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 3장 같은 곳에 있어도 각자 다른 꿈을 꾼다 (1)
운중천은 언제나처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높다란 전각과 담장 주변으로 엄청난 수의 횃불이 불을 밝히고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실제로 운중천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사대마장을 잡기 위해 수많은 전력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운중천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운중천으로 한 대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후문으로 조용히 들어온 마차는 운중천 깊은 곳에 위치한 가장 거대한 전각 앞에 멈춰 섰다· 여타 전각들을 압도하는 규모의 엄청난 크기 천무전(天武殿)이라는 이름의 전각이었다·
천무전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불이 꺼진 전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천무전에 불이 켜지는 순간 운중천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분이 돌아왔다·’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다·
무적수사(無敵修士) 모용율천 천무전은 바로 그의 거처였다·
천무전에 불이 들어온 그 순간부터 운중천은 바쁘게 돌아갔다· 수많은 정예가 빠져나가 허전하기까지 하던 운중천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흠!”
모용율천은 별 감흥이 없는 시선으로 자신의 거처를 돌아봤다·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처에는 먼지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관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가주님·”
모용율천이 왔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총관 관대승이 맨발로 달려왔다· 급히 달려왔는지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역시 모용율천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않고·”
“그냥 가볍게 들른 것뿐이다·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다·”
“그래도····”
“나는 번거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승·”
모용율천의 말에도 관대승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만큼 모용율천의 등장은 그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모용율천이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때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것이지?’
어지간한 일은 관대승을 통해 처리하는 모용율천이다· 그런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사안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용율천이 그런 관대승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있다 갈 것이니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한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혹시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절 찾으십시오·”
“물론이다·”
모용율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관대승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하지만 마음속의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혼자 있고 싶구나· 이만 물러가거라·”
“알겠습니다· 그런 편히 쉬십시오·”
관대승이 모용율천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났다·
혼자 남은 모용율천이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운중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용율천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흠!”
평상시라면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려야 할 곳이 죽은 자의 대지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이것도 나름 운치가 있군·”
모용율천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이나 운중천을 내려다보았다·
아마 지금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운중천의 수많은 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평소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가 운중천에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일대 사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운중천에서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만큼 그는 은둔 지향적이고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모용율천이 태사의에 앉았다· 붉은색의 태사의는 오직 그만을 위해 만든 귀물이다· 만년온옥으로 만들어져 절로 따스한 열기를 발산하고 이곳에서 운기를 하면 훨씬 빠른 속도로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때문에 모용율천도 어린 시절에는 만년온옥으로 만든 태사의에서 내공을 수련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태사의를 이용하지 않았다· 굳이 귀물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숨을 쉬고 있어도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의 내공은 절로 쌓였다· 모용세가가 수백 년 동안 보완하고 완성한 무극구영신공(無極九靈神功) 덕분이었다·
무극구영신공을 완성한 지금 그에게 내공의 경지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자신이 곧 완성된 내공의 집약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와아아!”
“습격이다!”
갑자기 운중천 정문 쪽에서 엄청난 함성과 함께 소요가 일어났다· 비상종이 울려 퍼지더니 운중천의 병력이 정문 쪽으로 이동했다·
모용율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온 모양이군·”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시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문 쪽에서 치솟는 엄청난 높이의 불길이 보였다· 침입자들이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방화를 한 것이다·
모용율천은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정문 쪽을 바라봤다·
말을 탄 일단의 무리가 정문을 부수고 침입했다· 핏빛의 전포와 갑주를 입은 수백 명의 기마대를 막기 위해 운중천의 무인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군마대인가?”
그는 어렵지 않게 혼란을 일으키는 무리의 정체를 추측해 냈다·
선두에서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거한은 부대주인 홍염귀마(紅炎鬼魔) 홍악산이 분명했고 그 뒤로 대주인 척천경과 포영휘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진무원에게 당한 상처를 모두 치유하고 미친 악귀처럼 날뛰고 있었다· 중요 전력이 빠져나간 운중천의 무인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운중천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었지만 모용율천은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서지 않았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언제까지 기다리게 만들 텐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용율천의 얼굴에 슬슬 짜증의 빛이 떠올랐다·
“더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줘야 나올 것인가? 멍석을 깔아줘도 망설이는군·”
순간 모용율천의 뒤쪽 공간이 일렁이면서 커다란 죽립을 눌러쓴 검은 일색의 인영이 은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모용율천이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봤다· 그러자 죽립을 쓴 남자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났다·
“설마 기다리고 있었던가?”
“이렇게 잘 짜인 판을 벌여놓고 나오라고 유혹하는데 어찌 안 올 수가 있겠는가?”
“으음!”
죽립 속에 감춰진 남자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모용율천의 말대로다·
지금 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밀야의 모든 행사는 모용율천을 노리고 행해진 것이었다·
사대마장을 이용해 운중천의 전력을 모조리 끌어낸다· 전력을 모두 내보낸 운중천은 빈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그때 모용율천을 기습해 죽인다는 것이 계획의 요체였다·
이 중 가장 자신이 없던 부분이 바로 모용율천을 운중천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무적세가는 오히려 운중천보다 더 철통같았다· 요새나 다름없는 무적세가에서 모용율천을 암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모든 계획을 짠 가경의조차 모용율천이 무적세가 밖으로 나올 확률을 일 할 미만으로 봤을 정도이다·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그런데 천운인지 모용율천이 무적세가를 나와 운중천으로 들어왔다· 밀야가 그토록 고대하던 기회였다·
군마대를 이용해 정문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예상대로 운중천 대부분의 전력이 정문으로 집중됐고 모용율천의 거처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모용율천의 숨통을 끊고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내는 것뿐이다·
남자가 죽립을 벗어 곁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이마 왼쪽에서부터 턱을 지나 목까지 이어지는 끔찍한 검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과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 그리고 굳은 의지를 보여주듯 꽉 다문 입술과 각진 턱이 그의 인상을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다·
모용율천이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자넨 누군가?”
“초한경· 그것이 내 이름이오·”
“좋은 이름이군· 한 가지만 물어보지· 장무경을 아는가?”
“전 부야주를 말하는 거라면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소· 지금은 다른 사람이 부야주가 되었소·”
“역시 그랬군·”
모용율천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모용율천의 모습을 보면서 초한경이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모용율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오직 살기와 분노만이 가득했다· 반대로 모용율천은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초한경의 살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아니면 느끼지 못하거나·
“이로써 우리 밀야는 무적세가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났소· 더 이상은 당신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단 뜻이오·”
“그런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적세가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오· 당신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완벽한 독립을 이룰 것이오·”
“그게 가능할 거라 보는가?”
모용율천이 반문했다·
“당신만 죽인다면·”
“자신은 있는 모양이군·”
“오직 당신을 죽이기 위해 키워진 나요· 무적세가의 무공은 이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소·”
“대단하군·”
모용율천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모용율천의 모습이 초한경의 화를 돋우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감정의 변화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초한경은 밀야에서 키운 자객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키워진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모용율천을 죽이는 것· 그를 위해 무적세가의 무공을 연구하고 파훼법을 만들어냈다·
스릉!
그가 허리에 찬 기형도를 꺼내 들었다· 기묘한 곡선으로 휜 기형도는 시리도록 차가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무적세가의 무공을 파훼하기 위해 최적의 형태로 제작된 기형도였다·
“밀야의 근원은 바로 무적세가· 당신들이 강호의 지배를 위해 만들어낸 공공의 적·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는 그 허상을 벗어던질 것이오·”
“본가가 밀야를 만든 지 한 이백 년 되었나 아니면 그보다 더 되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어쨌거나 그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당연히 홀로서기를 꿈꿀 법도 하지· 개도 때론 주인을 무는데 하물며 의지를 가진 인간인 바에야·”
모용율천의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초한경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가 실태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핏줄 깊은 곳에는 모용율천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밀야의 수뇌부라면 누구나 모용 성을 쓰는 자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었다·
이젠 밀야 내에서도 아주 극소수밖에 기억 못 하는 아득한 옛날의 진실·
모용세가의 근원은 중원이 아닌 새외였다· 모용씨를 쓰던 새외의 유목 부족이 있었다· 새외를 떠돌아다니면서 힘을 키운 모용씨는 한때 독자적인 나라를 세울 만큼 번성했으나 결국 중원에 병합당해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그들 중 일부가 떨어져 나와 모용세가를 만들었다· 이방인에 불과한 그들이 중원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세상의 편견과 견제에 맞서야 했다·
무적세가라는 이름을 얻기 전 모용세가는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웠고 자연스럽게 세력을 늘려갔다· 그렇게 세가라는 이름을 얻고 일성의 패주가 되었다·
힘을 가지게 되자 그들은 그 옛날 조상들이 그랬듯이 그들 역시 중원의 지배를 꿈꿨다· 실제로 모용세가는 몇 번이나 천하 지배를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강호인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강호를 살아가는 자들은 결코 누군가의 지배를 받길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자유를 꿈꿨으며 그 어떠한 통제도 받길 거부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중원이 아닌 새외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족(異族)인 바에야·
몇 번의 시도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엄청난 인적 희생을 치른 후에야 모용세가는 깨달았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강호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모용세가는 먼 훗날을 내다보고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강호를 자연스럽게 지배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적이 필요했다· 공공의 적은 강해야 했다· 또한 무자비해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밀야였다·
엄청난 자금과 무공서가 밀야로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그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렇게 밀야는 만들어졌고 모용세가의 필요에 의해 중원을 침공했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모래알 같은 강호인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운중천이 만들어졌다· 물론 모용세가의 자연스러운 개입이 있었다·
그렇게 운중천은 만들어졌고 모용세가는 운중천을 암중에서 지배하게 되었다· 모용세가나 운중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올 즈음에는 밀야를 이용해 사람들의 관심을 돌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밀야에서 모용세가의 지배를 조금씩 거부하기 시작했다· 세월은 사람들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고 자유를 꿈꾸게 만든다·
밀야 역시 그랬다· 강대한 힘을 가진 밀야가 모용세가에 의해 휘둘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야주와 인재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모용세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밀야를 통제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모용세가는 이번엔 북천문을 만들었다· 북천문을 이용해 밀야를 견제하고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모용세가는 밀야와 북천문을 적절히 이용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 이번엔 북천문이 그들의 행사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모용율천은 북천문을 세상에서 지우기로 결심했다· 내친김에 밀야도 자연스럽게 정리하려 했다· 수뇌부 대부분이 모용세가에 반기를 들었지만 부야주인 장무경은 아직까지도 모용세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장무경을 지원해 밀야 내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장무경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밀야를 장악해 갔다· 하지만 이내 야주와 사대마장의 반격에 직면했다·
모용율천이 계산하지 못한 한 가지는 바로 야주가 그의 예상보다 뛰어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는 가경의라는 천재를 이용해 장무경의 손발을 모두 자르고 결국 제거했다·
그렇게 밀야는 무적세가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전쟁은 장기화됐다· 모용율천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그동안 너무 오래 방관했어· 이제 새로운 판을 짤 때가 됐지·”
모용율천의 눈빛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