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 1장 지옥을 거니는 자, 영웅이라 불린다 (3)
조성현은 평범했다· 시중에 나가면 아마 열에 한두 사람은 반드시 그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평범했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성현은 자신의 그런 평범함이 좋았다·
평범하다는 것 누구에게도 주목 받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밀야의 정보 조직 중 하나인 진무당(眞武堂) 소속이었다· 밀야엔 수많은 정보 조직이 존재한다· 진무당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에 주로 투입되는 정예 조직이었다·
조성현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옷에 묻은 흙과 나뭇가지가 모조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그는 자신 있게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천성을 둘러싼 험산이 보였다· 마치 커다란 병풍처럼 엄청난 산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는 저 산을 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것이 관도가 모두 막힌 지금 사천성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위험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실제로 조성현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사천성을 둘러싼 험산을 넘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치가 떨리는 것은 험산 곳곳 사람이 다닐만한 길목에 설치된 각종 함정과 기관이었다·
주위 풍경과 전혀 구별할 수 없게 설치된 함정들은 그와 함께 사천성으로 들어오던 동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열 명이 출발했는데 결국 목적지인 사천성에 들어온 이는 조성현 한 명뿐이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기필코 알아내고 말 것이다·’
수많은 동료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밀야에서는 사천성 내의 상황을 알아내고자 간자를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도대체 사천성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가경의는 사천성 안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길 원했고 조성현은 그런 가경의의 의문을 해결해야 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조성현은 최대한 태연한 기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사천성 북부에 있는 평무(平武)현이었다· 평무현에는 백현무관이 있다·
성도에 있는 것도 아닌 사천성 외곽의 조그만 현에 있는 무관이다· 관주의 무공 수준 또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전혀 위협적인 문파가 아니었다·
그것이 이전까지 밀야가 파악한 정보였다· 하지만 조성현은 그런 기존의 정보는 싹 무시했다· 사천성으로 들어가는 관도가 모두 막힌 지금 기존의 정보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완전한 무(無)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수집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일단 평무현에서 인근 주민으로 위장한 후 성도로 향한다·’
이미 사천성에 들어오기 전 수차례 검토한 계획이다·
우선 성도에 거점을 잡고 은밀히 활동한다· 그러다 보면 밀야에서 제이 제삼의 간자를 더 투입할 것이고 그 후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된다·
조성현은 평무현으로 향했다·
신분을 위조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로 있는 사람의 신분을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의 신분을 이용하면 발각될 위험이 적었다·
평무현에 도착한 조성현은 신분을 도용할 만한 자를 찾아 눈을 빛냈다· 겉모습은 평범하고 홀로 동떨어져 사는 사람 그리고 당장 없어져도 누구 한 명 찾지 않을 사람· 조성현은 그런 사람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성현은 그런 사람을 찾아냈다· 서른 살 초반으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 부모는 그가 열 살 무렵에 돌림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지금은 외딴 오두막에 혼자 살고 있다· 주위엔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친구 한 명 없었다·
직업은 나무꾼· 그 한 명 없어진다고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쓸 사람이 없었다· 조성현이 원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는 조성현과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조성현은 그를 죽이고 신분을 갈취하기로 결심했다· 나무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평무현에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지·’
조성현과 같은 간자들이 가장 원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다· 조성현은 망설이지 않고 나무꾼이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접근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렇게 날이 벼려진 비수가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오두막 안은 무척이나 컴컴했다· 그 때문에 조성현은 안력을 집중해야 했다·
그때였다· 어둡기만 하던 방 안에 갑자기 불이 켜지면서 조성현의 안구를 강하게 자극했다·
“크윽!”
갑작스러운 불빛에 조성현이 눈을 질끈 감는 사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사의 말대로군· 어째 간자라고 불리는 놈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창의성이 부족한 것인지·”
“무슨?”
조성현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쾅!
하지만 그의 몸은 나갈 때보다 배는 빠르게 더 안으로 튕겨 들어왔다· 나무꾼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조성현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좀 살살 하지 그랬냐? 애를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놨구만·”
“흐흐! 알잖아? 정보를 다루는 족속들이 얼마나 독한지· 아예 초장부터 길을 잘 들여놔야지·”
순간 거구의 사내가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늑대처럼 거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의 등장에도 나무꾼은 놀라지 않았다·
그때 조성현이 겨우 고개를 들어 나무꾼과 거구의 사내를 올려다봤다·
“너··· 희들은 누구냐?”
“우리? 곧 알게 될 거야·”
나무꾼이 씨익 웃으며 조성현의 마혈을 제압했다· 그러자 조성현이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나무꾼은 이어 조성현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휘저었다·
우두둑!
잠시 후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조성현의 어금니 하나가 뽑혀 나왔다· 나무꾼이 어금니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말했다·
“역시 자살용 독이 들어 있군·”
그는 내친김에 조성현의 몸을 샅샅이 뒤져 소지품을 모두 수거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어른 손바닥만 한 조그만 책자였다·
나무꾼과 거한이 책자를 살폈지만 하얀 여백만 보일 뿐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무자서책(無字書冊)이었다·
“요상한 책잔데· 뭐지?”
“우리가 생각할 게 뭐 있나? 군사께 데려가면 다 알아서 하실 텐데·”
“하기는·”
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꾼과 거한은 바로 북천문의 무인이었다·
어느 날 군사 하진월이 비황대 소속의 무인들을 다수 불러 뜬금없는 지시를 내렸다·
그가 정해준 지역에서 그가 설정해 둔 신분으로 활동하라는 것· 그러면 반드시 접근해 오는 자들이 있을 테니 그들을 사로잡아 북천문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곧 여러 곳에서 간자들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진월은 간자들이 가장 혹할 만한 조건을 가진 자를 가장 접근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배치해 두고 낚시를 한 셈이다·
은류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하진월이기에 누구보다 간자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들의 속성을 잘 이용했다·
두 사람은 그런 하진월의 심계에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그 양반은 인간이 아냐·”
“누가 아니라는가? 사파 연합을 이끄는 것을 보면 아주····”
갑자기 거한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존의 강자인 당문과 청성파 아미파가 찍소리 한번 못하고 하진월에게 끌려가고 있다· 아미파의 승려들은 물론이고 대가 센 당문과 청성파의 무인들까지 하진월에게 끌려가는 모습은 왠지 모를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럼 나는 본 문에 다녀오지·”
“아 젠장! 또 나 혼자 어리바리 나무꾼 행세를 해야 하나?”
“흐흐! 잘 지키고 있으라구· 또 언제 눈먼 물고기가 미끼를 물을지 모르니”
“그러지·”
거한이 조성현을 어깨에 걸치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한참을 달리던 그가 도착한 곳은 평무현 근처의 조그만 저택이었다· 그는 그곳에 미리 준비해 둔 말을 타고 곧 서부고원 지대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중간 중간 말을 바꿔 타면서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그렇게 닷새를 달리자 눈앞에 거대한 서부고원 지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겨우 두어 달 정도 떠나 있었을 뿐인데 족히 몇 년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북천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본래 비황대 출신의 마적이었다·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약탈하는 것이 몸에 배다 보니 한곳에 머물러 있지를 못했다· 또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쉽게 정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북천문에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는 웃음도 많아졌고 정을 주는 사람도 많아졌다· 문주인 진무원도 좋았고 동료들도 좋았다· 무엇보다 그는 북천문 그 자체가 좋았다·
“와우! 그새 길을 넓혔나?”
북천문으로 오르는 산길을 보며 거한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예전에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 조그만 소로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오를 정도로 넓은 대로가 정비되어 있었다·
누구도 서부고원으로 오르는 이런 큰 길이 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거한은 서둘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에 검문을 한 번 받았다· 검문을 하는 이들도 그와 같은 비황대 출신의 마적이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야 거한은 북천문에 오를 수 있었다·
두 달 만에 돌아온 북천문은 그새 많이 변화해 있었다· 못 보던 전각이 세 채가 더 들어섰고 숙소도 십여 채가 더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승도속의 각양각색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문과 청성파 아미파에서 파견 나온 무인들이었다· 전각과 숙소는 모두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세 문파가 합류한 이후 북천문이 있는 서부고원은 철통같은 요새로 거듭나고 있었다· 하진월은 요소요소에 전력을 배치했고 곳곳에 진법을 펼쳐 놓아 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는 절대로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동관이 아냐?”
뒤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 대주님·”
거한보다 더 큰 체구의 남자가 그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바로 비황대의 대주이자 북천문의 무주인 마도광이었다·
혈안광호(血眼狂虎)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불리던 마도광이 조금은 순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거한은 알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전장에 나가면 저 순해 보이는 얼굴이 피에 미친 호랑이로 변하리라는 것을·
거한이 어깨에 짊어진 조성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다시피 피라미 한 마리가 걸려서 군사께 데려가는 중입니다·”
“흐흐! 그래? 잘됐네· 나도 지금 군사를 보러 가는 중인데 같이 가지·”
“예!”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진월의 거처로 들어갔다·
“군사 나 마도광이오· 평무현에 파견 나갔던 동관이하고 함께 왔소·”
간만에 차를 마시며 제자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하진월이다· 그는 싫은 내색 하나 내보이지 않고 두 사람을 미소로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끙차! 평무현에서 낚은 고기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기다리고 있으니 접근해 오는 녀석이 있더군요·”
“그렇습니까?”
“이건 놈의 품에서 나온 물건들입니다·”
거한은 하진월에게 무자서책을 비롯해 몇 가지 물건을 넘겼다· 하진월은 다른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자서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 요상한 책입니다·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그따위 서책을 뭐하러 갖고 다니는 건지·”
“후후! 글자가 보이지 않을 뿐 쓰여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선우야 거기 왼쪽 선반 위에 있는 검은 약병이 있을 게다· 가져오너라·”
“예!”
한선우가 대답과 함께 검은 약병을 가져왔다· 하진월은 약병의 액체를 조심스럽게 무자서책에 뿌린 후 문질렀다· 그러자 깨알 같은 검은 글씨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흠! 역시 밀야군·”
“밀야에서 파견한 간자가 맞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하진월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거한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조성현의 마혈을 풀었다· 마혈이 풀리고 나서도 조성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끄으응!”
한참을 용을 쓴 후에야 조성현은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하진월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진월이 조성현의 앞에 쭈그려 앉으며 물었다·
“밀야에서 왔습니까?”
“무슨 헛소리냐? 나는····”
“여기에 이렇게 적혀 있는데요?”
발뺌을 하는 조성현의 코앞에 글자가 드러난 무자서책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성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무자서책이 분명했다· 하지만 특수한 처리를 해서 글자가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하진월이 들고 있는 무자서책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가경의가 보내서 왔나요?”
“····”
조성현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가경의라는 이름은 결코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조성현이 입을 다문 채 혀로 입안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독단이 든 어금니는 느껴지지 않았다·
‘제길!’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공력을 운용해 심맥을 터뜨리려 했다· 하지만 내공마저 제압당했는지 한 줌의 공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조성현을 보며 하진월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가경의가 보낸 것이 맞나 보군요·”
진무원에게 들은 이름 가경의·
그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하진월은 피가 싸늘히 식고 전신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섬뜩한 경험을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가경의라는 인물이 자신과 운명적으로 대립할 존재라는 것을·
북천문의 군사로서 자신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대상은 바로 가경의였다·
“우린 이야기할 것이 꽤 많을 것 같군요·”
하진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