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 2장 검객은 평범함을 꿈꾸고,무제(武帝)는 비상을 꿈꾼다 (1)
조그만 방 안에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누워 있다· 그의 전신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은침이 고슴도치처럼 빼곡히 꽂혀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능군휘· 한때는 풍운번주(風雲旛主)라는 별호로 강호를 질타하던 위대한 무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능군휘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중년인은 바로 당기문이었다· 그의 곁에는 당미려가 조용히 앉아 있다·
당기문이 말했다·
“고통이 심할 겁니다· 하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인내하는 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거라네· 걱정하지 말게·”
능군휘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은 무척이나 태연하게 했지만 지금 그는 지독한 고통을 참고 있었다· 당기문이 펼치는 침술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종 독물과 침술을 병행해서 능군휘의 선천지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독의 배합이 조금만 잘못되거나 침의 위치가 조금만 벗어나도 즉사할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기문이 제안하고 능군휘가 받아들인 방법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단시간 안에 치료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당연히 지독한 고통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었다·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일단 상한 몸부터 정상으로 돌린 다음 본격적으로 치료하겠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많이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런가? 그것참 기대되는군· 허허!”
옅은 미소를 짓는 능군휘의 모습에 당기문이 경외의 표정을 지었다· 아마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는커녕 오래전에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 강인한 인내심과 정신력 하나만으로도 능군휘는 실로 존경할 만한 무인이었다· 그래서 당기문은 더욱 최선을 다해 능군휘를 치료할 생각이다·
“고통만 참으신다면 육 개월 최소 그 안에 다시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고통을 참는 데 무척이나 익숙하다네· 그러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자네 마음대로 치료하게·”
“감사합니다·”
“환자가 의원의 말을 따르는 게 무슨 감사받을 일인가? 내가 오히려 자네에게 고마워해야지·”
능군휘의 말은 진심이었다·
흑월에서도 최소 일 년에서 삼 년 정도는 정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정도로 그의 상처는 엄중했다· 그런 상처를 단 여섯 달 안에 낫게 해주겠다는데 그따위 고통이 대수겠는가?
그런 능군휘의 모습에 당기문이 감탄했다는 눈빛을 했다·
‘역시 대단하구나· 정말 하늘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분이구나·’
그는 능군휘의 전신에 꽂힌 은침들을 하나씩 회수하기 시작했다· 침술을 펼칠 때와 마찬가지로 회수하는 것 역시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자칫해서 순서라도 틀리면 크나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기 때문에 당기문은 혼신의 집중을 다했다·
“휴!”
겨우 침을 모두 회수한 당기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을 빼자 능군휘는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는지 미동 하나 없었다·
“나가자꾸나·”
“예 숙부님·”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독당의 제자 한 명이 다가왔다·
“당주님·”
“무슨 일이냐?”
“군사께서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그것까지는 잘····”
“알겠다· 내가 직접 가마·”
“예·”
“미려는 이곳에 남아서 능 대협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거라·”
“알겠어요·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음!”
당기문이 당미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후 걸음을 옮겼다· 당미려가 그런 당기문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당미려의 시선이 동쪽을 향했다·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곳 그리고 그가 있는 곳으로·
군웅전(群雄殿) 최근에 지어진 전각이다·
대부분의 건물이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돌과 흙으로 지어진 데 반해 군웅전은 제대로 된 전각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당문과 청성파 아미파의 지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큰 규모이다 보니 수뇌부 회의는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군웅전 안에는 북천문의 수뇌부는 물론이고 청성 당문 아미파에서 파견 나온 장로들까지 모조리 모여 있었다·
“제가 제일 늦었군요·”
당기문이 사과의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자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당 당주님· 이제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공적인 자리이기에 하진월은 공적인 직함을 불렀고 당기문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당기문이 자리에 앉자 한쪽에 앉아 있던 풍제 경무생이 입을 열었다·
“그래 군사·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우리를 다 소집한 건가?”
“급히 의논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천하에 변고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변고?”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진월이 하는 말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돌로 쌀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하진월을 신뢰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진월에게 모아졌다·
“어제 밀야의 간자 한 명을 잡아 왔습니다· 밤새 그를 심문을 했습니다·”
“음!”
이곳에 있는 사람 중 하진월의 말뜻을 모를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말이 심문이지 지독한 고문이 가해졌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솔직히 그자에게서는 알아낼 것이 별거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무자서책을 분석한 결과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마도광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간자를 심문할 때 같이 있던 마도광이다· 당연히 무자서책도 봤다· 하지만 무자서책에 있는 내용은 별게 없었다· 적어도 마도광의 눈에는 그랬다·
“무자서책은 저같이 그런 쪽으로 공부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체계와 문자 배열로 이뤄져 있습니다· 당연히 그쪽 방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봐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흐흐! 역시 그렇구려· 내가 모자란 게 아니라 군사가 똑똑한 거구려·”
마도광의 너스레에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 하진월 역시 무자서책 안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간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무자서책에 담긴 암호 방식은 그도 생전 처음 보는 아주 고난도의 배열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백 년을 봐도 모를 정도로 정교하면서 은밀했다·
무자서책을 작성한 이는 하진월만큼 똑똑하며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했다· 하진월은 본능적으로 무자서책을 가경의가 작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자서책은 간자가 이곳 사천성에서 거점을 확보할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일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군사가 똑똑하기는 하지· 크흠!”
마도광의 엉뚱한 추임새에 장내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하진월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제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곧 천하가 혼돈에 빠질 테니 그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천하가 혼돈에 빠질 때? 지금도 혼돈 아닌가?”
“물론 지금도 혼돈이지요· 하지만 그 정도라면 굳이 무자서책에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으음!”
“분명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천하가 더욱 혼돈에 빠질 겁니다·”
“그런····”
“혹시 군사께서는 예측하고 계신 게 있소?”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확실치 않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군사의 고견을 듣고 싶소·”
경무생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진월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순수한 제 추측이니 흘려들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들은 사대마장을 움직였습니다· 밀야에 얼마나 더 숨겨진 전력이 있는지 몰라도 사대마장이라면 표면적으로 드러난 최강의 전력· 일부러 그런 전력을 드러내 놓았다는 것은 더 큰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더 큰 목적? 사대마장이 중원 전역에 분탕질을 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단 말이오?”
모두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진월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진월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사대마장을 잡기 위해 운중천의 고수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그 말은 곧····”
“곧?”
“운중천이 빈집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음!”
그제야 사람들은 하진월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밀야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겁니다·”
“허! 무섭구나· 산서성과 섬서성 전반에 걸친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우다니·”
하진월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가경의 어디까지 보고 있는 것인가? 운중천? 아니면 그 이상?’
단 한 번도 가경의라는 존재를 보지 못했지만 왠지 그의 의도와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진월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래서 가경의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자신은 하지 않았고 가경의는 진행하는 일·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히 짐작도 가지 않기에·
☆ ☆ ☆
신수공방(神手工房)은 이름 그대로 무기를 만드는 공방이다· 감히 신수(神手) 즉 신의 손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뛰어난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공방이기도 했다·
신수공방은 이백 년래 중원 최고의 공방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명검과 명기가 탄생했고 그것들은 모두 운중천에 독점 공급되었다·
신수공방의 주인은 바로 철기신수(鐵器神手) 이장후였다· 이장후는 중원 최고의 장인이면서도 특이하게 무공 또한 절정의 반열에 이른 고수였다·
운중천의 비호를 받는 데다가 이장후 또한 절정의 고수였기에 누구도 신수공방을 감히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장후의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눈앞에 있는 단 한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산처럼 장대한 체구에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 그가 든 거대한 도끼에는 찐득한 피가 가득 묻어 있었고 그가 딛고 있는 대지에는 깊은 피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주위로 보이는 수많은 시신은 방금 전까지 그와 함께 무기를 만들던 장인들이다·
파산마부(破山魔斧) 혹은 파천마부(破天魔斧)라 불리는 남자· 바로 사대마장 중 한 명인 만추산이 중원 한가운데 있는 신수공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장후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 사대마장이····”
상대는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남자이다·
언젠가 움직일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시기에 그것도 중원 한복판에 있는 신수공방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만추산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이장후를 향해 다가왔다· 이장후는 그런 만추산의 모습이 살 떨리게 두려웠다· 하지만 이장후는 용케 물러나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은 모두 그의 제자이고 가족이었다· 삶의 터전은 짓밟히고 그의 가문이 이제까지 일궈온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혼자 살아남겠다고 도주한단 말인가? 죽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만추산이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장후를 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크하하하!”
절망에 가득한 그 눈빛 모든 것을 잃은 허망한 얼굴이 만추산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 만추산은 희열을 얻는다· 그런 파괴 욕구와 희열이 그가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이야아아!”
이장후가 만추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몸짓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래야지·”
만추산은 그런 상대의 머리를 단숨에 박살 내버렸다·
커다란 도끼에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잠시 비척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날 신수공방엔 커다란 화재가 일어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키우던 짐승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한 대참사였다·
사람들은 신수공방의 대참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악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신수공방을 시작으로 중원 전역에 있는 큰 문파와 운중천의 지부들이 정체 모를 사대마장에게 공격당해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 이상 사대마장이 분탕질 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결국 운중천에서는 십대장로를 비롯한 정예를 내보내 사대마장을 추적하게 했다·
그렇게 천하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