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3장 같은 곳에 있어도 각자 다른 꿈을 꾼다 (3)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도발해 오던 밀야도 잠잠했고 운중천 역시 내부의 전력을 추스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동안의 평화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 평화가 지나간 후에는 또다시 큰 폭풍이 불어올 거란 사실을· 그래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즐겼다·
그나마 멀쩡하게 서 있는 건물의 유곽과 술집들이 문을 열었다· 기녀들의 웃음과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가장 근접한 곳· 그래서 이곳엔 절망과 광기 희망이라는 이질적인 감정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인들은 유곽을 찾아 기녀들을 품고 술집을 찾아 갈증을 해소했다· 하지만 그들의 갈증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깐의 평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오늘 하루를 미친 듯이 즐겼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부현 전체가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부현으로 화려한 사두마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 있는 사람 중 마차에 시선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타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것이다·
사두마차의 창문이 살짝 열리며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살짝 얼굴을 드러냈다· 이제 일흔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의 얼굴은 평범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단 하나 그의 눈빛만큼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것처럼 깊고 유현했다·
노인의 이름은 서문화였다· 아홉 하늘 중의 한 명이며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의 소유자가 전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특유의 심유한 눈빛으로 거리를 훑어보았다· 술에 취해 흔들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거리에 가득 찬 기이한 열기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혼돈이 가득하군·’
서문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깔끔하게 정돈된 것을 좋아했다· 모든 것을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분배하고 정리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편이 이해하기도 쉬울뿐더러 효율적으로 지식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질서는 무지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지는 그가 가장 증오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서문화의 얼굴에 불쾌한 기운이 떠올랐다· 전장의 혼돈과 끈끈한 기운이 마치 늪지에 빠진 것처럼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평상시의 그였다면 절대로 이런 혼돈이 지배하는 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와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모용율천의 부탁 아니 명령이었으니까·
모용율천은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길 원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운중천에 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서문화 역시 그런 모용율천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런데 전쟁이 그들의 예상외로 길어지고 있었다· 길어진 전쟁은 기존의 모든 질서와 체계를 위협했다· 서문화는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문화가 상념에 빠진 가운데 마차는 운중천의 지부에 도착했다· 지부의 정문에는 서문화가 아는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담수천과 서문혜령이었다·
담수천이 먼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서문혜령이 서문화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서문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모두 오랜만이구나·”
서문화의 시선이 담수천을 향했다· 그런 그의 눈빛엔 숨길 수 없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무서운 놈!’
아직 어린 용이라고만 생각했다·
후기지수 중에선 발굴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수천은 그런 그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창룡검제 비사원을 보기 좋게 제압했다·
이제 담수천은 단순한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그와 같은 반열에 오른 위대한 무인이었다· 단순한 무력만 따진다면 자신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담수천의 나이가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몇 배나 더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그가 얼마나 더 발전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담수천은 끝없이 노력을 경주할 것이란 사실이다·
자신이 정체되어 있는 동안에도 담수천은 끝없이 강해질 것이다· 그 끝이 어딘지 서문화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만큼 담수천은 파격적인 존재였다·
“할아버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서문혜령이 서문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 큰 손녀의 애교에 서문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랐다·
세 사람은 부현 지부에서 가장 큰 방으로 들어왔다· 죽은 홍천학의 거처였다·
서문화가 물었다·
“홍 장로는 왜 보이지 않는 게냐?”
“····”
서문혜령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서문화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내가 왔는데 홍 장로가 왜 나오지 않는 것이냐?”
“사실··· 홍 장로님은 먼젓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찌 그런 사실을 몰랐단 말이냐?”
“제가···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뭐라?”
서문화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랐다· 그의 얼굴엔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지금 일부러 홍 장로의 죽음을 숨겼다고 했느냐?”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서문혜령은 노기 어린 서문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운중천은 상명하복의 명령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 어떠한 사소한 정보의 누락도 용납되지 않았다· 하물며 십대장로 중 일인인 홍천학의 죽음에 관한 일이다·
당연히 운중천은 물론이고 서문화에게도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 일이다· 서문화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냐?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네가 제아무리 내 손녀라 할지라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모두가 운중천을 위해서예요·”
대답하는 서문혜령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실제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서문화는 냉혹하리만큼 공과 사를 명확히 구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자라면 제아무리 친혈육일지라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서문화의 얼굴에 냉기가 서려 있다· 서문혜령을 바라보는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눈빛이다·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운중천을 위한 일이었어요· 홍 장로님은 개인의 무력은 강하지만 한 집단을 지휘하기에는 너무나 무능력했어요· 그 때문에 많은 무인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것과 네가 보고를 누락한 것은 별개의 일이다·”
“아니요· 그건 전혀 별개의 일이 아니에요·”
“무어라?”
“홍 장로님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럼 다음엔 또 누가 올까요? 똑같은 사람이 오겠죠· 개인의 무공은 강하지만 전쟁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무능한 지휘부·”
“네가 미쳤구나!”
결국 서문화의 화가 폭발했다· 무서운 광망이 폭사되어 나왔다· 가공할 압박감에 서문혜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현 운중천의 모습이에요· 아닌가요?”
“너?”
“그 어떤 이가 와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결국 전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죽어나가는 이들은 이곳에 나와 있는 젊은 무인들뿐·”
서문혜령의 음성엔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전에 없이 강하게 나오는 서문혜령의 모습에 서문화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과 홍 장로의 죽음을 숨긴 것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이냐?”
“연관이 있어요· 그런 일을 막아야 했으니까요·”
“너?”
“이미 이곳은 저희가 장악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람이 장악했어요· 이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사람의 지배하에 있어요·”
서문혜령은 똑바로 서문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단호한 눈빛을 서문혜령은 보이고 있었다· 그런 손녀의 모습에 서문화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서문세가의 그 누구도 서문화 앞에서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아들이자 서문혜령의 아비인 서문종천마저도 말이다·
서문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터져 나왔다· 공력이 응축된 것이다·
당장 손 한 번 휘두르면 서문혜령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서문혜령의 뒤쪽에 앉아 있던 담수천이 어느새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화와 담수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한 명은 이전부터 강호를 지배해 온 절대자였고 다른 한쪽은 강호에 새롭게 떠오른 신성이다· 서문화는 담수천의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치는 커다란 폭풍을 보았다·
그제야 서문화는 깨달았다· 담수천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거대한 존재라는 것을· 어쩌면 단순 무력으로는 자신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서문화가 물었다·
“하늘을 꿈꾸는 것인가?”
“그 이상을 원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단 한 번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미쳤군·”
“미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꿈꿀 수 없는 세상이라서요·”
“음!”
서문화가 침음성을 흘렸다·
강호를 지배해 온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누구도 그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라면 분명 당당하다고 칭찬 한마디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담수천은 분명 자신과 운중천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였다· 그는 이제껏 그런 존재를 단 한 번도 용납한 적이 없었다·
자연 담수천을 바라보는 서문화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꾸는군·”
“꿈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다시 서문혜령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뤄질 수 없는 헛된 꿈을 망상이라고 부른다· 너희는 모른다· 운중천의 진정한 실체를·”
“저흰 이미 알고 있어요· 운중천을 실제로 지배하는 이가 바로 모용율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헛된 꿈을 꾼단 말이냐?”
“헛된 꿈이 아니에요· 할아버지만 도와주신다면·”
“나보고 운중천을 배신하란 말이냐?”
서문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자연 가공할 살기가 장내를 지배했지만 서문혜령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꿈이 겨우 아홉 하늘 중 하나로 만족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너?”
“할아버지도 무적수사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으실 거라고 믿어요· 언제까지 서문세가가 모용세가의 뒤치다꺼리만 할 수는 없잖아요?”
서문혜령의 말은 비수처럼 서문화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이 사람이 비상할 수 있게 도와줘요·”
서문혜령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깊은 밤 서문화는 홀로 밖으로 나왔다· 평소 감정을 거의 드러내는 법이 없는 서문화였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손녀인 서문혜령과 담수천이 던져 준 심마였다·
“설마 그 아이가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니·”
지금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서문혜령의 눈빛이 생각났다· 무서우리만큼 냉정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검은 눈동자· 자신의 신념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자민이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었다·
“흠!”
절로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성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실로 오묘했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다· 부인하고 싶었지만 서문혜령의 말이 그의 가슴을 울린 것이 사실이었다·
“담수천····”
서문화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솔직히 그가 처음 강호에 등장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클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지금의 담수천은 그조차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의 거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무궁한 가능성이 존재했다·
이십 대인 지금도 이럴진대 향후 몇 년만 더 지나면 어디까지 클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모용율천의 상대가 될 수는 없어· 아직 혜령은 모른다· 모용율천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모용세가가 얼마나 가공할 저력과 힘을 가졌는지·”
그는 모용율천의 진실된 모습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서문혜령의 외침이 그의 가슴에 강한 울림을 던져 주었다· 그 잔향이 오랫동안 그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도 십 년 아니 이십 년 후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 아닌 미래를 본다· 미래의 절대자를 키우고 후원함으로써 얻는 이득을 면밀히 계산해 보았다·
“흠!”
서문화의 표정이 점점 더 복잡하게 변해갔다·
수많은 가능성과 변수가 그의 머릿속에서 부딪치며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다·
그가 만들어낸 도화지 위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어·”
서문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담수천을 앞세우되 자신과 서문세가는 철저하게 뒤로 빠진다·
“우선 혜령이를 파문시켜야겠군·”
적절한 거리를 둬서 서문세가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한다· 그런 후 담수천을 음지에서 지원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서문화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생각을 정리할 장소가 필요했다·
문득 저 멀리 한적한 정자가 보였다· 서문화의 발걸음이 절로 정자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젊은 청년이 정자 위에서 짧은 단봉 두 개를 손질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서문화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