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 8장 난세는 영웅을 원하고, 영웅은 패웅을 부른다 (4)
처음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가 죽어 나가고 있었고 혼전으로 인해 적아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런 아수라장에서 누군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가 한 명 있었다·
척마대와 천무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향해 담담히 걸음을 옮기는 사내·
맨 처음 그를 인지한 사람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저 사람?’
고요했다·
모두가 수라로 변해 날뛰고 있었지만 사내가 걸어가는 길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싸움이 그를 피해가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저 남자가 싸움을 피해가는 것인지도·’
겉모습은 평범해 보였다· 키는 훤칠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신체 어느 곳도 특별히 도드라지는 곳이 없었다· 시장 통에서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그 역시 구별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혜령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평범함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문득 그가 바닥에 떨어진 장봉을 주워드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의 애병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피 칠갑이 된 볼품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에 들린 그 순간 장봉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살상무기로 돌변했다·
퍼버벙!
남자가 장봉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터져 나가며 서너 명의 무인들이 비명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크윽!”
항거불능의 상태로 발버둥을 치는 무인들은 모두 밀야에 속한 자들이었다·
‘우리 편인가?’
서문혜령의 눈에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만일 저자가 적이었다면 운중천 입장에서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섭도록 깔끔한 손속과 소름 끼치도록 정밀한 효율성 그리고 단순한 투로까지· 남자의 몸짓과 행동의 모든 것은 살상을 극대화하기 위한 준비동작이었다·
‘어디서 이런 자가·’
서문혜령은 전신에 소름이 다 끼치는 것을 느꼈다·
척마대의 무인들 역시 살상을 위한 괴물로 탈바꿈을 했다· 하지만 남자처럼 깔끔하면서도 냉철한 느낌을 주진 못했다· 스스로의 통제가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남자는 살상을 하면서도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광기의 침습은 남자와는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도대체 누구지?’
서문혜령이 뒤쪽에 있던 채화영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채화영이 다가왔다·
“저 남자 보이죠?”
“장봉을 쓰는 남자 말인가요?”
“그래요· 언니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나요?”
“저는 저 남자처럼 효율적으로 살상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어요·”
“역시 언니 눈에도 그렇게 비친단 말이군요·”
서문혜령의 눈이 반짝였다·
“저자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신분을 비롯해 출생지와 소속문파 그리고 성향까지 모두다·”
“알겠어요·”
분명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경험하고 만나본 듯한 분위기·
입안이 모래를 씹은 듯 껄끄러웠다·
무엇보다 그가 등장한 시점이 절묘했다· 마치 척마대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외곽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척마대의 운용에 한결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서문혜령의 눈에는 무척이나 작위적으로 보였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놀이판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서문혜령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는 단천운의 얼굴을 하고 전장에 출두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전쟁의 균형추를 최대한 팽팽하게 유지하는 것· 그로 인해 얻는 것은 양측의 전력 소모였다· 운중천과 밀야는 너무나 막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금의 북천문 전력으로 두 문파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최대한 이들의 전력을 소모시킨다·’
잔혹한 명제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운중천이나 밀야에 투신한 이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운명에 휩쓸리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는 자들이 제멋대로 운명에 휩쓸린 자들이었다· 반대로 타인의 운명을 휘두르는 자들은 그리 많이 죽지 않는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속살을 내보일까 몇 겹의 갑옷을 껴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갑옷을 모조리 벗겨주마· 모두의 눈앞에서· 그때 또다시 뭐가 남을지 내 눈으로 지켜보겠다·’
진무원이 휘두른 장봉에 밀야의 무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주 무기는 검이었다· 하지만 설화가 부서진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검을 만든 적은 없었다· 그저 필요성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검을 주워 쓰거나 초죽목석을 이용했을 뿐·
이제 그는 무기에 구애받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봉이든 채찍이든 상관없었다· 그 어떤 무기라도 입맛에 맞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일의극(一意極)이면 만의극(萬意極)이라·
검의 극의에 이른 진무원은 만 가지 병기를 검처럼 다룰 수 있었다·
펑!
“크헉!”
장봉을 뻗었는데 공기가 터져 나가더니 밀야의 무인이 벼락처럼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런 무인의 가슴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기랄!”
밀야의 무인들이 그제야 진무원을 인지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기다란 장봉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다가오는 진무원에게 수많은 밀야의 무인이 쓰러졌다·
그 때문에 척마대를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전열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헉헉!”
심원의가 숨을 고르며 앞을 노려보았다·
천무대주 궁상화가 마찬가지로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호각이었다· 누구도 확실하게 서로를 제압하고 있지 못했다·
‘밀야에 이런 자가 있었던가?’
‘역시 척마대를 이끌 만하구나· 강해·’
그들은 서로에게 감탄을 했다· 하지만 상황은 심원의에게 불리했다· 척마대가 밀야의 진영 한가운데 고립되어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데 반해 천무대는 밀야의 든든한 지원을 업고 척마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갈수록 척마대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계속되는 압박과 연환 공격 그리고 인해 전술에 척마대는 전멸하기 직전이었다· 벌써 척마대의 절반이 죽었고 남은 사람들 중 절반은 중상을 입어 운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언젠가부터 그들을 둘러싼 포위망이 느슨해지면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무슨 일이지?’
심원의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포위망의 외곽이 술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세월 밀야와 싸워 온 경험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전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가 수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퇴각한다·”
척마대가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누구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척마대의 무인들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마음대로 퇴각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묵원광이 만병파정을 휘두르며 척마대의 퇴로를 막아섰다· 그의 만병파정은 수많은 척마대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살기를 줄기줄기 피워 올리는 묵원광의 모습에 척마대의 얼굴에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백인력한이라는 별호답게 묵원광의 무위는 실로 가공했다·
그 어떤 무기도 묵원광의 만병파정을 막지 못했다· 일단 만병파정과 격돌하며 무기가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묵원광 때문에 많은 척마대의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에 척마대의 무인들에게는 묵원광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었다·
“크윽!”
척마대의 얼굴에 참담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만병파정이 가공할 기세로 척마대를 향해 날아왔다· 척마대의 얼굴에 암담한 표정이 떠오르는 그 순간이었다·
쐐액!
갑자기 기다란 물체가 그들과 만병파정 사이에 끼어들었다· 뱀처럼 긴 물체는 만병파정의 옆면을 때리며 슬쩍 궤도를 바꿨다· 그 때문에 만병파정이 원래의 목표에서 빗겨나 허무하게 대지를 때렸다·
쩌어엉!
굉음과 함께 대지에 커다란 구덩이가 패이면서 흙과 돌덩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척마대의 무인들 중 누구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누구냐?”
묵원광이 안색을 굳히며 소리쳤다·
만병파정을 잡은 호구가 찢어져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묵원광은 방해자가 만만치 않은 무력의 소유자임을 깨닫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한 이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가 드디어 앞을 가로막은 모든 이를 무너뜨리고 척마대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진무원이 말없이 장봉으로 묵원광을 겨냥했다· 그러자 묵원광의 눈이 흉포하게 빛났다·
“건방진!”
만병파정이 진무원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토록 가공할 위력을 떨치던 만병파정도 진무원이 휘두르는 장봉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낭창낭창 휘어지며 뱀처럼 파고드는 장병의 묘용에 묵원광이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원광!”
순간 이제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율사희가 합세했다· 율사희의 채찍이 독사처럼 진무원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진무원은 당황하지 않고 장봉으로 그녀의 채찍을 쳐 내거나 흘려보냈다·
“이익!”
율사희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흑련편(黑蓮鞭)은 밀야에서도 알아주는 장인이 만든 기병이었다· 교룡의 심줄과 정교하게 제련된 철심을 꼬아 만든 흑련편의 표면에는 미세한 돌기가 나 있어 어떤 물체라도 휘감아 찢어발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장봉은 기름이라도 바른 듯 전혀 잡히지가 않았다·
타다다닥!
순식간에 수십 번이나 장봉과 흑련편 그리고 만병파정이 엇갈렸다 떨어졌다· 그사이 살아남은 척마대의 무인들이 진무원이 연 퇴로를 이용해 빠져나가고 심원의만이 남았다·
심원의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천무대의 대주인 궁상화가 놓아주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놓쳐도 너만은 놓칠 수 없다·’
어차피 척마대 전력의 반은 심원이다· 뜻밖의 방해자 때문에 온전히 목적을 이루긴 힘들지만 그래도 심원의만 죽인다면 목적의 반은 달성하는 셈이다·
‘반드시 죽인다· 반드시!’
심원의 역시 그런 궁상화의 의지를 읽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으! 여기가 나의 무덤 자리라구?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그가 이를 악물었다·
야망을 위해 이제껏 달려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야망일로를 달려온 그의 마지막은 이렇듯 허무한 전장이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야아아!”
심원의가 고함과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냈다·
홍옥마수가 붉은빛을 발했다· 이번 일수에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공력이 마치 썰물처럼 모조리 빠져나갔다·
그러나 궁상화는 그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고 오히려 역습을 해왔다· 공력은 이미 바닥 난 상황 피할 여력이 없는 심원의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죽더라도 궁상황의 얼굴은 똑바로 보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독기 어린 심원의의 눈빛에도 궁상화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나의 승리다·”
그가 잔혹한 미소와 함께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우!”
갑자기 전장에 한줄기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심령을 뒤흔드는 사자후에 궁상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자후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
궁상화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심원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궁상화는 심원의를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사자후의 주인공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몸에서 순간순간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십여 명의 무인이 피 떡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마치 무인지경인 양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남자의 기세에 천하의 궁상화조차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반대로 심원희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왔구나·”
그는 사자후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천하에 수많은 무인과 그만큼 많은 무공이 존재하지만 저렇게 빛을 이용하는 무공은 단 하나밖에 없다·
성광류(聖光流)·
그리고 성광류를 익힌 자도 단 한 명뿐이다·
담수천 그가 드디어 전장에 합류한 것이다·
“쳇!”
궁상화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담수천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의 엄청난 기세에 밀야의 진용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궁상화가 빠른 결단을 내렸다·
“모두 물러난다·”
“대주?”
“하지만····”
“명령이다·”
이의를 제기하려 했던 천무대의 무인들이 궁상화의 명령이라는 말에 입을 꾹 다물고 급히 물러났다·
묵원광과 율사희도 마찬가지였다· 진무원은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오늘의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시선이 담수천을 향했다·
그의 가공할 존재감이 느껴졌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그의 성광류는 더욱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담수천이 마침내 심원의와 진무원 앞에 멈춰 섰다·
어느새 싸움은 끝나고 모든 이가 담수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담수천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크윽! 창천무제다·”
“아아!”
밀야의 진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반대로 운중천의 진용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전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운중천으로 넘어간 것이다·
“수천·”
겨우 목숨을 구한 심원의가 반색을 했다· 하지만 담수천의 시선은 심원의가 아닌 진무원을 향해 있었다·
불같이 뜨거운 심원의의 눈빛과 호수처럼 잔잔한 진무원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삼 년의 시공을 건너뛰어 그들이 다시 조우하는 순간이었다·