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 1장 지옥을 거니는 자, 영웅이라 불린다 (2)
부현의 전투는 운중천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밀야는 전력을 북쪽으로 후퇴시켰다· 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당분간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만일 운중천의 전력이 온전했다면 이 기세를 몰아 단숨에 밀야를 향해 북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장인 홍천학이 목숨을 잃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암살을 당한 이는 비단 홍천학만이 아니었다· 서문혜령의 예상대로 고위 인사들이 무영이 이끄는 암살단에 당했다· 그 때문에 명령 체계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나마 질서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던 것은 바로 담수천 덕분이었다· 그의 강력한 존재감이 무인들의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담수천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하얀 천으로 팔꿈치 위쪽을 동여맨 서문혜령이 있었다·
“괜찮소?”
“전 괜찮아요·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처를 입지 않았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오· 겨우 그 정도에 그쳐서· 그나저나 홍 장로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니 난감하구려·”
“누구도 홍 장로님이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예요·”
“절호의 기회?”
“수뇌부가 대부분 암살을 당했어요· 지휘 체계가 완벽한 공백 상태예요·”
“흠!”
담수천이 눈을 빛냈다·
“운중천에서 새로운 지휘부를 구성해 파견하려면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거예요· 그들이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데 또다시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동안 수많은 무인이 죽어나갈 거예요·”
서문혜령의 말이 길어질수록 담수천의 입가에 어린 미소도 짙어져 갔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이 이곳의 지휘권을 장악할 대의명분이에요·”
“지휘권을 장악하라 이건가?”
“이젠 당신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때가 되었어요·”
“척마대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번 전투에서 명백히 한계를 드러냈어요·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만 존경하지는 않아요· 그들을 계속 안고 가야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해요·”
“흠!”
“이곳을 장악해야 해요· 영웅은 지옥을 딛고 일어서는 법·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은 당신의 손과 발이 될 거예요· 이곳은 당신을 위한 대지예요·”
서문혜령의 말은 무척이나 조곤조곤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담수천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생각을 할 여유였다·
잠시 후 담수천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내 당신 말을 따르겠소·”
“잘 생각했어요·”
서문혜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담수천이 결심한 이상 그것으로 끝이었다· 담수천은 이곳을 완벽하게 장악할 것이고 이곳은 그의 튼튼한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명분도 위상도 완벽했다· 그 누구도 담수천의 행사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담수천은 그 즉시 행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모든 무인을 소집했다· 영문도 모른 채 공터로 불려 나온 무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그러게· 중대 발표라도 있는 모양이지·”
“무슨 발표일까?”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져 갔다·
그들 한가운데 진무원이 있었다· 진무원은 자연스럽게 운중천의 무인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런 진무원에게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근처에 있던 몇몇 이들은 진무원을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바로 진무원의 활약을 멀리서나마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무원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에 섣불리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과 달리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용무성과 종리무환 등이었다·
“하하! 자네 대단하더군· 설마 고립된 척마대를 구할 줄은 정말 몰랐네·”
용무성이 진무원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대단하군요 단 소협·”
종리무환도 진무원을 칭찬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나 못하는 일이기도 하죠· 단 소협의 무위가 그 정도로 대단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자네 주 무공이 봉법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봉을 안 갖고 다니는 것 같던데·”
“그 외에도 자잘한 무공 몇 가지를 알아서 굳이 봉에 얽매일 이유는 없습니다·”
“허! 대단하군·”
용무성이 순수하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비록 활약한 지역이 달라 진무원의 무력을 멀리서 견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봉법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대단했다·
용무성은 강호에 신성이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진무원의 활약은 그 뒤에 나온 담수천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묻혀 버리긴 했다·
“와아아!”
그 순간 함성이 울려 퍼졌다· 담수천이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무인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이다· 담수천의 등 뒤로 심원의를 비롯해 살아남은 몇 명의 척마대 무인들이 뒤따랐다·
사람들의 함성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에 용무성과 종리무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의 함성 속에 담긴 광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단상 위에 오른 담수천이 오연한 시선으로 군웅들을 내려다보았다· 군웅들은 그런 담수천의 조그만 몸짓 눈짓 하나에도 열광적인 환호성을 보냈다·
용무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야 원 사교의 교주가 따로 없군·”
“강호란 곳이 원래 영웅에게 열광하는 곳이 아닙니까· 이 정도의 반응이 당연하지요·”
“흠!”
용무성이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군웅들의 환호가 잠시 잦아들 때쯤 담수천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늘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수많은 동료가 중원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고 이렇게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군웅들은 숨을 죽였다· 그만큼 담수천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밀야는 물러갔습니다· 하나 얼마 후면 그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더 많은 병력과 더 강한 무인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
“불행히도 우리는 수장인 홍천학 대협을 암살로 잃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수뇌부가 적의 암살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성스러운 싸움을 지휘해 줄 사람들을 잃은 겁니다·”
“아!”
사람들의 입에서 절망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운중천에서는 새로운 지휘부를 구성할 겁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려면 최소 한 달 이상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곳을 한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한 달이라니? 그동안 누가 우리를 이끌어준단 말입니까? 차라리 담 대협이 우리를 이끌어주면 안 됩니까?”
군웅 중 한 명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곳에서 호응이 터져 나왔다·
“부디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이끌어주십시오·”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하나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담수천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이 담수천이 이곳 부현을 맡고 싶습니다·”
“와아아아!”
순간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담수천!”
“창천무제!”
뒤이어 사람들이 담수천의 이름과 별호를 연호했다·
강호사가 시작된 이래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이는 아마 담수천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용무성이 중얼거렸다·
“불귀곡의 담 곡주가 씁쓸해하겠군· 그렇게 견제했는데 저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곳을 손에 넣었으니·”
“불귀곡(不歸谷)?”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자 용무성이 실수를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불귀곡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불귀곡은 강호의 비역 중 하나이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곳의 주인은 바로 아홉 하늘 중 한 명인 불수불언(不手不言) 담적심이었다·
담적심은 평소 강호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성격이 불같으면서도 편협해 일단 그에게 한번 찍히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같은 담씨라····’
강호의 비역답게 불귀곡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은류의 힘으로도 알아낸 것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담수천에 연관된 것은 없었다·
‘흑월엔 혹시 그와 연관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진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담수천을 바라보았다·
담수천은 패자(覇者)의 기도를 발산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이미 그를 이곳의 지배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군림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남자·
담수천이 그의 앞에 있다· 그때 우연인지 모르지만 담수천과 진무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담수천의 입가에 그어진 한 줄기 미소 왠지 그의 미소 뒤로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의 생각이겠군·’
서문혜령은 담수천을 위한 판을 착실히 만들고 있었다· 개인의 무위도 가공할진대 이제는 그럴싸한 세력까지 갖췄으니 그가 어디까지 비상할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뒤이어 척마대의 대주 심원의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 척마대는 담 대협을 보좌해 무림의 질서를 새로 세울 것을 약속하겠다·”
심원의의 천명에 군웅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지금 군웅들의 눈에는 오직 담수천만이 보였다· 그를 향한 열광적인 지지와 광기는 후끈한 열기를 방출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담수천은 그렇게 부현에 주둔한 운중천의 전력을 손에 넣었다·
진무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담수천 확실히 인걸이군·”
“단 소협도 마찬가지예요·”
그 순간 갑작스럽게 여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묘령의 여인이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왼쪽 팔꿈치 위쪽에 흰 천을 감은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서문혜령의 등장에 용무성과 종리무환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알은척을 했다· 서문혜령은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진무원을 향해 있었다·
“단천운 소협 맞죠?”
“그렇습니다만·”
“서문세가의 서문혜령이에요· 반가워요·”
서문혜령이 포권을 취했다· 진무원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그 유명하신 적화선자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단 소협이 척마대를 돕는 모습을 지켜보았답니다· 단 소협의 무위에 탄복했어요·”
“별거 아닙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된답니다· 단 소협은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는 분이에요·”
서문혜령의 눈에 이채가 떠올라 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녀의 속내는 무척이나 복잡했다·
진무원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마쳤다·
조사 결과 모든 것이 완벽했다· 공작문이란 문파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도 확인했고 단천운이라는 존재가 공작문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서문혜령은 단천운이라는 이름 석 자에는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이 들었다·
서문혜령이 진무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분위기와 눈빛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아는 어떤 사람과 비슷한 것 같아서 그만·”
“괜찮습니다· 얼굴이 평범해서 그런지 누군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듣습니다·”
진무원이 웃었다· 그가 분한 단천운의 얼굴은 그야말로 평범해서 변명하기가 수월했다·
“단 소협·”
“말씀하십시오·”
“우선 척마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역시 의기가 하늘을 찌르는 분이시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말인데 단 소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경청하겠습니다·”
“단 소협 척마대에 들어오시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