에 서문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경천봉 단천운· 워낙 충격적으로 등장했기에 그 역시 각별히 주목한 무인이다· 서문세가의 정보력을 총동원해 그의 배경을 조사했음에도 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꺼림칙한 감정은 접어두고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잘만 이용하면 수천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그의 머릿속엔 벌써 진무원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계획이 서 있었다·
“그런 야망을 가지고 있다면 조만간 나를 찾아오게· 어쩌면 내가 자네의 힘이 되어줄지도 모를 테니·”
“음!”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걸세·”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서문화가 진무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런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잘만 이용하면 쓸 만한 사석(死石)이 될 수도 있겠어·’
서문화는 항상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눠 분석했다· 쓸 만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진무원은 전자였다·
지금 그의 명성과 무력이라면 꽤나 쓸모가 많을 것이다· 잘만 사용한다면 담수천을 견제하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의 꺼림칙하던 느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무원은 쓸 만한 도구였다· 그런 도구를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서문화는 잘 알고 있었다·
“문주님·”
“형?”
진무원이 공방으로 들어서자 청인과 곽문정이 그를 맞이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부현 지부에 있어야 할 시각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죠·”
의문을 표하는 두 사람에게 진무원이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진무원은 그들에게 서문화와 접촉한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청인과 곽문정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서문화라니· 운중천의 두뇌가 직접 움직였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 서문화입니다·”
“음! 설마 그 일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실 방금 전에 들어온 급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은밀히 문주님을 찾아뵈려 했습니다·”
“무슨?”
“사대마장 때문에 전력이 자리를 비운 사이 군마대를 비롯한 밀야의 정예가 운중천을 급습했답니다·”
“정말입니까?”
“흑월을 통해 들어온 정봅니다· 정확할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무원이 급히 물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당시 운중천에는 모용율천과 무적세가의 전력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기습이 물거품되었다고 합니다· 군마대는 몰살을 당했고 운중천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음!”
“엊그제 일어난 일이라 아직 부현 지부에서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아마 내일이나 되어야 그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서문화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확률은?”
“반반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직은 모르고 있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운중천에서 구축한 전서 체계로는 아무리 빨라도 내일이나 돼야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어차피 시간의 문제일 뿐 그들 역시 알게 될 사실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모용율천이 직접 움직였다는 겁니다·”
모용율천은 움직이지 않는 거인이다· 그는 무적세가라는 철옹성에서 세상을 경영해 왔지만 직접 움직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가 무적세가 밖으로 나와 운중천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모용율천과 무적세가가 움직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운중천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서문화가 이곳 부현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음!”
“자세한 것은 군사와 의논해 봐야겠지만 제 짐작으로는 아홉 하늘이 오랜 전쟁을 끝내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요· 아니 그게 거의 정확하겠군요· 그것밖에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모용율천이 움직인 이상 다른 아홉 하늘이 움직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으음!”
청인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덩달아 곽문정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북천문이 멸문당한 이후 함께한 적이 없는 아홉 하늘이다· 비록 진무원과 담수천에 의해 두 하늘이 떨어졌지만 나머지 일곱 명의 전력만으로도 중원 전체를 뒤엎을 수 있었다·
“밀야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도 움직이지 않던 그들이 대체 왜?”
“글쎄요·”
진무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머지 아홉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겨우 이 정도에서 전쟁이 마무리되지는 않을 거란 사실이다·
“조만간 이곳에도 피바람이 불겠군요·”
“이 이상 어떻게?”
곽문정은 아예 상상하는 것조차 무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 부현에서 죽어나간 자의 수만 수천 명이 넘는다· 그 이상의 피바람이 불 거란 소리엔 곽문정조차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그만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일단 서문화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겠군요· 일단 군사께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이런 사태를 예견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문정이도 이제부터는 각별히 주의하거라·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명심할게요·”
곽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원이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도 부현의 공기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피비린내가 밸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흑월과 은류를 모두 비상 대기로 전환시키고 군사에게도 쓸 만한 전력을 조금 보내달라고 하십시오·”
“본격적으로 북천문을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하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 대비는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아직 북천문의 전력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형편도 안 됐다· 하지만 그가 아는 하진월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울 것이다·
“문주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차라리 현무대를 나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문주님?”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이제껏 위험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잘만 이용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무원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서문화는 북천문이 멸문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간이다· 거짓된 정보를 바탕으로 북천문의 신뢰도를 최악으로 떨어뜨리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 고립시켰다·
그렇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아비 진관호는 자결을 택했고 진무원은 홀로 세상에 버려졌다· 그야말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다·
서문화는 그렇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타인을 파멸시키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게다· 사람의 성향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때는 서문화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화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진무원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고 서문화의 모든 것은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